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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금남정맥 08차(진고개~구드래나루터) : 백제의 흥망성쇠를 기억하며 걸은 마지막 금남길

by 재희다 2012. 6. 24.


산 행 지 : 금남정맥 08차(진고개~구드래나루터)

산 행 일 : 2012. 06. 23.(토)

산행코스 : 진고개 ~ 청마산 ~ 석목재 ~ 금성산 ~ 부소산 ~ 낙화암 ~ 구드래나루터

(산행거리 17.8km, 8시간 소요)

산행참가 : 23명.

 

<산행지도>

 

지난해 초겨울에 시작한 금남정맥 산줄기 종주를 오늘로서 마감하게 된다. 지난번 낙남정맥 졸업 때까지만 해도 졸업 현수막도 준비하고 조금은 설레는 기분도 있었지만, 이제는 많이 무덤덤해진 분위기다. 오늘 금남정맥 종주를 마침으로서 9정맥 중 5정맥을 마치게 된다. 이제 남은 정맥은 한남금북. 금북. 한남. 한북정맥 등 4개가 남았다. 그동안 걸어온 산행길이 뿌듯하지 아니할 수 없지만, 남은 정맥길이 점점 줄어든다는 게 왠지 아쉽게도 느껴진다.

 

 

지난번 산행 종점이었던 진고개 빨간지붕 할머니 댁 앞에 도착하여 산행 준비를 마치고,

 

흔히들 진고개란 지명은 비가 오면 질척거렸다는 고개를 칭하는데, 이곳도 예전에는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탄천에서 논산, 강경으로 이어지는 645번 지방도가 지나는 이곳은 예전에는 고개가 상당히 높았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중요한 군사도로였고, 6.25 당시는 미군 장갑차들이 고개가 높아 몇대나 굴러 큰 사고가 났던 곳이라고 한다.

 

구드레나루터를 향한 금남정맥 마지막 산행을 위하여 도로 옆 들머리로 들어선다.

 

진고개 들머리에 금남정맥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지난 4월에는 없었는데, 공주시에서 최근에 설치한 듯하다.

 

 

 

잠시 능선길을 걷노라니, 좌측 절개지 아래에 콘크리트 흄관 제조공장이 들어서 있다.

혹여 발을 헛디디면 큰일 날듯 하다. 

공주시에서 금남정맥 길을 관리하려면 이런 곳에 안전시설을 설치해 줬으면 좋겠는데..ㅉㅉ  

 

 

직진의 능선길을 두고 금남정맥은 우측 아래 방향으로 휘어진다.

 

 

깃대봉(161.4m)이라 적힌 표지판 앞쪽에 삼각점도 설치되어 있다.

 

 

이름도 생경한 안경구덩이산(106m)을 지난다.

 

<안경구덩이산(106m)>

공주시 탄천면 남산리에 있는 조그만 봉우리로, 동네 뒷산같은 느낌이다. 안경골은 금광이 많이 있어서 안경을 쓰고 금을 발견했던 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새벽안개는 점점 짙어지며 주위 분간을 어렵게 하는데,

조그만 봉우리에서 금남정맥이 좌측으로 꺾여지는 것으로 보아 감나무골재 직전 봉우리쯤으로 짐작된다. 

 

 

혹시 알바에 나선 분들이 있는지를 잠시 확인하고,

 

 

 

공주시 탄천면 남산리와 삼각리를 잇는 시멘트 포장의 감나무골재/명덕재(153m)를 지난다. 

 

 

 

오는 금남정맥 마지막 구간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인 감토봉(262m)에 도착한다.

 

 

<감토봉(262m)>

탄천면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능선으로 오늘 산행 중 가장 높은 봉우리다. 별다른 표식도 없고 주위 조망도 없다. 정상에는 관리가 안된 무너진 묘지만 하나 있고, 산꾼들이 지나간 흔적인 표지기만 잔뜩 붙어 있다. 설치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지도상에는 262봉이건만 최근에 감토봉이란 이름을 하나 부여받은 모양이다. 이곳에서 금남길은 우측으로 90도를 꺾어져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감토봉에 도착하여 잠시 다리를 쉬게 한다.

 

 

 

 

주변은 아침 안개에 묻혀 있다.

 

 

 

감토봉에서의 짧은 쉼을 뒤로하고,

 

 

 

표지기들의 향연이 펼쳐진 등로를 잠시 따르면,

 

 

 

가자티고개에 이른다.

 

 

<가자티고개(123m)>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남산리에 있는 고개로, 남산(南山) 아래에 있어서 남산골이라고 부른다. 799번 지방도가 남.북으로 뻗어있어 남쪽으로는 부여군 조촌면에, 북쪽으로는 덕지리로 연결되는 고개이다. 여기서부터 한동안 계속됐던 공주시와 이별하고 부여군으로 접어든다. 

 

가자티고개 들머리에 설치된 금남정맥 등산 안내도.

 

 

가자티 고개 날머리의 낙석방지용 철책이 정맥꾼들을 위해 한 칸이 제거되어 있고, 콘크리트 옹벽 아래에는 받침돌도 놓여 있다. 모처럼 작은 배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끔 한다.

 

 

가자티고개 들머리로 들어서는 백두들!

 

 

 

파평윤씨들의 안식처를 지나고,

 

 

 

됨봉(160봉)인듯한 봉우리도 그냥 지나친다.

 

 

<됨봉(160m)>

공주시 탄천면 남산리에 있는 조그만 봉우리로  이 봉우리 아래에 있는 홍성골 마을이 뒤웅박(됨박)처럼 생겼다하여 이 고장 사람들은 됨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전망이 트인 묘지에서 잠시 목을 축이며 쉼을 한다.

 

 

 

 

 

옛 고개의 흔적인듯한 곳에 금남정맥은 좌측으로 가라는 표지판이 걸려 있다.

 

 

 

신양고개 직전 벌목지에서 산딸기를 발견한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깔끔하니 상까지 펼쳐 놓고 모처럼 느긋한 아침식사를 한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출발하니 이내 신양고개를 지나게 된다.

 

 

<신앙고개(130m)>

부여군 초촌면 세탑리 신탑골과 공주시 탄천면 가척리 돌정이 마을을 넘나드는 고개다.

 

 

106봉 이정표에서 금남길은 수자원공사 방향이다.

 

 

 

오솔길을 따라 표지기가 걸려있지 않았으면 정맥 능선의 구분이 어려운 구릉이 이어진다.

 

 

 

좌측 큰덕골 방향으로 축사가 내려다 보이고,

 

 

 

벌목지에서 금남길은 우측으로 휘어진다.

 

 

벌목지대를 지나는 백두들!

 

 

 

평정말 갈림길에서 금남길은 신암리회관 방향이다.

 

 

 

부여읍 송곡리 방면 조망.

 

 

 

산성터 흔적을 좌측으로 돌아서 지나고,

 

 

산성 위로 올라서서 돌아본 금남능선.

 

 

안개에 가려진 지나온 금남정맥의 봉우리들.

 

 

 

조석산(184.9m)에 이르자 '금동대향로' 등의 백제 유적지 이정표가 처음으로 눈에 뜨이며 옛 백제의 수도에 있음을 실감케 한다.

 

 

산판에서 땀 흘려 일하고는 잠시 쉬는 분들 같다.

 

 

 

 

 

조석산 정상에서 증명사진을 남기고는, 다시금 금남길 잇기에 나선다.

 

 

 

석목고개로 향하는 금남길은 싱그러운 나무 그늘 아래로 여유롭게 이어진다.

 

 

 

이정표가 얄궂다.

부여군은 그렇다 치고, 금동대향로는 어쩌란 것인지!

또 산길에 LPG주유소 이정표는 왜 필요하며, 굿뜨래는 또 뭔지..!!

 

 

백제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첫째 B.C 18년에 한성(지금의 서울)에 수도를 정하고 나라를 건국하며 융성한 한성백제 시기로, 이 시기는 B.C 18년에서 서기 475년 문주왕까지 500여 년에 이른다. 문주왕은 즉위 첫 해에 웅진(지금의 공주)으로 수도를 옮긴다. 바로 이어 웅진백제시대가 열리며, 이 시기는 475년 문주왕에서 538년 성왕까지 계속된다. 마지막으로 성왕 16년(538) 지금의 부여인 사비로 천도하는 사비백제시대가 열린다. 이 시기는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나라를 빼앗긴 660년까지 이어진다.

실제로 백제가 500여 년간이나 한성에 수도를 두었건만, 정작 사람들은 백제 하면 부여와 공주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아마 오늘날 공주와 부여에 많은 백제 유적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주에는 무령왕릉과 공산성으로 대표되는 유적과 유물이 여기저기 남아 있고, 부여에는 부소산성과 낙화암, 정림사지오층석탑, 그리고 능산리고분군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들이 찬란했던 백제의 문화유산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한 이정표를 스쳐지나,

 

 

 

옛 애인과 함께라면 더 좋을듯한 숲길을 걷고 또 걸어서 가노라면,

 

 

 

청마산 갈림길 이정표가 나오는데, 이곳에도 아무도 필요치 않을 LPG 충전소를 표시하는 이정표가 있다.

 

 

이곳을 지나며 이정표에 LPG 충전소가 기준점이 되고 있다. 그 충전소가 있는 곳은 석목고개인데, 그냥 석목고개라 하면 될 것을 굳이 LPG충전소를 기준점으로 잡은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LPG 넣으려 가시는 분들!

 

 

 

산불감시 카메라가 설치된 봉우리를 지나,

 

 

 

금남능선의 왼쪽(남쪽) 능산리 방향으로 4번 국도가 지나는 부여터널이 조망된다.

 

 

능산리 쪽으로 벌목이 된 능선을 지나는 백두들.

 

 

 

좌측 건너편으로 "국제도덕협회 일관도 교육원"이 보이는 곳에서,

 

 

잠시 멈춰 서서 능산리 들판을 조망하는데,

 

 

능산리 들판을 가로지르는 4번 국도가 시원스레 뻗어 있다.

 

 

 

부여 청마산성 터를 지난다.

 

 

<청마산성(靑馬山城)>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백제 때의 산성으로 사적 제34호다. 부여 중심부에서 동쪽으로 4.5㎞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능산리와 용정리에 걸쳐 있는 월명산(月明山)에 축조된 포곡형의 토석혼축산성으로 우리나라 고대 성곽중 최대 규모이다. 둘레는 6.5㎞에 달하고 있는데, 하나의 골짜기를 성 안에 두고 동쪽과 서쪽의 2개 구릉을 감싸듯이 축조되어 있다. 내부의 흙을 파서 축조했으므로 안쪽으로 자연적인 호를 이루게 되었다. 북쪽 성벽에는 석축상태가 원형대로 남아 있으나 나머지 대부분의 구간은 거의 무너진 상태이다. 성벽은 지형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는데, 현재 서쪽 부분에서 확인되는 성벽의 높이는 4~5m, 너비는 3~4m에 이른다. 성 안에는 망대·우물터·건물터를 비롯해 경용사지(驚龍寺址)·의열사지(義烈寺址) 등의 절터도 있다. 서쪽에는 수구(水口)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성벽이 무너져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산성의 기능은 수도인 사비도성을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 남쪽에는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이 능산리 고분군이다.

 

무너진 청마산성 흔적을 돌아,

 

 

 

여유로운 정맥길을 이어가는데,

 

 

 

나무줄기를 타고 오르는 넝쿨식물들이 숲의 정취를 더욱 원시스럽게 만들어 준다.

 

 

 

오산고개.

 

 

<오산고개>

충남 부여읍 용정리와 능산리를 넘는 고개로 지도상에는 청마고개로 표기되어 있지만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채마소 고개로 더 알려져 있다. 고개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백제의 왕과 왕족들의 것으로 추정되는 능산리 고분군이 있다. 백제 왕릉원이라고도 부르는데 발굴 당시에는 대부분 도굴되었다고 한다.

이곳 능산리는 무덤 사이의 사지(寺地)에서 발견되었다는 “백제금동대향로”가 유명하다. 동체(胴體)를 연꽃봉오리로, 뚜껑은 산모양으로 만들어 많은 물상(物象)을 등장시켰고 정상에 봉황을, 아래에는 용을 배치하였다. 중국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나 산, 인물, 동물 등을 더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돌아본 오산고개 모습.

 

 

 

오산고개를 지나 금성산을 향해 다시 숲으로 든다.

 

 

 

왕릉 갈림길 이정표가 나오는데, 능선 좌측 아래쪽에 능산리 고분군이 있다.

 

 

백제의 흔적을 카메라에 담으며,

 

 

장대지 쉼터에서 잠시 쉼을 한다.

 

 

<부여사비나성 장대지>

나성(羅城)이란 2중으로 구성된 성곽에서 왕궁을 둘러싼 성곽을 왕성 또는 내성이라 하고, 바깥으로 둘러싼 성곽을 나성이라 한다. 또한 장수가 지휘하던 장소를 장대(將臺)라고 하는 백제의 사비성에는 나성이 존재하였다는 뜻이고, 그 흔적이 지금 이곳이다.

 

지금 걷고 있는 금남정맥길이 '사비길'인 모양이다.

 

 

여러 개의 벤치가 설치되어 있는 장대지 쉼터를 뒤로하고,

 

 

 

평안한 능선길을 걷노라면,

 

 

 

잘 단장된 가족묘지도 지나게 되고,

 

 

 

벤치가 있는 곳마다 앉았다 가노라면,

 

 

 

어느새 석목고개(이정표에는 LPG충전소로 표시)에 도착한다.

 

 

석목고개로 이어진 흙길을 따라,

 

 

그렇게도 이정표에 흔적을 남기고 싶어 했던 LPG충전소 옆을 지나고,

 

 

<석목고개>

석목고개는 부여읍 석목리와 능산리를 잇는 4번 국도가 금남정맥의 주능선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도로는 왕복 4차선으로 이정표에 있던 LPG충전소가 있다.

 

 

4번 국도가 지나는 석목고개를 건너 금성산으로 향한다.

 

 

돌아본 석목고개 모습.

 

 

 

정맥길에 쉼터가 이다지도 많은지..ㅋㅋ

 

 

 

조그만 고갯길을 지나는데, 

고개 왼편이 가탑리, 오른편이 쌍복리라 표시되어 있다.

 

 

 

완만한 경사를 오르면,

 

 

 

금성산 정상에 자리한 통수대에 도착한다.

 

 

 

 

 

 

<금성산(錦城山, 121.2m)>

해발 121.2m밖에 안되지만 백제의 삼산(三山) 가운데 하나로,  <삼국유사> 남부여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군중에는 삼산이 있는데, 그 이름은 일산(日山)과 오산(吳山), 부산(浮山)이다. 백제국 전성기에는 이들 삼산 위에 신선이 살며 서로 날아 왕래함이 아침저녁으로 끊임이 없었다. 삼산 중에 일산은 부여 시가지의 동편에 있으며, 지금의 금성산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산은 현재의 오석산, 부산은 백강 마을 뒷산을 말한다. 이들 삼산은 금성산을 중앙에 두고 서쪽의 부산과 동쪽의 오산이 3㎞씩의 간격으로 일직선 상에 놓여 있다.

삼산의 중앙 금성산은 백제 전역의 각 산성에 송수신을 담당하는 통수대(統帥臺)를 세워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이 발생했을 때 군사 행동의 지시와 통제 및 총괄적 연락의 시작점이 되거나 종착점 역할을 했던 곳이다. 통수대는 말 그대로 장군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통수대 정자 아래 삼각정이 있다.

 

 

통수대에서 바라본 서쪽 군수리 방향. 연무가 없었으면 금강이 내려다 보일 텐데...

 

 

 

 

 

통수대를 뒤로하고,

 

 

이제 계백공원(금성산 산림공원)으로 들어선다.

 

 

 

국립부여박물관 뒤편 금성산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조왕사(朝王寺) 갈림길을 지난다.

 

 

종합안내도를 보니 지금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더운 날씨에도 쉬는 분들이 보이지 않는 무노정(無老亭) 옆을 지난다.  

 

 

무노정 옆에서 금남길은 우측 내림길로 이어진다.

 

 

 

 

맞은편에서 오는 소풍 나온 초딩들과 조우하는데,

고사리 손에 집게를 들고 씩씩하게 폼을 잡은 녀석을 보니 봉사활동을 나온 듯도 하다.

 

 

 

좌측 멀리로 금강을 건너는 백제대교가 보이고,

 

 

 

계백문 위로 이어진 에코브리지를 지난다.

 

 

옆에서 찍은 계백문 모습.

 

 

 

 

 

갈림길에서 좌측 윗길로 접어들어,

 

 

 

독립운동애국지사 추모비를 지나면,

 

 

 

능선길은 국궁장이 가로막아 서며 따르던 시멘트길은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가는데,

이곳에서 금남길은 우측 숲으로 들어가 국국장 절개지를 따라 이어진다.

 

 

내려다본 국궁장 모습.

 

 

 

국궁장을 왼쪽에 두고 우측으로 내려서면,

 

 

부여 시내 건너편으로 가야 할 부소산이 건너다 보인다.

 

 

텃밭 사이로 이어진 밭두렁을 따라 내려서는 백두들.

 

 

 

부여 시내 주택가로 들어서고,

 

 

앞에 보이는 부소산을 향해 방향을 잡고 직진!

 

 

 

일단 앞에 보이는 부여도서관 건물을 향하고,

 

 

돌아본 금성산 방향으로는 산행기에서 보았던 교회건물이 보인다.

 

 

 

도로 건너편에 부여도서관이 보이고,

 

 

이곳에서 횡단보도 건너편 정면 골목으로 보이는 부여여고를 향한다.

 

 

 

부여여고 앞에 도착하여,

 

 

부여여고 정문으로 들어서고,

 

 

운동장 우측을 가로질러 우측 편 계단을 오르면,

 

 

 

 

 

팔각정터 우물이 나타난다.

 

 

빈 물병에 물을 채우고,

 

 

 

금남정맥길은 부여여고 뒤편 울타리 쪽문?으로 이어진다.

 

 

 

부소산 공원길을 만나 우측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영일루로 향한다.

 

 

<부소산(扶蘇山, 106m)>

야트막한 산이지만 동쪽과 북쪽 두 봉우리로 나뉜 부여의 진산이다. 부소산이라는 산 이름은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 처음 보인다. 부소(扶蘇)의 뜻은 백제시대 언어로 소나무(松)의 뜻이 있어 부소산은 '솔뫼' 즉 <소나무가 많은 산>으로 보는 학설이 유리하다.

 

 

영일루 도착.

 

 

<영일루(迎日樓)>

부여에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 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에서 보면 멀리 공주 계룡산의 연천봉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고 한다.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가 있어서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해지는데, 이 건물은 고종 8년(1871)에 당시 홍산 군수였던 정몽화가 지은 조선시대의 관아문이다. 1964년에 지금 있는 자리인 부소산성 안으로 옮겨 세운 뒤, 집홍정이라는 건물의 이름을 영일루라 고쳐 불렀다. 영일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정면에는 '영일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다른 관아문에 비해 그 규모가 비교적 큰 것이 특징이다.

 

아쉽게도 영일루는 공사 중이다.

 

 

 

군창지를 지나는 백두들.

 

 

 

 

<군창지>
백제 때 군대에서 쓸 식량을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로, 부소산 동쪽에 있는 부소산성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군창지는 1915년 땅 속에서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1981년과 1982년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건물터의 규모를 자세히 밝혀냈다. 백제 때부터 자리 잡은 이곳 군창지를 조선시대에도 다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에 공간을 두고 동 서 남 북으로 건물을 배치하여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군창지 흔적.

 

군창지 옆을 지나는 백두들.

 

 

 

새벽부터 이어진 산행에도 불구하고,

금남정맥길의 막바지라는 생각에 발걸음에 발랄함이 실려 있다.

 

 

 

반월루.

 

 

<반월루(半月樓)>

부소산성의 테뫼식 산성과 포곡식 산성이 만나는 등성이에 1972년에 지은 2층 누각으로, 현재 부여의 시가지와 부여를 감싸며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 부산의 대제각, 규암진 수북정이 아련하게 들어와 부여가 반월성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는 곳이다.

 

 

잠시 쉬었다 가라는 글에 따라..,

 

 

<반월루 누각에서 바라본 부여(扶餘)>

부여는 1914년 일제 강점기 때 홍산현, 임천군, 석성현이 부여현에 합쳐져 이루어진 곳으로, 백제시대에는 소부리 또는 사비로 불렸다. 사비는 원래 새벽이라는 이 지역 토속 사투리였다고 하며,  지금의 이름인 부여도 ‘날이 부옇게 밝았다’는 말에서 나온 토박이 말로서 나중에 한문으로 표시하다보니 扶餘(부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부여라는 뜻은 이 땅이 새벽의 땅이며 아침의 땅이라는 뜻이다. 백제는 성왕(26대)때인 538년에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이곳 부여로 수도를 옮겨 122년 동안 나라를 지켰는데,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망한때는 의자왕(31대)때인 660년 7월이었다.


옛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망하기 직전에 나라안 곳곳에서 기이한 조짐이 보였다고 한다. 홰나무가 사람처럼 울었고, 개구리 수만마리가 나무 위에 올라 앉았으며, 귀신이 대궐에 들어가 ‘백제가 망한다’고 외치고는 땅속에 들어가므로 그 땅을 파보니 거북이 한마리가 있고 그 등에 “백제는 둥근달과 같고 신라는 초생달 같다”는 글귀가 씌여 있기도 했다. 그러나 의자왕은 옳은 충고를 하는 충신들을 가두고 사비강가에서 풍류를 즐기다가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많은 신하를 포함한 백성들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고 한다.

 

반월루에서 바라본 금강 방향 부여 조망.

 

 

한 폭의 그림이 걸려 있는 듯하다.

경복궁의 경회루에서도 이런 느낌이었는데..!

 

 

조명 조절에 실패하여 흐리게 나왔어요. 죄송!!

 

 

 

 

 

시간 여유가 있었으면 부여의 이모저모를 돌아봤을 텐데..!

 

 

 

어느새 부소산 정상을 지난 듯, 정맥은 내림길로 바뀐다. 금남정맥 마지막 내리막길이다.

 

 

 

고란사 갈림길.

우측으로 가면 고란사로 바로 이어지지만, 우리는 낙화암을 보기 위해 좌측 길로 들어선다.

 

 

 

백화정.

 

 

<백화정(百花亭)>

낙화암의 바위 위에 있는 정자로, 백제가 멸망할 때 적국의 병사들에게 유린을 당하느니 강물에 몸을 던져 죽음을 택한 3천 궁녀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로서 매년 10월 백제 문화제 때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의자왕은 서동요로 유명한 무왕(武王)과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백제의 오랜 전통에는 다른 나라의 혈통을 받은 왕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금기시되어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의자왕이 왕자 시절에는 신라의 피를 받았다는 것을 극복하고 자기 세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정계의 유력한 인사들을 포섭하기에 힘쓰는 한편, 부왕인 무왕과 모후인 선화공주에게 극진히 효도를 다하여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한다. 그래서 결국 나이가 40이 되어서 태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마침내 왕위에 오르자 반대세력을 거세하여 왕권을 확고히 하고, 신라를 침공하여 100 여성을 함락시켜 국토를 확장하는 등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재위 20년 중 초기에 이룩한 업적과는 달리 신라의 적의를 크게 자극하였을 뿐 아니라, 그 스스로 득세한 왕으로서의 오만이 생겼는지 국정을 소홀히 하고 충신의 충간을 물리치며 

주지육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이에 나라는 멸망하게 되었다.

 

백화정에 올라..!

 

 

백화정에서 내려다본 백마강 모습.

 

 

<백마강(白馬江)>
백마강은 <백제의 제일 큰 강>이라는 뜻으로 규암면 호암리 천정대에서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16km의 금강을 일컫는데, 백제 사람들은 이 강을 사비강, 백강이라고 불렀다. 금강은 전북 장수군 수분리 신무내산 뜬봉샘에서 시작하여 장항, 군산 앞 서해바다까지 401km를 흐르는 큰 강으로, 금강을 지역에 따라 고유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데, 금산군 제원 부근에서는 광석강(廣石江) 대전시 회덕에서는 부강(芙江) 또는 절강, 공주에서는 곰강 또는 금강(錦江), 금강천이 합류되는 천정대 부근에서는 창강(蒼江)으로 불리며, 백마강 이하 서해바다까지는 진포(鎭浦)라고 부른다. 원래 금강은 곰강(웅진熊津)의 음역이므로 공주 부근에서 한정하여 불렀으나 점점 확대되어 지금의 금강 전체를 지칭하게 된 것이다.

 

 

노랫말대로 백마강에 돛단배가 떠 있다.

 

 

 

낙화암에서!

 

 

 

 

낙화암에서 내려다본 백마강 모습.

 

 

그때 그녀의 현생 모습?

 

 

<낙화암(落花巖)>

백제가 멸망하던 날(660년 7월) 백제의 여인들이 굳은 절개와 충절을 지키기 위해 백마강에 몸을 던졌던 곳으로 삼국유사는 기록하고 있다. 훗날 그 모습을 꽃을 떨어지는 것에 비유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교훈적인 문화적 유산으로 패자(敗者)의 역사로 대표된다. 백마강에서 바라보면 아직도 절벽 색깔이 붉은 색인데, 당시 백제의 여인들이 흘린 피로 물들였기 때문이라는 전설이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부여현 고적조에 ‘(낙화암은) 부여현 북쪽 1리에 있다. 조룡대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의자왕이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게 되자 궁녀들이 쏟아져 나와 이 바위 위에 올라가서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으므로 낙화암이라 불렀다 한다’고 적혀 있다.

낙화암은 부소산 서북쪽 강변의 단애로 백제의 700년 왕조가 무너지던 날, 의자왕의 3,000 궁녀가 함께 최후를 맞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삼국유사를 인용하고 있으나, 이는 철저하게 백제를 무너뜨린 당사자인 신라가 문화대국 백제왕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보인다. 3,000 궁녀는 궁녀가 아니라 대부분 쫓기고 쫓기던 병사와 민초들이었을 수 있다. 3,000 궁녀는 패배한 의자왕의 사치와 방탕을 강조하려는 교묘한 각색이라는 주장도 있다. 낙화암 아래 백마강 옆 절벽에 송시열이 쓴 ‘낙화암’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 하지만 낙화암 위에서는 볼 수 없다.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만 1,500여 년 전의 역사를 간직한 채 후세에 전하고 있다.

 

 

 

낙화암에서 내려다본 백마강 하류 방향 조망.

 

 

"맘있는 나그네"의 "맘"은 어떠 "맘"인지...!!!

 

 

 

고란사 도착.

 

 

<고란사(皐蘭寺)>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본사인 공주 마곡사의 말사로,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백제 아신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고, 낙화암에서 목숨을 던진 백제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 초기에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절 이름은 뒤편 암벽에 자라고 있는 고란초에서 따 왔다.

법당 건물은 조선 정조 21년(1797)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연화문을 새긴 초석을 놓고 원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조각 장식이 화려한 익공식 공포를 짜올렸다. 초석에 새겨진 연화문양은 고려시대의 기법으로 추정된다. 사찰의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낙화암에 얽힌 전설과 더불어 험준하며 기이한 바위, 고란초 등으로 유명하다.

  

 

 

 

고란사 전경.

 

 

고란사에서 본 백마강.

 

 

 

고란사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면,

 

 

고란약수터가 있다.

 

 

<고란약수의 전설>

아득한 옛날 소부리(옛 부여지명)에 살던 노부부가 있었다. 부부는 금실이 참 좋았으나 늦도록 자식이 없어 늘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을 한탄하고 있던 중, 어느날 할머니의 꿈속에 일산(日山)의 도사로 부터 부소산의 강가에 있는 지금의 고란사 바위에 고란초의 부드러운 이슬과 바위에서 스며나오는 강한 물, 곧 유강(柔剛)이 합한 음양(陰陽)약수가 효험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날 밤 남편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걱정에 찬 할머니는 다음날 아침 약수터로 가봤더니 왠 간난아기가 남편의 옷속에 누워 울고 있었다. 도사가 약수를 한잔 마실때 마다 3년이 젊어진다고 한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할 수 없이 할머니는 갓난아기를 안고 집에 돌아와 고이 길렀는데, 후에 그 아이가 자라 나라에 큰 공을 세워 백제시대에 최고 큰 벼슬인 좌평에 올랐다고 한다.

 

고란약수 한잔으로 목을 축였으니 3년만 젊어졌을 것이고, 고란사 나루터로 향한다.

 

 

 

고란사 나루터.

 

 

금남길은 이곳에서 백화정 위쪽으로 다시 돌아올라가 오른편 능선으로 가야 하지만,

이미 금강에 도착하였으니 돛단배로 이동하는 것도 좋을 듯하여!

 

 

꾀나 비싼 뱃삯을 지불하고 금남길의 종착지인 구드래나루터로 가기로 한다.

 

 

 

나루터에서 배를 기다리는 백두들.

긴 산행에도 불구하고 금남정맥을 마쳤다는 뿌듯함이 묻어난다.

 

 

이내 돛단배가 들어오고,

 

 

 

무늬만 돛단배인 백마강호에 올라,

 

 

고란사 나루터를 뒤로한다.

 

 

 

돛단배에서 본 조룡대 전경.

 

 

<조룡대(釣龍臺)>

 

충청남도 부여군의 쌍북리(雙北里) 고란사(皐蘭寺) 북동쪽 백마강 가운데에 있는 바위다. 조룡대(釣龍臺), 용바위, 용암 등으로도 부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호암(虎岩)으로부터 물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부소산(扶蘇山) 아래에 이르러, 한 괴석(怪石)이 강가에 걸터앉은 듯이 있는데 돌 위에는 용이 발톱으로 할퀸 흔적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강에 임하여 물을 건너려고 하는데 홀연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므로 흰 말로 미끼를 만들어 용 한 마리를 낚으니, 잠깐 사이에 날이 개어 드디어 군사가 강을 건너 공격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강을 백마강이라 이르고, 바위는 조룡대라고 일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에 "조룡대는 관아의 북쪽, 강 가운데에 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할 때, 비바람이 크게 몰아쳐 군사들이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소정방이 바위 위에 서서 흰 말을 미끼삼아 용을 낚았다. 잠깐 사이에 비가 멎고 날이 개어 드디어 군사들이 강을 건너 백제를 멸망
시켰다. 그런 까닭에 강의 
이름을 흰 말의 강이라는 뜻으로 '백마강'이라 부르고, 바위는 용을 낚았다는 뜻에서 '조룡대'라고 불렀다. 바위 위에는 아직도 신발자국이 남아 있다."라고 적혀 있다.

 

 

금강(백마강) 물결에 몸을 싣고서,

 

 

고란사 나루터를 뒤로하고 구드레나루터로 향한다.

 

 

 

 

돌아본 고란사나루터와 낙화암.

 

 

낙화암 아래 백마강 옆 절벽에 송시열이 쓴 ‘낙화암’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는데, 한번 찾아보자!!

 

 

 

돌아본 낙화암.

 

 

이내 구드래나루터가 보이고,

 

 

백제대교가 가까이 다가오나 싶더니, 뱃머리를 돌려 구드래나루터로 향한다.

 

 

 

구드래나루터 도착.

 

 

 

구드래나루터 앞에서 금남정맥의 마침표를 찍는다!

 

 

 

 

 

 

 

기다리던 애마에 오른다.

 

 

시간이 넉넉지 못하였지만, 많은 기쁨을 주시는 백두의 여성 대표분들!

 

 

<금남정맥의 종착지 구드래나루터>'구드래'는 부소산(扶蘇山) 서쪽 기슭의 백마강(白馬江) 가에 있는 나루터 일대를 말한다. 이 명칭은 ‘구들돌’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하는데,『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왕이 왕흥사(王興寺)에 예불을 드리러 가다 사비수(泗沘水) 언덕 바위에 올라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이 곳을 ‘자온대(自溫臺)’라 부르게 되었고, 그 이름에서 구들돌, 그리고 다시 구드래로 변하여 구드래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백제를 오가는 왜의 배들이 구드래 나루터를 통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에 들어왔는데, 왜에서 백제를 부를 때 ‘구다라’라고 부른 것은 ‘구드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백마강변에 핀 꽃들에게도 화답하고,

 

 

 

구드래나루터 금남정맥 날머리를 뒤로 한다.

 

 

 

부여시내 사우나에서 땀을 씻고,

 

 

 

금남정맥 쫑파티를 위해 부여시내에 있는 산장식당으로 향한다.

 

 

금남정 맥길 고생 많으셨고요.

 

 

백마강에서 건져 올린 우여 매운탕으로, 그간의 노고를 풀어 본다.

 

 

 

 

 

금남정맥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향한다.

 

 

 

그냥 갈 수 없잔이여~~, 양재에서!

 

 

 

백두산에서 뻗어 내려오던 백두대간이 설악산 오대산 속리산 태백산 덕유산으로 줄기차게 내려오다, 전북 장수군 백운산 가기 전 영취산에서 갈래를 쳐 금남 호남정맥을 이루어가다, 전주 진안간 국도 모래재 위에 있는 조약봉에서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으로 나뉜 후, 운장산~대둔산~계룡산~금성산~부소산으로 이어져, 부여 구드래나루에서 금강으로 스며드는 도상거리 130km의 비교적 짧지만 명산들을 꿰차고 있어서 정맥의 꽃이라 불리는 금남정맥!

이번에 지나온 금남정맥은 금강 하구가 아닌 이곳 부여 구드래나루에서 맥을 다하다 보니 완전한 금강 남쪽의 울타리가 되지 못한다. 금강 남쪽의 울타리가 되는 산줄기는 장군봉을 지난 작은싸리재 직전에서 만나는 (진안군 주천면과 완주군 동상면, 운주면 삼면봉인) 750봉에서 서쪽 왕사봉 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름 없는 야산을 꿰차며 논산천의 물길까지 모아 명실공히 금강의 아래쪽 울타리가 되어 금강하구인 군산의 장계산에서 바다로 스며드는 산줄기이다 보니, 정맥의 이름에 대한 논란이 되고 있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리에 따라 이 산줄기를 '금강정맥', '실질적 금남정맥' 등으로, 금남정맥을 '금강기맥'으로 새 이름을 지어 부르기도 하지만, 산경표 상의 금남정맥은 그대로 두고 금강하구로 향하는 산줄기를 '대동(여지도) 금남정맥'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언제쯤이 될지는 모르지만 대동금남정맥에도 우리의 발길이 미치게 되리라 여기며..

 

백두들의 금남정맥 기록을 마친다.

 

행복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걸은 금남길은 즐거운 동행이었다. 동행했던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