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2년

대간남진 11차(삽당령~백봉령) : 백두대간 소설 쓰기!

by 재희다 2012. 10. 14.


산 행 지 : 백두대간 11차(삽당령~백봉령)

산 행 일 : 2012. 10. 13.(토)

산행코스 : 삽당령~두리봉(1,033m)~석병산(1,055m)~고병이재~931봉~생계령~자병산~백봉령 (거리 18km, 8시간)

산행참가 : 23명.

 

<산행지도>

 

 

삽당령 정상의 이정석.

 

<삽당령(揷唐嶺 680m)>

삽당령은 강릉시 왕산면 묵계리와 송현리 사이를 잇는 고개로 35번 국도가 지나간다. 동해의 남대천과 남한강으로 흐르는 송현천의 발원지이며, 옛날 정선군 임계 사람들이 강릉에서 장을 봐서 오다가 삽당령에 도착하여 길이 험하여 짚고 오던 지팡이를 정상에 꽂아놓고 갔다하여 '꽂을 삽(揷)'자를 써서 삽당령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지명 유래와 관련된 또다른 설에 의하면, 이 곳 지형이 삼지창 모습으로 세갈래로 갈라져 삽당령이라 했다고도 하고, 고갯마루에 당집이 있어

당집 사이에 있는 고개란 뜻의 샅당령이 변해서 삽당령이 되었다고도 하는데, 이 곳의 옛 이름이 삽운령(揷雲嶺)인 것을 보면 백두대간의 마루금에서 수시로 변하는 기후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해 보인단다.

 

어둠을 뚫고 삽당령 들머리로 들어서는 백두들.

 

 

들머리를 들어서자 곧바로 널찍한 임도를 가로질러, 첫번째 봉우리인 780봉을 향한 급경사 오름길이 시작된다.

 

 

급경사 나무계단길을 조금 오르자 이정표나 나타나고, 여기서 이정표가 일러주는 대로 좌틀하여 진행한다.

 

 

04:23  780봉 헬기장을 지난다.

 

 

04:35  이슬이 맺힌 산죽길을 헤치고 올라오니, 866봉 삼각점이 나타난다.

 

 

866봉에서 10여분 쯤 진행하니 이정표가 있다.

이정표의 거리로 미루어 보아, 삽당령과 두리봉의 중간쯤에 온 듯하다.

 

 

두리봉 정상 도착.

866봉부터는 비교적 완만한 등로가 이어지는데 산죽밭 사이로 이어진 등로를 한 시간쯤 따르면 두리봉에 도착한다.

 

<두리봉(斗里峰 1,033mm)>

강릉시 옥계면 북동리, 왕산면 목계리, 정선군 임계면 직원리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산꾼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목재 테이블이 여러개 있고, ‘부산 낙동산악회’에서 설치한 이정표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다. 국토지리정보원과 조선시대에 발행된 지도에 ‘두리봉(頭理峰)’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실재는 다르다. ‘두리’는 ‘둥글둥글하다’는 순우리말로 ‘둥근 모습을 한 봉우리’라는 의미다. 즉 한자어 표기는 우리말 두리봉을 음차 한 것에 불과하다. 두리봉 또는 두위봉(斗圍峯)으로 두리뭉실해서 두리봉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난 길은 만덕지맥 가는 길인데, 두리봉에서 분기하는 만덕지맥은  만덕봉에서 다시 두 줄기로 나뉘어 진다. 한 줄기는 옥계로 보내고, 다른 한 줄기는 칠성산으로 불리는 담정산을 지나 강릉으로 이어지는데, 산자락 끝에 범일국사가 창건한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사굴산문인 굴산사가 있다. 담정산 골짜기(두리봉과 석병산 사이)를 “담정골” 또는“담정계곡”이라 하는데, 담정골에는 고려와 관련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고려 "우왕"이 제왕산에 제왕산성을 쌓고 유배시절을 보내다가 피살당하고, 고려가 멸망하자 우왕을 모시던 유신들은 우왕의 위패를 보시고 담정골로 피신하여 석병산에 위패를 안치한 후, 임금이 계신 곳이라는 의미로 담정골의 이름을 “단경동(壇京洞)”으로 개명하였다고 전해져 온다.

 

 

두리봉 정상의 넓은 공터에 나무 탁자가 마련되어 있어서 쉼을 하게에 적당하다.

아마도 봉우리 정상에 이런 시설이 있는 곳은 이곳뿐이지 않나 싶다.

 

 

두리봉을 뒤로하고 석병산을 향하는데, 좌측 옥계항 불빛 너머로 동해바다 위의 하늘이 붉게 물들어 온다.

 

 

우측 노추산 방향의 산들.

 

 

좌측 옥계 방향.

 

 

북서  고루포기산 방향.

 

 

석병산 오름길은 돌계단으로 이어진다.

 

 

백두대간답게 주위에는 금강송 소나무 숲이 싱그러움을 더해 준다.

 

 

폐헬기장을 지나자, 좌측 숲 사이로 석병산이 위용을 드러낸다.

 

 

06:26  석병산 갈림길에 도착하여 일월봉 쪽으로 잠시 오르면,

 

 

이내 석병산 정상에 도착한다.

 

 

<석병산(石屛山 1,055m)>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과 정선군 임계면 경계에 위치한 산으로, 깍아지른 듯 솟아 있는 기암괴석의 바위들이 마치 산아래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하여 석병(石屛)이라 이름 붙여졌다. 정상에 서면 강릉시가 한눈에 들어오며, 멀리로 바라보이는 동해의 수평선이 일품이다.

동쪽과 북쪽의 급사면에서는 주수천(珠樹川)의 지류가 발원하고, 서쪽의 완사면에서는 임계천의 지류가 발원한다. 남동쪽 비탈면에 옥계 석회동굴이 있고, 생계령 기슭에는 임계 카르스트지형이 있다. 서쪽 기슭에는 강릉~태백 간 국도가, 남쪽 기슭으로는 정선~동해 간 국도가 각각 지난다.

석병산 정상부에는 바위 한 가운데 둥근 구멍이 뚫린 일월문과 철쭉꽃 군락지가 있으며, 고산자의 대동여지도에 삽운령 동북쪽 줄기 상에 있는 큰 산이라하여 “담정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러한 표기는 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지지 등에도 나타나는데, 석병산이란 이름은 기암괴석들이 바위처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마치 돌 병풍처럼 보인다고 하여 자연스럽게 “석병(石屛)산”으로 불려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담정산이란 지명은 남대천이 발원하는 석병산과 두리봉 사이의 골짜기를 “담정골” 또는 “담정계곡”으로 불리던 것이 구전된 것으로 짐작된다.

 

북서쪽 노추산, 석두봉 방향 조망.

 

서쪽 왕산면 송현리 방향의 운해.

 

 

06:33  석병산 증명.

 

 

가리키는 방향은 아마도 노추산 아니면 고루포기산쯤?

 

북동쪽 만덕봉 칠성산 방향.

 

만덕봉(萬德峰, 1,035m) 아랫자락에 단경골 계곡이 있다. 한때 동해안으로 침투한 무장공비들의 탈출로로 이용된 적이 있을 만큼 계곡이 깊다. 단경골(檀京谷)이란 이름은, 고려말 조선이 개국하자 고려 충신 최문한·김충한·이장밀·김지를 비롯한 수십 명이 이 지역으로 피신해왔다. 이들은 굴산동에 고려의 종묘(宗廟)를 모시기 위해 제단을 만들고 우왕의 제사를 함께 지냈다. 그러던 중 어단을 만든 사실이 발각되자 유신들은 사패(祠牌)를 모시고 골짜기로 숨었다가 단경골 뒷산인 석병산(石屛山)에 사패를 모시고 개동명왈단경(改洞名曰檀京)이라 한 뒤 각자 흩어졌는데, 그 뒤부터 이곳을 단경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다른 설은 주변에 박달나무가 많아 단경(檀景)이라 하였다는 설도 전한다. 계곡 근처에는 이이(李珥)의 위패를 모신 송담서원(松潭書院, 강원유형무화재 44)과 정동진해수욕장·경포도립공원 등 유적지와 관광지가 많다.

 

지나온 두리봉과 만덕봉 칠성산 방향 파노라마.

 

남서쪽 왕산면 목계리 방향.

 

서북쪽 방향 파노라마.

 

 

06:39  석병산을 뒤로하고 상황지미골 갈림길로 돌아나오면,

 

<상황지미골>

강릉시 옥계면에 있는 마을로, 상.하황지미가 있다. 황지미(凰池洞)란 동네는 학림동(서낭뎅이)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오른쪽 골 입구에 효자각이 있고, 골 안에는 범바위, 상황지미, 하황지미 3개의 자연부락이 있다. 골 안쪽으로 들어가면 두 골로 갈라지는데, 왼쪽 골 끝이 선목이고, 오른쪽 골 끝이 곰덫이다. 선목이를 넘으면 왕산면 목계리가 되고, 곰덫을 넘으면 강동면 언별리 단경골이 된다.
옛날 심래조(沈來助, 號:四一居士)라는 분이 무릉도원을 찾아가다가 이곳에 이르러, 이곳이 무릉도원과
비슷하여 냇가 바위에 '訪桃溪(방도계)'라 글씨를 써 놓고, 그 옆에다 봉황이 많이 날아오는 곳이라 하여鳳來亭(봉래정, 나중엔 迎鳳亭으로 고침)을 짓고 살았다 한다. 지금도 마을 입구 서낭 옆 냇가 바위에 글씨가 새겨져 있다. 황지미란 봉황이 날아오는 연당에 못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석병산 일월문이 있다.

 

<석병산 일월문>

'맞은편 능선에서 바라보았을 때, 해와 달처럼 보인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으나, 그 연유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석병산 일월봉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건너편에서 떠오른 달빛이 일월문을 비추면 장관이라고 한다.

 

석병산 일월문에서도 인증을 남기고,

 

석병산 입석대 모습.

 

 

일월문을 둘러보고, 입석대도 보고 하는 사이에 어느새 해가 동쪽 하늘 위로 솟았다.

석병산 정상에서 바라본 동해바다 위로 떠오른 태양!

 

 

06:44  다시 석병산 갈림길로 돌아나와,

 

석병산 갈림길에 있는 석병산 안내판.

 

 

06:47  폐헬기장을 지나 고병이재로 향한다.

 

 

폐헬기장을 지나 고병이재를 향한 내림길에 들어서는데,

가을빛이 완연하게 찾아와 있다.

 

 

돌계단길을 오르면,

 

 

07:18  908봉 헬기장을 지나게 되고,

 

 

등로 한켠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한다.

 

언제나처럼 아침운동 후에 먹는 아침밥이 맛나다.

 

 

07:44  우측 황지미골 방향 조망.

 

 

고도가 높아서 일찍 찾아온 가을빛!

 

 

07:48  원시림의 등로를 걷다 보니, 고병이재에 도착한다.

 

<고병이재>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와 정선군 임계면 큰골을 동서로 잇는 고개다. 속칭 골병이재라고도 한다는데, 정확한 유래를 찾기는 어렵고 '골병이 들게 힘드는 재'라는 의미가 아닐까 짐작해 볼 뿐이다.

석화동굴(石花洞窟)은 강릉 옥계면 산계리에 있는 동굴로 절골에 있어 절골굴이라고도 한다. 이곳 만덕봉·두리봉·석병산 일대는 약 10만 년 전 고생대에 생성된 석회암지대로 곳곳에 많은 석회동굴이 발달해 있는데, 아직 완전한 탐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총연장 1,400m에 이르는 거대한 동굴이라 한다.

 

석병산 안내판이 고병이재에 있는 까닭은?

 

고병이재 이정표.

 

 

07:50  고병이재를 지나자, 이내 좌측으로 자병산의 생채기가 시야에 들어온다.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이 이어지는 등로를 따르면,

 

 

08:07  좌측으로 시야가 트인 900봉에 도착한다.

 

900봉 삼각점.

 

900봉에 설치된 백두대간 안내판.

 

좌전방으로 보이는 상처 난 자병산 줄기가 한눈에 조망된다.

 

 

08:24  가을이 찾아온 등로를 쉬엄쉬엄 걷다 보면,

 

 

08:29  우전방으로 임계면 방향의 운해가 발목을 잡고,

 

 

08:38  931봉에서 돌아본 석병산 방향으로 지나온 대간능선이 아득하다.

 

옥계 방향 조망.

 

 

바람잘날 없는 가지 많은 나무가 아름답다!

그러니 우리도 가지를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ㅋㅋ

 

 

09:16  829봉쯤에서 배낭털이를 하며,

 

느긋한 쉼을 즐긴다.

 

 

09:27  강릉 서대굴 이정표를 지나니,

 

<강릉 서대굴(강원도 기념물 제36호)>

하부고생대 오르도비스기(약 4억8천만년 전)에 퇴적된 조선누층군 석병산층 석회암 내에 형성되어 있다. 강릉 서대굴은 석병산 석회암층(石屛山石灰岩層) 내에 형성된 수직동굴(垂直洞窟)로, 일명 ‘범록굴’이라고도 한다. 주굴(柱窟)의 길이는 약 800m이고, 총연장은 1,500m이다.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 석병산 중복 벼랑에 위치하는 서대굴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동굴로, 약 250m까지는 탐사되었으나 그 이상은 확인되지 않은 상태이다. 동굴은 세로로 땅 속 깊이 뻗어 있으며, 주변의 동대굴과 함께 쌍벽을 이루고 있다. 동굴 안에는 작은 공간들이 발달해 있으며, 옆면에는 고드름처럼 생긴 종유석과 동굴 바닥에서 돌출되어 올라온 석순, 종유석과 석순이 만나 기둥을 이룬 석주, 그리고 꽃 모양의 석화(石花) 등이 둘러싸고 있어 매우 아름답다.

 

서대굴이 위치하고 있는 산계리 지역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동굴들이 모여 있는 동굴지대로서, 동굴들의 형태가 모두 같다. 강릉 서대굴은 동굴 안이 위험하여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에 의한 피해가 없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09:41  생계령을 지난다.

 

<생계령(生溪嶺, 640m)>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와 정선군 임계면 큰피원을 잇는 고개로, 옥계면 산계리 사람들이 정선 임계장을 보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다. 산계령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고개에는 도토리나무가 많았다고 하는데,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이 고개에서 도토리 열매를 채취했으며, 생계령은 거기서 나온 이름이라고도 한다.

생계령은 동쪽 산계리에서, 또는 산계리 쪽으로 넘나드는 고개라 하여 ‘산계령’이라 일컫던 것이 변음(變音)되어 생계령이 된 것으로 짐작된다. 또 다르게 쌍계령 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산계령이 경음화된 것으로 보인다.

 

생계령 이정표.

 

생계령의 카르스트 지형 안내판.

 

 

10:02  좌측 나뭇가지 사이로 자병산이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당겨본 자병산의 상처 난 모습.

 

자줏빛 병풍산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을 가진 자병산의 현재 모습.

이제와 아쉬워 한들 뭣에 쓰것어여, 어여어여 다 파 드시고, 아예 흔적을 없애 버리면 가슴 아플 일도 없으려니...!

 

 

10:07  가을빛 완연한 등로를 오르내리며,

 

 

10:11  짧은 산행에 느긋한 쉼도 자주자주 즐기고,

 

 

10:22  가을빛에 내 가슴도 함께 내맡겨 본다.

 

 

그렇게 가을빛에 젖어 돌리네지형의 등로를 걷는 사이에 송전탑을 지나게 되고,

 

 

감시초소가 있는 869봉을 지난다.

 

 

10:45  이제는 백봉령도 가까워지고,

 

보통 때 보다 조금 일찍 산행을 마치게 될듯하여,

 

 

10:53  낙엽 소리에 귀 기울이며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동료 백두들과 사람 사는 예기도 나누며,

 

 

자병산 파먹은 넘들 욕도 좀 하며,

 

 

애달파도 우리의 산인 것을...!

 

 

11:08  산행이 어렵지 않으니 모두가 편안한 모습이다.

 

 

11:18  산행이 짧아 운동하러 다니는 총무님 모습. (맞지요?)

 

 

가을빛이 완연한 편안한 백두대간 등로를,

산책 삼아 거니는 백두의 여장부들!

 

 

저그들 마음대로 대간길을 바꾸어 놓은 넘들이 걸어놓은 표지판을 따라,

 

백봉령을 향한다.

 

 

자병산의 현재 모습.

또 한세월이 지나면 저마저도 없어질 터!

 

<자병산(紫屛山, 872.5m)>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과 정선군 임계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수려한 경관의 '산계 8경'에 속하는 자병산이었으나 시멘트 재료인 석회석 채취로 형태마저 사라졌다.

자병산은 강원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백두대간 마루금을 경계로 자리 잡고 있고, 수병산, 괘병산, 석병산 등과 함께 아름다운 산군을 형성하였다.자병유화로 불리기도 하는 자병산(자줏빛 병풍을 펼쳐 놓은 듯 아름다운 산이란 뜻)은 기우제를 지내면서 생겨 난 말이며, 가뭄 때 자병산 산자락에 있는 닭목병대(닭목대)에서 닭의 목을 잘라 피를 뿌리며 기우제를 지내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는 일화에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기우제는 80년대 초 까지 이어지다가, 자병산이 헐리기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전해져 오던 풍습도 사라졌다고 한다.

 “紫屛油花 또는 紫屛血花(자병유화 또는 자병혈화)“란 닭의 피를 뿌릴 때 나타나는 모습이 ”혈화”처럼 보였기 때문에, 기우제를 지낼 때 혈화(닭의 피꽃)가 피면 비가 내린다는 설에서 나온 말이란다.

 

 

11:43  자병산의 흔적을 지우고 있는 트럭들 옆을 지나,

 

자병산 없애기에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이 아쉽다.

 

자병산 석회석 채취 현장을 뒤로하고 백봉령을 향한다.

 

 

원래의 대간길은 금줄을 처서 접근을 막아 놓고,

마음대로 임도를 만들어 대간꾼을 기만하고 있지만..,

 

아픈 가슴을 부여 안고 임도를 따를 밖에는!

 

길이 수월해서 쉽기는 하지만,

못내 가슴 한켠에 아쉬움이 자리하는 것은 나만의 짐작일까!

 

대간의 산 하나를 없애 놓고는, 뭣 헌다고 이런 것은 만들어 놓았을꼬!

 

 

대간 아닌 대간길을 쉽게 걸어와서 좋은 것인지, 아니면 가을 단풍에 취한 건지요?

 

 

11:51  드뎌 백봉령 고개가 내려다 보이고,

 

  

11:52  이내 백봉령 고갯마루에 도착한다.

 

 

아리랑은 지역마다 우리 민족의 정서를 담고 있으며,

남과 북을 합쳐 3,600여 수에 이른다.

그 가운데에서도

강원도의 정선 아리랑, 호남의 진도 아리랑, 경남의 밀양 아리랑이

3대 아리랑으로 손꼽힌다.

 

타관객리 외로이 난 사람 괄시를 마라

세파에 시달린 몸 만사에 뜻이 없어 홀연히 다떨치고

청려에 의지하여 지향하여 가노라니

풍광은 예와달라 만물이 소연한데,

 

해저무는 저녁노을 무심히 바라보며

옛일을 추억하고 시름없이 있노라니

눈앞에 왼갖것이 모두 시름뿐이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태산준령 험한고개

칡넝쿨 얽크러진 가시덤불 헤치고

시냇물 구비치는 골짜기 휘돌아서

불원천리 허덕지덕 허위단심

그대를 찾아 왔건만

보고도 본체만체 돈담무심

 

- 정선 아리랑 가사 중 일부-

 

 

정선군의 아리랑 자랑 표지석이 큼지막하다.

 

<정선 아리랑>

고려왕조가 망한 뒤 고려유신 72명은 '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하여, 세상 미련을 버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송도(개성) 두문동에 은거하여 살았다. 여기서 유래 된 것이 두문불출(杜門不出)이다. 이들이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응하지 않자, 이성계 일파는 '역적을 살려둘 수 없다'하여 두문동을 불바다로 만든다. 거기서 나온다면 살려준다고 했으나 한사람도 나오지 않고, 그곳에 있던 유신들은 모두다 불타 죽었다. 그때 비명소리 조차도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민족사에 이처럼 불행한 역사가 또 있었을까.. 한 나라의 인재가 모두 몰살 되는 순간이었다.

고려말 안향이 성리학을 처음 도입하는 과정에서도 처절하고 눈물겨웠다고 한다. 집 뒤에다 정자를 짓고 공자와 주자의 위폐를 모셔놓고 얼마나 정성을 드렸는지 몇년 후 걸출한 인물이 탄생하는데 바로 목은 이색이다. 그리고 목은 이색 문하에서 배운 뛰어난 인재들(정도전,정몽주,길재,등..)이 고려왕조 중책에 진출했고, 이들은 성리학을 배운 인재들이었다. 모두 불타 죽기 전에 두문동에서 나온 단 한 사람이 청백리로 유명한 황희 정승이다. 그 황희와 맹사성은 세종을 도와 조선을 반석 위에 올려놓게 되는데...

 

정선아리랑은 600여년 전인 조선초기 송도 두문동에 은신하던 고려의 유신 중 일부가, 정선(지금의 남면 거칠현동)으로 은거지를 옮겨와, 산나물을 뜯어먹고 살면서, 지난날에 모시던 임금님을 사모하고 충절을 맹세하며, 입지 시절의 회상과 가족과 고향의 그리움에 곁들여 고난을 겪어야 하는 심정을 한시로 읊은 것에, 지방에 구전되던 토착요에 음을 붙여 불렀던 것이 정선아리랑의 시원이라고 한다.

그때의 선비들은 이러한 비통한 심정을 한시로 지어 율창으로 부르던 것을 지방의 선비들이 듣고, 한시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게 풀이하여 감정을 살려 부른 것이 오늘에 전하여지고 있는 정선아리랑의 가락이다. 그 후 사화로 낙향한 선비들과 불우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애창하였고, 전란(戰亂)과 폭정 시에는 고달픈 민성을 푸념하며 내려오다가, '아리랑 아리랑'하는 음률을 부쳐 부르게 된 것은 조선조 후기라 한다.

한일합방 후부터 일제말엽까지는 나라 없는 민족의 서러움과 울분을 애절한 가락에 실어 스스로를 달래 왔었다. 일제를 거치는 동안 사상이 담긴 노래는 탄압됨에 따라 애정과 남녀관계의 정한을 소재로 한 새로운 노래가 많이 불리어졌으며, 예로부터 전하여지는 노래와 함께 오늘날 우리나라의 독특한 가락을 지닌 민요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채집된 정선아리랑 가사는 1,500여 수 정도라고 하며, 정선아리랑 창기능보유자 3명, 교육보조자 3명, 전수장학생 6명을 지정하여 전수활동에 노력하고 있단다.

 

 

11:55  백봉령에서, 12시 이전 산행 마감 기념 촬영을 하고,

 

<백복령(百福嶺 780m)>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정선군 임계면과 동해시 신흥동. 삼흥동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정선과 동해를 잇는 42번 국도가 지난다. 고개 정상에는 백두대간 표시석과 정선 아리랑 표석이 있고, 좌측 옥계 쪽에는 매점도 있다.

백복령 주변은 석회암지대로, 예로부터 한약재로 쓰이는 백복이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나무를 벌채하면 나무 뿌리에 수액이 응고되어 생성된 것을 복령(茯笭)이라 하며, 복령 가운데에서도 특히 백복(白茯, 흰 분말)이 많이 나는 데서 백복령이 유래하였다 한다.

또한 옛날 백복령은 삼척에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이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강릉에 48개, 삼척에 40개의 소금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서해에서 올라오는 남한강의 소금 길은 충북의 단양에서 다시 육지로 올라와 기껏 영월 쯤에 닿아 멈추었고, 정선 땅은 올곧게 강릉과 삼척에서 나는 동해의 소금에 의지하여 살았다. 백복령은 바로 그 삼척에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이었던 것이다.

 

백복령의 정확한 이름에 대하여는 분명하게 답하는 이가 없다는데,

『택리지』에는 백봉령(百福嶺)이라 했고, 『증보문헌비고』 「여지고」 편에는 백복령(百福嶺)과 백복령(百複嶺)을 혼용하면서 일명 희복현(希福峴)이라 한다고 덧붙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희복현이란 이름만 보이는 등, 명확하지가 않다.

 

 

고갯길 인근에 사는 마을 주민들은 백복령을 ‘뱃복이재’라고 부른다. 고갯마루에서 북쪽 산등성이에 올라가게 되면 둘레가 300~400m 쯤 되는 웅덩이가 있는데, 이 웅덩이가 여자들 배꼽에 뜸을 뜬 자리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뱃복이라 부른다는 마을 노인들의 말을 옮기고 있다. ‘뱃복’은 배꼽의 옛말이다. 카르스트지형에서 나타나는 돌리네의 움푹 파인 웅덩이가 신체의 배꼽처럼 보인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한자다. 한자로 쓰였던 지명은 앞에서 본것처럼 제법 복잡하지만, 현재에 널리 쓰이는 백복령(白伏領)은 일제때 지도제작에 의해 고의든 실수든 잘못 기록되면서 전해 온 것이다.

 

백두대간보전회에서는 백복령(白福領) 보다는 주민 정서에서도 좋고 리지에 근거가 있는 흰 봉황의 뜻인 백복령(白鳳領)으로 부르기를 홍보하고 있다.

 

 

12:47  강릉으로 이동하여 몸 단장을 새로이 고치고,

 

 

13:32  강릉의 명품식당 '농촌한정식'에서...

 

가을 산행의 뒷얘기를 풀어 본다.

 

이야기 꽃은 열매를 잉태하여 더 많은 예기들을 낳는 법!

 

 

두 시간여 동안의 짧은 산행 긴~ 뒤풀이를 마치고,

 

 

15:42  이제는 집으로 향할 밖에는...!

 

 

산행에 참가하지 못한 사람이 산행기를 쓰는 게,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듯 참으로 심들고 애럽다.

 

여그저그 두서없더라도 "소설이구먼!"

하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할 따름이고,

 

산행 참가하신 분들의 추억은

맹글어 놔야 하겠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