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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백두 8주년 가야산(충남) 1일차 : 가야산 산행

by 재희다 2012. 11. 10.

산 행 지 : 가야산, 덕숭산 수덕사. 충남 예산군.
산 행 일 : 2012. 11. 10.(토) ~ 11.(일) (1박2일)
숙      소 : 황토펜션(041-662-0129)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2구 178번지

행사참석 : 28백두(만석).

 

<행사일정>

11/10(토) 11:20 가야산 산행 (A팀 5시간, B팀 3시간 예상)

  - A팀(능선팀) : 마애삼존불~365봉~수정봉(451)~옥양봉(621)~석문봉(653)~상가리주차장

                            (11Km, 5시간)

  - B팀(계곡팀) : 용현자연휴양림~용현계곡~사잇고개~석문봉(653)~상가리주차장

                            (7km, 3시간)

11/11(일) 10:30 수덕사 탐방(산책)

 

<산행지도>

 

 

백두산우회 8주년 기념산행은 가야산이 갈라놓은 예산과 서산 언저리에 흩어져 있는 고귀한 유적들을 둘러보고 만추의 가야산 풍경을 만끽하는 코스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내포땅을 지목했는데, 내포땅이란 가야산 주변의 10여 개 고을을 말한다. 내포문화의 진수는 향후 금북정맥을 걸으며 그 진면목을 보기로 하고, 이번에는 가야산을 포함하는 덕산도립공원을 중심으로 짙은 가을의 향취를 느끼는 일정이다. 그 첫째 날인 오늘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적 답사기’에서 '백제의 미소'라 극찬한 서산 마애삼존불을 보고, 만추의 풍경을 거닐어 가야산 수정봉과 옥양봉, 석문봉을 올랐다가, 좌청룡우백호의 천하 명당으로 이름난 예산 상가리 흥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 묘를 둘러보며 산행을 마감하기로 한다.

 

백두대간의 속리산 천황봉에서 뻗어 나와 금강 이북 지방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금북정맥은 천방산~극정봉~청양 백월산에 이른 다음, 북서로 방향을 틀어 예산 수덕산~가야산~서산 팔봉산을 지나 약 240km에 달하는 여정을 태안 지령산에서 마무리 짓는다. 금북정맥의 산세가 U자 형으로 휘어감은 그 안쪽 지역이 내포지역이다. 가야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은 큰 바다요, 북쪽은 큰 만이고, 동쪽은 큰 평야, 남쪽은 그 지맥이 이어지는 바, 가야산 둘레 10개 고을을 총칭하여 내포’라고 했다. 조선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청도는 내포를 제일 좋은 곳으로 친다. 내포지방은 경기만과 함께 해양문화가 유입되는 초입지로 불교문화도 일찍이 유입된 곳이다. 그러기에 ‘불교의 성산’으로 지명된 우리나라 3곳의 가야산 중 내포 가야산이 가장 먼저 불교문화를 꽃피운 한국불교의 성지다. 기록에 따르면 가야산 자락엔 가야사, 개심사, 수덕사, 보원사 등 100여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이중 보원사와 가야사는 폐사되었고, 개심사와 수덕사는 남아있다.

 

서산 가야산(伽倻山, 678m)은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지만 서해 가까운 내포평야에 우뚝 솟아 상대적 높아 보인다. 가야산은 내포의 중심으로서도 위상이 대단한 곳이다. 신라 때 나라에서는 산 동쪽에 가야사를 짓고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시대까지도 덕산 현감이 이곳에서 봄·가을 제를 올리기도 했다.

가야산은 언제 찾아도 좋은 산이다. 봄이면 아기자기한 암봉 곳곳에 연분홍 진달래가 피어나고, 여름엔 녹음이, 가을이면 단풍과 억새풀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해 준다. 겨울엔 능선 곳곳의 설경이 아름답다. 무엇보다도 사시사철 암봉과 능선에서 빼어난 조망을 즐길 수 있다는 게 큰 매력이다. 그리고 산행 후 인근 덕산온천에서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가야산 최고봉인 가사봉(일명 가야봉) 정상 부근은 중계기지가 들어서 있어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대부분 석문봉(653m)을 중심으로 산행한다. 오늘 우리는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 마애삼존불'로 올라 수정봉, 옥양봉을 거쳐 석문봉에 올랐다가 흥선대원군 부친인 남연군 묘지가 있는 상가리로 하산키로 한다.

 

 

평소의 한밤중이 아닌 이른 아침에 출발한 버스를 타고,

산행 출발지인 서산마애삼존불 입구로 향한다.

 

 

서산마애삼존상 입구 도착.

 

 

애초에는 산행 소요시간에 따라 A, B팀으로 분리하여 진행하려 했으나, 짧은 코스를 희망하는 분이 거의 없어서 모두 함께 마애삼존불 입구에서 시작하는 A코스를 진행키로 한다.

 

 

산행 준비를 마치고 계곡에 놓인 나무다리로 들어서며 마애삼존불로 향한다.

 

 

 

 

마애삼존불상으로 오르는 돌계단 옆에는 공사용 자재 운반용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출발 1분여 만에 서산마애삼존불상에 도착한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 龍賢里 磨崖如來三尊像)>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의 층암절벽에 거대한 중앙의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주(寶珠)를 든 보살입상이,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협시하고 있는 특이한 삼존형식이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4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본존여래상 2.8m, 보살입상 1.7m. 반가상 1.66m이다.

본존 여래상은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의 입상으로 머리는 소발(素髮)이고 얼굴은 네모나며 눈을 크게 뜨고 밝게 미소 짓고 있다. 당당한 체구에 법의는 통견으로 입고 있는데 가슴이 깊게 벌어져 사선으로 표현된 내의와 띠 매듭이 보이고, 끝자락은 어깨 뒤로 넘겨져서 몸의 중심으로 U자형의 둥근 옷 주름이 늘어지고 있다. 양감이 있으면서도 부드럽게 늘어지고 있는 법의의 표현이 매우 자연스럽다. 두꺼운 법의(法衣)가 발등까지 덮여 있고, 발 밑에는 간략한 단판연화(單瓣蓮華)가 음각되었으며, 광배는 보주형 두광(寶珠形頭光)의 단판연화가 양각되어 있다. 우측의 보주를 들고 있는 보살입상은 머리에 일월식(日月飾)이 있는 높은 보관을 쓰고 있는데, 보관 양쪽에 화문이 있으며 높이 솟은 보관 윗부분의 중앙에는 돌기처럼 튀어나온 술장식이 있고, 양쪽으로 띠가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면상은 약간 긴 편이며, 상반신은 나형(裸形)에 하상(下裳)은 길게 늘어져 있다. 발 밑에는 이중의 단판복련(單瓣複蓮)이 양각되어 있고, 광배는 보주형 두광이다. 좌측의 반가사유상도 높은 보관을 쓰고 있으며 상체는 나상이며 허리 아래에만 군의를 입고 있는데, 두 팔은 손상되었다. 하상은 매우 얇고, 넓게 옆으로 퍼져 발등까지 덮었으며, 광배는 보주형 두광이다.
이 불상은 삼존형식(三尊形式)으로서는 이례적인 것으로서 중국의 남북조시대 말기인 제주양식(齊周樣式)을 엿볼 수 있다. 온유한 조각수법, 반가상의 배치 등 당대 신앙의 일면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석불의 가장 우미한 예이다. 인근에 있는

태안마애삼존불상(泰安磨崖三尊佛像)보다는 다소 늦은 조각 양식이 보이므로 7세기 초에 조성된 상으로 추정되며, 백제 조각의 대표적인 예이다. 중국 교역로의 중심지였던 태안반도와 백제의 수도인 부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중국과의 접촉이 빈번했던 지리적 요충지에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애삼존불상이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오랜 세월 동안 마애불이 크게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고 있는 것은

마애불을 가리고 있는 지붕바위가 있기 때문이란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6년이 지난 어느 날,

보원사터를 조사 나온 홍사준 선생에게 어느 나무꾼이 서산마애불을 설명한 말이..

"저 인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 새겨져 있는디유.

양 옆에 본마누라와 작은마누라도 있시유.

근데 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마누라가 장돌을 지고 집어든질 채비를 하고 있시유."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3권에서..)

 

백제의 미소를 감상하는 백두들.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서산마애삼존불상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가장 뛰어난 백제 후기의 작품으로 얼굴 가득히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있어 당시 백제인의 온화하면서도 낭만적인 기질을 엿볼 수 있으며,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각기 달라지며 빛과의 조화에 의하여 진가를 보이도록 한 백제인의 슬기가 놀랍다. 중앙에 본존인 석가여래입상, 좌측에 보살입상, 우측에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석가여래입상은 머리 뒤의 보주형 광배와 미간의 백호공, 초승달 같은 눈썹, 미소 짓는 그 입술은 매우 친근감을 주고 있으며, 또한 두 어깨에 걸친 옷자락은 양팔에 걸쳐 평행호선으로 길게 주름져 있어 입체감을 느끼게 하며 생동감을 주고 있다.

 

 

어떻게 차갑고 단단한 바위 속에서 이토록 풍만하고 따뜻한 미소를 찾아낼 수 있었을까! 역사의 뒤편에 가려진 천년의 미소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불과 60여 년 전인 1959년의 일이다. 가야산에 묻혀있던 서산마애삼존상의 발견은 세상을 놀라게 한 백제의 미소였다. 충남 서산에 있는 가야산은 백제시대부터 많은 사찰들이 있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가야산 자락을 적시며 흐르는 계곡 이곳 사람들은 이 골짜기를 ‘강댕이골’이라 부른다. 강뎅이골을 지나서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보면 벼랑을 이룬 바위에 새겨진 불상을 만날 수 있다. 커다란 바위 아래 면에 새겨진 세 개의 불상, 우리에게는 서산마애불로도 알려져 있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다. 바위에 새긴 불상을 마애불이라고 한다. 그러나 서산마애여래삼존상은 오랫동안 마을사람들 외에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었다. 백제인들은 석가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왼쪽에 어린아이의 미소를 띤 미륵반가사유상을 그리고 오른쪽에 양손으로 구슬을 감싸고 서 있는 보살입상을 조각해 놓았다. 금동계미명삼존불입상(삼국)/금동신묘명삼존불(고구려) 등 삼국시대 삼존불은 가운데 석가여래상을 두고 양옆에 보살상을 배치하는 게 보편적인 형식이다. 그러나 서산마애여래삼존상은 당시의 삼존불형식을 따르지 않았다. 백제 장인들의 창의성과 석공기술로 독창적인 삼존불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마애여래삼존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59년 부여박물관장을 지낸 홍사준 관장에 의해서다. 백제사 연구에 일생을 바쳤던 홍사준 관장은 당시 보원사터에서 많은 유물이 발견되고 있어 그곳에서 유물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홍사준 관장은 유물을 조사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다른 문화재에 대해서도 묻곤 했는데, 나무를 하던 마을사람이 바위벼랑에 웃고 있는 산신령이 조각되어 있다고 알려줬다. 그렇게 가야산 강댕이골 산속에 묻혀있던 마애여래삼존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발견 당시의 지형이 지금의 모습과 많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이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마애여래삼존상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웃고 있는 산신령 옆의 부인이 다리를 포개고 앉아 볼에 손을 대고 놀리자, 다른 쪽 부인이 약이 올라 손에 돌을 쥐고 서있다는 이 고장의 해학이 담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백제인들의 여유가 친근한 모습의 부처를 만들었다. 얼굴 하나하나에는 12가지의 미소를 품기도 했으며, 부드럽고 잔잔한 표정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마음이 생기게 한다.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은 왜 인간미 넘치는 풍만한 미소를 가졌을까?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중반에 걸쳐 백제는 국력이 강대했고, 따라서 불교문화도 함께 번성하였다. 당시 백제사회에서 불교는 이방인의 종교가 아닌 백제인의 풍요로운 모습이 담긴 백제의 종교였다. 백제인들은 자신들의 독창적인 불교문화를 창조하고자 했다. 더불어 좀 더 대중적이고 친근한 종교로 자리잡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이러한 백제불교를 잘 반영한 것이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이다. 누구나 쉽게 다가가서 의지하고 친숙해질 수 있는 모습의 부처! 사실적이면서 인간적인 모습의 불상은 삶과 가까이 존재하는 종교를 의미한다. 자연과 어울려 자리잡아 오가는 이들의 발길이 잠시 멈추어 섰던 곳.. 그곳에, 오랜 세월 변함없는 백제의 미소가 있다.(펌)

 

마애삼존불을 배경으로!

 

 

마애여래삼존상 탐방을 마치고,

 

 

산행보다 산책이 좋다는 분들을 설득하여 함께 모시고,

 

 

석문봉을 향한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돌아본 마애여래삼존상이 있는 암봉 모습.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입구에는 아직도 우리의 애마가 그대로 서 있다.

 

 

옥양봉과 석문봉으로 이어지는 가야산 주능선 도착.

 

가야 할 수정봉 방향.

 

 

 

수정봉을 향해 본격적인 가야산 능선산행에 나서는 백두들.

 

 

 

 

 

 

좌측 서산시 운산면 원평리에 있는 서해안청소년수련원 방향 갈림길을 지나고,

 

 

 

 

다소 가파른 능선길을 올라서니,

 

 

우측 서산 보원사지 인근의 고산사 방향 갈림길이 나오며 수정봉 방향 능선이 다소 완만해진다.

 

 

 

가야 할 석문봉 방향.

 

 

다시 묵묘가 있는 수정봉 직전의 봉우리로 올라서고,

 

가야 할 옥양봉과 석문봉 방향.

 

 

사거리갈림길 안부를 지나서 완만한 오름길을 잠시 오르면,

 

 

감시카메라탑과 평상이 있는 수정봉(453m) 정상에 도착하여, 여유로운 쉼을 한다.

 

 

 

 

 

 

따스한 가을날의 햇살을 쬐며, 다시금 석문봉을 향한 능선길에 나선다.

 

가야 할 옥양봉과 석문봉(우측) 방향.

 

옥양봉과 석문봉 방향 조망.

 

상가리 앞쪽의 서원산이 뾰족해 보인다.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상쾌함을 더하고,

 

 

가을빛이 짙어가는 완만한 능선길을 흐르는 듯 따른다.

 

 

 

삼각점이 있는 완만한 364봉을 올라서며,

 

돌아본 수정봉 방향.

 

 

364봉 헬기장을 지나는데,

 

우측으로 일락산 방향의 능선과 용현계곡 골짜기가 내려다 보인다.

 

 

 

다시 옥양봉을 향해 퉁퉁고개로 내려서는데,

 

 

앞쪽으로 퉁퉁고개의 정자가 내려다 보이고,

 

 

이내 임도가 지나는 퉁퉁고개 도착한다.

 

 

 

이름도 생소한 퉁퉁고개는 그 이름만큼이나 유래도 알 길이 없다.

 

퉁퉁고개 전경으로 정면의 임도길이 옥양봉으로 이어지는 등로다.

 

퉁퉁고개 쉼터 정자에서 맛난 저녁을 위해 이른 점심식사를 하기로 한다.

 

 

돌아본 수정봉 방향.

 

 

 

 

 

 

 

 

이른 점심식사를 끝내고 옥양봉을 향한다.

 

 

 

옥양봉으로 오르는 임도길은 이내 통나무 계단이 있는 급경사 오름길로 바뀌더니,

 

 

 

이내 바위가 있는 완만한 능선 숲길이 이어진다.

 

 

 

 

 

우측 백암사지 방향 갈림길이 나오고,

 

우측 서북쪽 방향으로 서산평야가 시야에 들어온다.

 

돌아본 마애여래삼존불이 있는 강댕이골 방향 조망.

 

이 지방이 고향인 회장님으로부터 내포문화권에 대한 설명을 듣는 백두들.

 

내포(內浦)는 가야산 일대의 10개 고을을 말한다고..

 

 

다시 능선길을 따라 헬기장을 지나면,

 

 

 

좌측 상가리 방향 조망이 멋진 조망터가 나온다.

 

가야 할 옥양봉 좌측으로 통신탑이 자리한 가야산 정상인 가사봉(가야봉)도 가늠되고,

 

남동쪽 방향으로 흥선대원군 부친 남연군의 묘가 자리한 상가리도 시원스레 내려다보이며,

 

동쪽으로는 상가리 명당의 좌청룡 줄기인 서원산 줄기도 한눈에 가늠된다.

 

 

 

 

 

덕산 방향 갈림길을 지나고,

 

 

완만한 능선을 잠시 따르면,

 

 

옥양봉 정상에 도착한다.

 

산봉우리에 있는 바위가 옥(玉)과 같이 맑고 바위에서 흐르는 물이 옥양목(옷감 이름)과 같다 하여 옥양봉이라 한다는데, 옥과 같은 바위가 어디에 있는지 찾을 길이 없다.

 

옥양봉에서 잠시 쉼을 하며 대추를 나눈다.

 

 

옥양봉에서 석문봉까지는 아직도 1.57km를 더 가야 한다는 등산안내도가 있다.

 

옥양봉 옆에 전망이 트인 전망바위가 있는데, 혹시 이 바위가 '옥과 같은 바위' 일까!

 

서북쪽 서원산 방향으로 뻗은 지능선 조망.

 

남쪽 흥선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가 자리한 상가리 방향 조망.

 

이 고장 출신인 회장님의 설명을 들으니,

옥양봉에서 내려다보이는 산 아래 상가리 남연군묘 터가 명당이라는 느낌이 한층 더한다.

조선 말기 안동김씨의 세도에 눌려 위태로웠던 흥선군 이하응은 복수의 일념으로 주정뱅이 행세를 하며 발복(發福)을 위해 부친의 묘를 명당에 이장하려 풍수를 배우며 방방곡곡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유명한 지관을 만나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를 알게 되는데, 바로 저곳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옛 가야사(伽倻寺) 터였다. 당시 가야사는 수덕사보다 컸다고 하는데, 우여곡절 끝에 절은 불태워지고 부친의 묘를 이장하고 난 후에 아들을 더 낳았는데 훗날 고종이다. 아들이 왕위에 올랐으니 은덕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1871년 인근에 보덕사(報德寺)를 짓게 했다고 한다.

 

뾰족한 통신탑이 있는 봉우리가 가야산 정상인 가야봉(가사봉)이다.

 

옥양봉 옆 능선에는 벤치도 설치되어 있어서 조망을 즐기며 쉬어가기 좋아 보인다.

 

회장님의 설명을 경청하는 백두들.

 

 

 

가야산 옥양봉 정상 기념.

 

 

 

옥양봉을 뒤로하고 석문봉을 향한다.

 

 

옥양봉 내림길에는 데크목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서 멋진 조망을 즐기며 내려선다.

 

 

 

 

석문봉을 지나 정상으로 이어진 가야산 능선 조망.

 

좌측으로 보이는 서원산 모습.

 

우측 석문봉에서 일락산으로 이어지는 금북정맥 너머로 보이는 서산 방향.

우중앙에 희미하게 보이는 산봉우리가 우람한? 도비산(352m) 쯤이다.

 

 

옥양봉을 내려선 지 금방인데, 또 등산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옥양봉의 등산안내도와 별반 다르지도 않아 보이는데..ㅉㅉ

 

 

능선 가운데에 자리한 바위를 비켜 지나니,

 

 

상가리 방향 갈림길을 지나게 되는데, 또 등산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옥양봉에서 300m 거리에 등산안내도가 3개나 있다.

 

 

 

어렵잖은 능선길을 편안히 따르고,

 

 

 

별반 필요치 않아 보이는 가드 로프가 메어져 있는 오름길을 오르면,

 

 

 

돌무더기가 있는 전망봉에 도착한다.

 

돌아본 옥양봉 방향.

 

가야 할 석문봉 방향.

 

좌측 상가리 방향.

 

서북쪽 일락산과 서산읍 방향.

 

가야할 석문봉 좌측으로 가야산 정상 가사봉과 원효봉이 뾰족하게 보인다.

 

 

잠시 더 완만한 능선을 따르니,

 

상가리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갈림길을 또 지나게 되고,

 

이곳에도 어김없이 등산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테이블과 벤치가 있는 널찍한 쉼터를 지나면,

 

일락산 방향 능선 갈림길이 있는 석문봉에 도착한다.

 

 

정상석과 커다란 돌탑, 그리고 국기봉이 있는 석문봉 정상 전경.

 

<석문봉(石門峰, 653m)>
가야산(678m)을 중심으로 한 덕산도립공원에 속한 봉우리로, 정상의 바위가 마치 커다란 문을 열어 놓은 듯한 모양이라서 석문봉이라 한다. 가야산의 주봉인 가사봉(가야봉)으로부터 북쪽으로 1.7km 떨어져 있고 일락산(日落山, 521m)과 이웃하여 있다. 석문봉을 정점으로 옥양봉과 일락산 사이로 길게 형성된 용현계곡에는 삼림욕장이 조성되어 있다. 석문봉 기슭에서 발원한 역내(驛川)는 석문봉에서 발원하여 서산시를 지나 당진시의 고대면·정미면 부근에서 퇴적평야를 이룬다.
전망이 매우 좋아 정상에서는 남쪽으로 가야봉과 옥양봉, 북서쪽으로 일락산이 내려다보이고, 서쪽 해미 쪽으로는 서해바다가 펼쳐진다. 산행은 보통 가야산 일대와 일락산을 연결하여 오르는데, 덕산온천에서 출발하여 해미읍성·일락사·개심사를 거쳐 서산목장, 서산마애삼존불상, 보원사를 둘러본 뒤 덕산온천으로 돌아오는 코스가 있으며, 산행 시간은 2시간 30분~3시간 정도 걸린다.

 

석문봉 정상에서 박무 낀 조망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금치 못하는 백두들.

 

 

석문봉 정상 한켠에 자리한 돌탑.

 

남서쪽 해미면 방향.

 

가야산 정상인 가사봉 방향 능선 조망.

 

 

 

 

 

가야산 석문봉 정상 기념.

 

 

해미면 한서대학교 방향.

 

서쪽 도비산(352m) 방향.

 

살짝 당겨본 해미읍성 모습.

 

 

석문봉을 뒤로하고 남연군의 묘가 있는 상가리 방향으로로 하산길에 나선다.

 

 

 

 

 

밧줄을 잡고 암릉을 내려서니,

 

 

석문봉이 저만치로 물라나 있다.

 

 

앞쪽으로 가야산의 정상인 가사봉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고,

 

좌측으로 하산 지점인 상가리도 뚜렷하다.

 

 

이곳이 등산로가 아니면 어디로 가란 말인지!

 

살짝 당겨본 상가리 조망.

 

박무가 옅어지면서 가야산의 우람한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 보인다.

 

 

이어지는 암릉을 밧줄에 의지해 조심스레 내려서면,

 

 

 

좌측으로 상가리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가야산 능선을 두고 좌측 상가리로 하산키로 한다.

 

 

가야봉 방향 능선을 잠시 더 따르니 멋진 조망쉼터가 나오고,

 

앞쪽으로 암릉도 보이기에 발길을 돌려 갈림길로 돌아가 하산키로 한다.

 

저기 보이는 가야봉(가사봉)은 후일을 기약한다.

 

 

 

일행들이 하산길에 올랐던 갈림길로 돌아나와,

 

급경사의 비탈길로 들어서며 본격적인 하산길에 접어든다.

 

 

 

 

가을빛도 사그라드는 산골짝을 내려서는데,

 

추색을 감상하기 좋은 벤치도 보인다.

 

 

낙엽이 쌓여가는 가을길이 이어지고,

 

백두들은 그런 가을 속으로 걸음을 옮긴다.

 

 

 

 

가야산의 가을이 화사하게 느껴진다.

 

 

 

가야봉 갈림길을 지나고,

 

백두의 가을 나그네는 가야산을 거닌다.

 

 

 

 

 

잠시잠깐 가을 정취에 취하는 사이에,

 

가야산 하산길을 끝이 나며 상가리 들판이 나타난다.

 

 

 

 

 

상가저수지 옆을 지나는데, 추색의 단풍나무에 선혈이 낭자하다.

 

 

 

가을빛이 내려앉은 들판과 산기슭을 휘돌아 상가리 주차장으로 진행한다.

 

 

 

 

길 옆의 버섯모양 지붕을 가진 천광암이라는 암자가 눈길을 끌고,

 

가을 석양빛이 쏟아지는 상가저수지가 평화로워 보인다.

 

 

따르던 상가리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두고 남연군묘 탐방을 위해 좌측 언덕으로 올라서고,

 

 

 

영글어 가는 밤송이를 달고 있는 밤나무밭을 지나,

 

조릿대 숲을 지나면,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의 묘가 있다.

 

<남연군의 묘(南延君─墓)>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李球)의 무덤으로 규모는 약 5,590㎡이다. 풍수지리설을 믿은 대원군 이하응이 한 풍수가에게 명당을 찾아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풍수가는 이 자리를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로 지목하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원래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고 무덤자리에는 탑이 서 있었는데, 1844년(헌종 10) 대원군은 명당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옛 가야사를 불지르고 탑을 부순 후, 경기도 연천에 있던 부친의 묘를 이장하였다. 7년 후 대원군은 차남 재황(載晃)을 얻었는데, 이가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다.

그리고 인근 골짜기에 절을 지어 보덕사(報德寺)라 이름 짓고 개운사 주지인 도문(道文)을 초대 주지로 삼은 후에 남연군묘 수호일품대승(守護一品大僧)이라는 직책을 내려 묘를 돌보게 하였다.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Oppert)가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한 뒤, 대원군과 통상문제를 흥정하기 위하여 1868년 미국, 프랑스인 등 백여 명을 동원, 행담도(현 서해안고속도 휴게소)에 모선을 정박시키고 밤을 틈타 남연군묘 도굴을 시도했다. 이른바 천하명당을 파헤쳐 기세 등등한 대원군을 꺾고, 유골을 조선 개방과 맞바꾸고자 기습하지만 무덤은 석회석으로 다져 놓아 실패한다. 이에 몹시 화가 난 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고 산 아래 해미읍성 등지에서 도굴에 간여했다는 이유로 천주교도를 학살하는 무진박해(戊辰迫害)를 자행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 대외적으로는 서양인의 위신이 크게 떨어졌고, 크게 노한 대원군은 쇠국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 탄압을 가중시켰다.

 

 

남연군의 묘 전경.

 

조선시대의 명지관인 정만인이 점지한 남원군묘는 기념물 제80호로 볼록 솟은 작은 언덕에 가야산 줄기가 한아름 병풍처럼 둘러쳐져 감싸고 있다. 언덕에 올라서면 흡사 왕좌에 앉은 듯 착각할 정도다. 남연군묘는 흥성대원군 이하응이 풍수지리설을 믿고 정만인이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라고 점지해준 자리에 아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한 곳이다. 그러나 지관이 점지해준 묏자리에는 가야사란 절과 무덤 자리에는 탑이 있었다. 이곳이 二代天子之地(2대의 왕이 나오는 곳)의 명당이라는 풍수설을 믿고 이 절을 불태우고 금탑을 깨부수고는, 경기도 연천군 남송정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옮겼다. 이장 후 예언대로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로 고종이 왕위에 오르고, 순종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아들인 고종이 즉위하자 부처님께 고마움을 표시하는 뜻으로 (가야사와 금탑을 폐한 것이 마음에 걸려 그랬다는 설도 있다) 한양에서 목수를 보내여 절을 새로 짓고 보덕사라 했다고 한다.

남연군 묘 앞 길 건너에는 돌아서있는 미륵불이 있다. 대원군이 가야사를 불사르고 금탑을 깨부순 데 대해 괘씸하다며 항의조로 돌아서버렸다는 설과, 풍수지리상으로 기운을 조화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일반적으로 미륵불로 불리나 학명으론 관세음보살이다.

 

 

 

 

 

묘 좌측으로는 좌청룡에 해당한다는 서원산 줄기가 포근하게 둘러져 있고,

 

 

우전방으로는 물길이 덕산천을 이루며 흘러나가고 있다.

 

 

남연군 묘에서 우측 아래로 '남은들 상여' 보호각이 보인다.

 

 

천하명당 남연군의 묘 앞에서.

 

 

묘지가 자리한 언덕 옆에 있는 상여 보호각 앞에는 '남은들 상여' 안내판이 있다.

 

<남은들 상여>

남은들 상여는 1847년 흥선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묘 이장 시 사용되었던 조선 궁중식 상여로, 묘를 옮긴 후 광천리 마을에 주었다고 전해오는 상여다. 조선 황실에서 제작한 상여로 조각, 매듭 등 의례풍습 연구에 귀중하고 유일한 민속문화재다. ‘남은들’이란 명칭은 지금의 덕산면 광천리로 당시 남연군의 묘를 이장한 후 상여를 남은들 마을에 보관한 데서 유래했다. 지난 2005년 도난됐다가 이듬해 범인이 잡혀 극적으로 회수되기도 했던 남은들 상여는 이후 훼손 방지 및 보존을 위해 2006년 3월 서울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현재 보호각에 보관 중인 상여는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자 예산군에서 제작한 재현품이다.

 

보호각 내의 '남은들 상여' 모습.

 

 

남연군 묘 앞에는 대원군이 불태웠다는 가야사지가 있다.

 

 

 

남연군 묘를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향한다.

 

 

 

 

 

가야산 산행과 남연군묘 탐방을 마치고,

 

 

 

 

 

기다리던 애매에 올라,

 

 

 

예산의 덕산온천지구에 있는 가야관광호텔로 이동하여 피로를 씻고,

 

 

서산시 운산면 용현계곡에 있는 황토민박펜션에 도착하여,

 

 

 

 

 

성대한 백두산우회 8주년 생일파티를 준비하여,

 

 

 

 

백두산우회 탄생 8주년 자축 파티를 시작한다.

 

 

 

 

1부 순서 마감 및 정리!

 

 

 

 

 

2부 순서인 야외 소맥 파티.

 

 

야외 파티 도중에 밀려드는 추위도 피하고 노래방을 찾던 중,

최적의 대안으로 우리의 애마를 선택하고 버스로 이동!

 

 

3부 순서인 음주가무 파티를 즐긴다.

 

3부 사회를 맡은 손점장의 개회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백두의 음주가무 파티가 진행된다.

 

 

 

 

 

 

 

 

 

 

 

 

 

 

 

뭔 일이래유~~!

 

 

 

 

 

 

4부 뒤풀이 소주파티는 3부 순서로 달궈진 몸을 식히며 야외에서..

 

 

 

5부 순서는

다시 숙소에서 차분히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설계하는 시간을 갖는다!

 

 

 

 

 

 

 

 

참으로 그리운 얼굴들과 함께 보낸 행복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