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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간남진 12차(백봉령~두타산) : 무릉도원에 단풍놀이 간 신선(神仙)들

by 재희다 2012. 10. 28.

 

산 행 지 : 백두대간 12차(백봉령~두타산)

산 행 일 : 2012. 10. 27.(토)

산행코스 : 백봉령~원방재~상월산(970m)~이기령~갈미봉~사원터갈림길~고적대(1,354m)~연칠성령

            ~청옥산(1,404m) + 학등능선~무릉계곡 주차장 (거리 18km + 6.7km)

산행참가 : 20명.

 

<산행코스>

 

일반적으로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싼꾼들은 두타산.청옥산 구간을 댓재에서 백봉령까지를 한번에 종주한다. 물론 10여년 전 북진 때는 한겨울 맹추위를 무릅쓰고 댓재에서 백봉령까지를 단번에 걸었었다. 산행을 계획하면서 이번 구간을 2회로 나누는데 무척 망설였다. 왜냐하면 학등능선으로 하산을 하는 것은 투타산을 오롯이 올라 댓재까지 가는 것과, 시간과 노력에서 별반 차이가 나지 않을 듯해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봉령에서 출발하여 청옥산까지만 가고, 학등능선을 따라 무릉계곡으로 하산하려는 것은, 무릉도원의 가을을 마음껏 감상해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가을은 이미 무르익어 7부 능선 위쪽은 이미 고왔던 단풍을 떨구어 버렸고, 산행 중간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경치를 감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좋았던 것은,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국내 최고라는 무릉계곡의 가을 단풍 끝자락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백봉령 고갯마루 주차장에서 산행 준비를 마치고,

 

<백복령(百複嶺, 780m)>
백복령은 강릉, 동해, 정선 3개 시군에 걸쳐 있는 석회암지대 고갯마루로, 정선과 동해를 잇는 42번 국도가 지난다. 옛날에는 삼척에서 정선 임계로 소금이 넘어오는 소중한 길목이었다고 한다. 예로 부터 한약재로 쓰이는 백복이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소나무를 벌채하면 나무 뿌리에 수액이 응고되어 생성된 것을 복령(茯笭)이라 하는데, 복령 가운데 특히 백복(白茯, 흰 분말)이 많이 나는 것을 이름한다고 한다.

 

아리랑의 고장 정선에서 세워 놓은 환영 표석을 지난다.

아리와 쓰리는 누가 낳았을까요?

정답: 아라리

 

 

길 건너편 들머리로 들어서며 대간남진 산행을 시작한다.

 

 

지도상 헬기장이 있는 832봉이다.

밴치에 올라 동쪽을 보면 전망이 확 트이는 곳인데, 아직은 어둠이 지배하는 시간이라 위치만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첫번째 이정표가 반갑다.

 

 

922봉쯤에 있는 이정표를 지난다.

지도나 백복령의 이정표에는 '백복령'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산행 중 만나는 이정표에는 '백봉령'으로 표시되어 있다.

 

 

들머리로부터 한 시간쯤에 위치한 987봉 정상에서 잠시 쉼을 한다.

 

다들 뭣을 하는지.. 고개를 떨구고 있다.

뭔 일 이레유 ~~!

 

 

987봉 바로 아래에 있는 이정표를 지난다.

 

987봉 바로 아래에 있는 전망바위에서 바라본 동해시 방향 야경.

 

 

1.022봉 헬기장에 도착한다.

 

1,002봉 이정표.

백복령에서 5km이니 정상적인 속도로 온 듯한데,

 

지속적인 오르막에 몇 개의 봉우리를 거치느라 조금은 힘들어하는 표정들이다.

 

 

 

원방재에 도착한다.

 

<원방재((遠方峙, 740m)>

원방재는 강원도 동해시 달방동 관촌마을과 강원도 정선군 가목리를 넘나 들던 고개로, 옛날 삼척 사람들이 정선에 소금을 팔러 가면서 넘었던 고개란다. 원방(遠方)이란글자 그대로 '먼 지방' 또는 '먼 곳'을 의미하며, 먼 거리 고개를 힘들게 넘나들던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고개란 뜻이다. 정선군 가목리에는 정선 땅 아우라지로 흘러가는 부수베리(부싯돌을 생산하던 곳)계곡과 삼척 방향으로는 오십천으로 흘러드는 서학골 계곡이 흐른다. 부수베리라는 지명은 ‘부수’는 부싯돌, ‘베리’는 벼랑이란 뜻이라고 한다. 이 고개는 힘에 부칠 때 산객들이 탈출로로 많이 이용되는 곳으로, 우측으로 잠시 내려서면 가목리 부수베리로 이어지는 임도가 있다.

 

후미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여유로운 쉼을 한다.

 

조금 지나서 도착한 분들도 충분한? 쉼을 하고는 상월산을 향한 급경사 오름길에 들어선다.

 

 

 

일출이 시작되려는지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좌측으로 상월산의 지능선 암릉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지나온 대간 능선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바위에 도착한다.

'상월산'이란 표식이 걸려있는 전망 봉우리다.

 

서쪽 정선군 임계면 방향.

 

살짝 당겨본 임계면 방향 조망.

 

돌아본 대간능선과 1,022봉 방향.

 

오늘 걸어온 대간길도 더듬어 본다.

 

대간의 이모저모를 담기 위해 열심인 김 작가님.

 

동해바다 위에 떠 있는 구름이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다.

 

원방재와 임계면 방향 조망.

 

 

상월산(上月山 970.3m) 인증.

 

부산 낙동산악회에서 '상원산' 아크릴판을 걸어 놓았다.

지도에는 이곳과 조금 더 가면 나오는 헬기장봉 모두를 상월산으로 표시하고 있다.

 

 

상월산 전망봉 내림길은 급하게 고도를 낮춘다.

 

 

가야 할 970봉 상월산 북동쪽 지능선의 단애 모습.

 

상월산 복동쪽 사면의 지능선 암봉 모습.

 

상월산(970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에는 벤치도 설치해 놓았다.

 

 

970봉 상월산 정상부에서 내려다본 동해 방향 조망.

 

 

970봉 상월산 정상(헬기장)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상월산(上月山, 970.3m)>

강원도 동해시 달방동과 정선군 임계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동해시와 정선군의 그 어느 자료에서도 상월산에 관한 자료는 찾을 길이 없다. 다만 국어사전에서 '상월(上月)은 지난달의 옛말이다'라고 되어있다. 상월산은 ‘높은(上) 산’이라는 뜻으로 달(月)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월(月)은 우리말의 ‘달’인데, 옛적에 이 말은 ‘달(達)’로 표기하면서 의미는 ‘산’이었다. 따라서 ‘월산(月山)’은 ‘산’의 겹쳐진 표현이며, 상월산은 ‘상산(上山)’ 즉 주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거나 ‘가장 빼어난 봉우리’인 것이다.

상월산 북쪽 사면은 설악산의 공룡능선만큼이나 경사가 급하여 마치 병풍을 둘러놓은 것 같다. 정상은 헬기장으로도 쓰인다. 정상에 서면 남북으로 용처럼 꿈틀거리는 대간 줄기의 군봉들이 행진을 하듯 도열하고, 집 한 채 보이지 않는 내륙의 하늘 아래에는 산봉우리들이 다도해의 섬 모양으로 떠 있는 광경이 펼쳐진다.

 

정상에는 헬기장이 있고 삼각점이 있다. 이곳과 좀 전에 지나온 전망봉 상월산 모두에 '상월산'이란 이정표가 있고, 지도상에도 두 곳 모두 상월산으로 표시하고 있다. 책임 있는 당국의 고증과 정리가 필요해 보이는 부분이다.

 

 

상월산 정상에서 인증을 남기고 이기령을 향한다.

 

 

전나무가 조림된 숲을 지나 내려서면,

 

 

이기령에 도착한다.

 

<이기령(耳基嶺 810m)>

동해시 관로동과 정선군 임계면 부수베리를 잇는 고개로, 

이곳이 이기령이 된 이유는 대강 이렇다. "銅基(동기)"의 순수한 우리말인 '구리터'가 있던 마을의 이름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구리터의 중간 자음인 'ㄹ'이 탈락되어 "구이터"가 되고, "구이"가 "귀"로 축약되어 "귀 이<耳>"로 변음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재'를 의미하는 '령'으로 넘어가니 이기령<耳基嶺>이 되었다.

이 고개는 강원도 삼척의 해산물과 강원도 정선의 특산물을 물물교환을 하기 위한 우마차가 넘나 들던 고개로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기령은 백복령과 더불어 옛 북평읍에서 정선으로 통하게 되는 주요 관문 구실을

하였으나, 백복령이 지방도로로 확장 개통되면서이기령은 고개로서의 기능이 상실되고, 이제는 점점 잊혀 가는 옛길로 밀려나, 백두대간 산꾼들만 걷는 고개가 되어 버렸다.

 

 

이기령 이정표를 뒤로하고 고적대를 향한다.

 

 

고적대로 향하는 완만한 오름길에 나무밴치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조금 전 우측에 있던 이기령 임도를 이곳에서 잠깐 다시 만났다가 헤어진다.

 

 

나무벤치 쉼터의 이정표.

 

 

고적대로 향하는 길바닥에는 박석을 깔아 놓았는데, 

경사가 완만하고 진흙이어서 비가 오면 진흙탕으로 변하는 곳인가 보다.

 

 

우측 자작나무 군락지의 노랗게 단풍 든 모습이 이채롭다.

 

 

갈미봉 오름길에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잦아져 배낭 커버를 씌우고 우장을 갖춘다.

 

우장을 준비하는 백두들이 하나. 둘 늘어난다.

 

 

1143봉에서 정상을 좌측에 두고, 우측으로 우회하는 너덜길을 따른다. 

 

 

갈미봉이 보이는 전망바위에서 구름에 덮여가는 갈미봉을 아쉽게 바라보며,

 

구름이 짙어지기 전에 갈미봉으로 서둘러 진행한다.

 

 

갈미봉 정상에 도착한다.

 

<갈미봉(葛味峰, 1,260m)>

동해시 삼화동과 정선군 임계면의 경계인 백두대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갈(葛)'은 나누다(分)를 '미(味)'는 산(山)을 뜻하니 두 개의 봉우리를 말한다. '갈미봉'이란 순수한 우리말로서 봉우리가 두 개로 갈라져 있는 산이라고 하는데, 높은 봉우리에 갈미봉이라 붙였고, 괘병산(수병산)과 함께 두 개의 봉우리를 이룬다고 한다. 한자로 칡'갈(葛)'자를 써서 칡이 많은 산인 줄 알았는데, 이곳에 칡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하다.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생기는 문제점이 너무나 많았다. 이제는 이런 문제들을 정리할 여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비 내리는 갈미봉 정상에서 서둘러 인증을 남기고,

 

후미 분들은 연칠성령에서 무릉계곡 방향으로 탈출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앞서 간 분들이 혹시 도중에 후미를 기다리는 혼란스런 상황을 정리하고자, 앞서 간 선두그룹을 따라잡기 위해 서둘러 혼자서 갈미봉을 뒤로한다.

 

갈미봉 정상의 이정표에도 괘병산 방향 갈림길 표시가 있다.

 

 

고적대로 향하는 등로에는 별무 소용이 없어 보이는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가야 할 고적대가 가늠되고,

 

 

고적대 삼거리를 지난다.

 

이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물바아골을 지나 용추폭포로 연결되며, 무릉계곡의 유명한 천년고찰 삼화사가 나온다. 청옥산과 두타산 사이에 있는 무릉계곡은 정말 멋진 곳이라고 하기에 오늘 직접 내려가 보려 한다. 물론 이곳에서가 아니고 학등능선으로!

 

 

고적대 직전 안부 전망대에서 돌아본 무릉계곡 방향의 지능선 암괴.

 

전망대에서 바라본 청옥산 방향.

 

이곳은 옛날 대간길을 북진할 때, 온몸이 얼고 마음까지 얼어붙은 이른 아침에 포천 사나이들이 이곳에서 따뜻한 라면을 끓여서 몸과 마음을 녹여 주었던 추억의 장소다.

 

 

고적대 오름길에 돌아본 갈미봉 방향.

 

지나온 갈미봉 방향 파노라마.

 

 

고적대 정상에 도착한다.

몇 해 전 어둠 속에서, 중봉리에서 중봉계곡을 따라 올라 고적대와 중봉 사이의 능선에서 헤매다가, 이곳 고적대를 발견하고서 '천신만고의 끝'이 어디인지를 알게 되었던 곳이 바로 여기다.

 

<고적대(高積臺, 1,253.3m)>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삼척시 하장면, 동해시 삼화동의 분수령을 이루는 산이다.

기암절벽이 대(臺)를 이루어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수행하였다고 전해지는 고적대는, 동쪽으로 이어진 청옥산, 두타산과 아울러 해동삼봉(海東三峰)이라 일컬어지며, 신선이 내려와 산다는 무릉계곡의 시발점이 되는 명산이다.

높고 험준하여 넘나드는 사람들의 수많은 애환이 서린 곳으로, 동쪽으로 흐르는 수계(水系)는 전천(箭川)으로, 북쪽으로 흐르는 수계는 임계천(臨溪川)으로, 남서쪽으로 흐르는 수계는 골지천(骨只川)으로 각각 흐르는데, 동쪽 비탈면은 급경사를 이루나 국민관광지 제1호로 지정된 무릉계곡으로 이어져 경관이 수려하고, 서쪽 비탈면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다.

 

고적대 이정표.

 

고적대 안내판.

 

마침 고적대에 홀로 온 산객에게 부탁하여 인증을 남긴다.

 

 

서쪽 중봉산 방향.

 

서남쪽 중봉 계곡과 망치봉 방향.

 

사진 찾아가세요!

 

가야 할 청옥산 정상은 구름에 가려 있다.

 

 

청옥산으로 이어진 대간 능선을 가늠해 본다.

저기 어디쯤에 망군대와 연칠성령이 있을 터! 

 

동쪽 무릉계곡 방향 조망.

 

<망군대(望君臺)>

오래된 선답자들의 산행기에는 연칠성령 가기 전에 작은 돌탑이 하나 있어, 조선 인조 때 명재상이었던 택당(澤堂) 식(李植)이 은퇴하여 중봉산(中峰山) 단교암(斷橋庵)에 기거할 때, 이곳에 올라 임금을 생각하며 마음을 달랬다고 해서 망군대(望君臺)라고 불렀다는 작은 돌탑이 하나 있는 망군대가 있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난출령이라 불리기도 하는 연칠성령 정상을 망경대라 한다는 설도 있다. 마무튼구름 속을 급하게 진행하다 보니, 확인할 기회를 놓친 듯하다.

 

 

고적대 내림길에 돌아본 갈미봉 방향.

 

 

선두그룹의 후미를 따라잡았다.

일단 고적대를 배경으로 모델을 청하여~~.

 

 

연칠성령 도착.

 

<연칠성령(連七星嶺 1,244m)>

강원도 삼척시 하장면과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을 이어주는 고개로, 삼척시 하장면 중봉리에 자리한 해발 1,283.5m인 중봉산(中峰山)에 걸쳐 있다. 등성이가 7개나 된다고 하는 청옥산 옆의 령으로,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에 자리한 무릉계곡에서 문간재(신선봉 갈림길)를 넘고 호계를 지나 막다른 골짜기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넘나들기가 험난하여 난출령(難出嶺)이라고도 불리었다는 연칠성령에 이르게 된다. 연칠성령을 넘어서면 하장면 중봉당골로 이어진다. 또 다른 일설은 하늘에 계신 칠성님께 이어지는 고개로 보기도 하고, 사원터에서 하장면 방향으로 늘어선 일곱 개의 봉우리에서 온 말로 보기도 한다.

정상에는 엉성하게 쌓아 올린 돌탑과 이정목이 서 있고, 좌측 무릉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대간꾼들이 이곳에서 한 구간을 끊고 내려가는 길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 백두들의 후미팀도 이곳에서 무릉계곡으로 하산키로 예정하고 있다.

 

연칠성령 안내판.

 

연칠성령 인증을 남기고, 서둘러 청옥산을 향한다.

 

 

11:48  연칠성령에 20여분 후에 도착한 후미들은,

 

연칠성령에서 좌측 무릉계곡으로 빠져든다.

 

고도를 조금 낮추니 가을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고,

 

비에 젖은 단풍으로 치장한 바른골을 강물처럼 흘러 내려간다.

 

비에 젖은 울긋불긋 단풍은 그 처연함 조차 한층 뽐내는 듯하다. 

 

단풍에 젖고, 비에 물든 바른골계곡을 바라보며,

 

파란 이끼옷에 비단단풍 수놓은 옷을 입은 바위도 안녕 !

 

무릉계곡의 단풍을 함께 즐겨본다.

 

 

탈출조는 그렇게 무릉계곡의 가을빛 속으로 침잠하듯 스며들었고,

연칠성령에서 청옥산으로 향한 나는, 

 

 

청옥산 정상에서야 선두그룹을 따라잡았고,

청옥산을 내려가려는 분들을 돌려세워 청옥산 증명을 남긴다.

 

<청옥산 (淸玉山, 1,403.7m)>

동해시 삼화동과 삼척시 하장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두타산, 고적대와 함께 '해동삼봉'으로 불리는 산이다. 청옥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청옥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 진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유생들이 의병들의 정신이 죽지 않았다는 뜻으로 '청옥산'이라 했다고도 하고, 동해시 쪽에서 바라보는 산세가 '푸르다'라고하여 청옥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예기도 있다.

 

'청옥'은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보석이다. 청옥은 아미타경에 나오는 극락을 상징하는 일곱 가지 보석 중 하나로, 일곱 가지 보석은 금, 은, 수정, 적진주, 마노, 호박 그리고 청옥이다. 그러니 청옥산은 곧 극락이다. 이 땅에 있는 극락의 세상을 이름이다.

 

대동여지도와 여암 선생이 쓴 산경표에는 두타산으로 표기되어 있고, 지금의 두타산보다 50m 높다. 청옥산 주봉에 있던 소나무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한 대들보용 목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산 아래 샘이 있고 정상부는 넓은 공터가 있어 고적대와 함께 야생화의 천국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널찍한 헬기장이 자리한 청옥산 정상부를 뒤로하니,

 

 

이내 학등(鶴嶝) 이정표가 나타난다.

 

청옥산에서 무릉계곡 방향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중, 가장 단순 명료한 코스가 학등능선 코스다. 여기서 학등이란 청옥산을 중심으로 좌측으로는 두타산이, 우측으로는 고적대가 양쪽 날개에 해당하고, 머리 부위인 청옥산에서 등줄기처럼 이어진 줄기라는 의미에서 학등능선이라 한다. 오늘 이 학등능선을 따라 내려가면서 양쪽 계곡의 찬란한 단풍을 담으려 했으나, 흐린 날씨로 인해 다음 기회로 미룰 밖에는...

 

 

학등을 뒤로하고 학등능선을 따라 무릉계곡으로 향하는 백두들.

 

 

좌측 갈미봉 방향.

 

 

가파른 학등능선 내림길에는 까끔씩 거친 암릉도 나타나고,

 

 

날카로운 암릉을 만나면 우회도 하면서,

 

 

하산길의 여유도 즐겨 본다.

 

 

거의 한 시간여를 내려오니 묘지도 만난다.

 

 

학등에서 내려온 길이 2km이고, 학등 입구까지 남은길이 1.6km란다.

에고! 내림길을 한 시간에 2km밖에 못 왔다니..ㅉㅉ

 

 

학등입구를 향한 암릉길을 재촉한다.

 

 

 

길게 드리워진 밧줄도 타고,

 

비에 젖어 미끄러운 암릉을 조심조심 내려선다.

 

 

그래도 하산길이라 발걸음이 가볍다.

 

 

 

기암과 괴석의 차이는?

바위와 돌 만큼의 차이 인지.. 

 

 

나무에 매달려 있는 단풍잎의 숫자가 늘어나며, 산객들의 표정도 밝아진다.

 

 

백두의 두 건각(남잔가?)

 

요즘 세간에 회자되는 유행어에 '비에 젖은 낙엽' 신세에 대한 예기가 많다.

그 의미야 처량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래도 이곳 무릉도원의 비 맞은 단풍은 아름다운 자연, 그 자체다!

 

'비에 젖은 낙엽'은 수년 전에 도쿄대학의 여교수가 명명하여 유명해진 말로, 일본어로 '오찌누레바'이다. 비에 젖은 낙엽이 빗자루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듯이 ‘부인 옆에 꼭 붙어있는 처량한 남편 신세’를 비유한 것이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매일 밤늦게 집으로 들어가는 샐러리맨들에게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일에 쫓겨 특별한 취미도, 노년에 대한 설계도 없이 퇴직을 맞은 사람은 영락없는 ‘비에 젖은 낙엽’이다. 이제 우리들에게도 젖은 낙엽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남다른 사고와 노력이 필요해 보이고, 산(山)은 또 다른 비책이 될 수도 있을런지...! 

 

 

이런 험한 곳에 또 묘지가 있다.

후손들 발복 하셨는지요?

 

천지사방에 단풍잎이 그려져 있다.

 

 

발복 하려는 후손들이 많았던지, 묘지가 자주 보인다.

 

학등입구를 배경으로!

 

 

내려가는 길도 이리 길고 험할진대...

 

그래도 단풍들의 위로에 힘을 내어 본다.

 

 

우측 박달골 방향으로 시야가 조금 트이고,

 

어느 사이에 빗방울도 잦아들었다.

 

 

파란 이끼 망토를 걸친 두꺼비 바위가 있는 옆쪽에,

 

좌측 햇대등 쪽 절벽이 조망되는 전망바위가 있다.

 

 

햇대등 절벽을 배경으로.

 

 

 

 

 

 

단풍이 찾아온 햇대등 절벽 조망.

 

박달골 상류 방향 조망.

 

 

전망바위를 뒤로하고, 학등입구를 향해 가파른 내림길을 이어간다.

 

 

등로는 급경사 암릉을 이리저리 감아돌며 이어지고,

 

 

가끔씩은 밧줄에 의지해야 하는 암릉이란 비수도 숨기고 있다.

 

 

학등에서 거의 두 시간여의 내림길 끝에,

 

 

학등 입구에 내려선다.

올라가는데 2시간 걸린다는데, 오늘은 내려오는데 두 시간 걸렸다.

 

 

 

나뭇잎을 그려 놓은 계곡을 가로질러,

 

 

이정목이 자리한 학등입구에 도착한다.

 

학등입구 이정표.

 

 

가을이 내려앉은 바른골 계곡에는,

 

바윗돌과 맑은물도 산다!

바윗돌도 동글동글,

빗방울도 동글동글.

 

 

문간재를 지난다.

 

문간재 이정표.

시간 관계상 신선봉과 쌍폭포 및 용추폭포는 생략하고,

 

먼저 내려간 후미팀을 쫓아 하산길을 서두른다.

 

 

철계단을 따라 내려오며,

 

 

물기 머금은 무릉계곡의 단풍을 감상한다.

 

우측 편으로 박달골 너머로, 구름에 싸인 햇대등 절벽이 살짝 보인다.

 

 

하늘문 갈림길에 도착하여, 하늘문을 다녀올까 잠시 망설이다가...

 

 

하늘문이 궁금해서 다녀왔다.

피마름골(아래)에서 하늘문(위)로 이어진 철계단이 아찔하다.

 

위에는 뭐가 있는지 또 궁금해지지만, 기다리는 분들의 모습이 떠올라 발길을 돌린다.

 

<하늘문(피마름골)>

관음암에서 쌍폭포로 가는 중간 수직의 절벽에 300여 계단의 철계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아래 시작점을 피 마름 골이라 한다. 아래쪽 계단이 시작되는 지점은 임진왜란 때 많은 전사자들이 피를 흘려 피마름골이라 불리었는데, 이곳에서 올려다 보이는 수직의 계단이 마치 하늘로 오르는 문처럼 보여 하늘문이라 부른다.

 

그래도 하늘문 인증은 남긴다.

 

 

 

하늘문을 뒤로하고 삼화사를 향해 서둘러 하산길을 재촉한다.

 

 

철교를 따라 계곡을 건너기도 하고,

 

구름이 낮게 드리운 단풍 든 무릉계곡을 내려온다.

 

 

 

두타산 갈림길도 지난다.

 

철교에서 바라본 무릉계곡.

 

두타산성 방향.

 

 

학소대를 지난다.

 

옛날 학이 노닐던 자리에 학 인형이 학춤을 추고 있다.

 

 

그리하여 드디어 삼화사에 도착한다.

 

<삼화사(三和寺)>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옛날에는 삼공사(三公寺) 또는 흑련대(黑蓮臺)라고도 하였다. 석식영암(釋息影庵)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말에 세 사람의 신인(神人)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지금의 삼화사 자리에서 모의(謀議)를 하였다. 그들이 가버리자 그 지방 사람들은 그곳을 ‘삼공(三公)’이라 하였으며, 얼마 뒤 사굴산(闍堀山)의 품일(品日)이 이곳에다 절을 짓고 삼공사(三公寺)라 하였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1393년(태조 2) 조선의 태조가 칙령을 내려 이 절의 이름을 문안(文案)에 기록하고 후사(後嗣)에 전하게 하면서, 신인(神人)이 절터를 알려준 것이니 신기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 옛날 삼국을 통일한 것은 부처님 영험의 덕택이었으므로,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절 이름을 삼화사(三和寺:삼국이 화합하여 통일이 되었다는 뜻)로 고쳤다고 한다. 한편, 읍지(邑誌)에 의하면, 옛 사적(史蹟)에 이르기를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오대산을 돌면서 성적(聖蹟)을 두루 거쳐 돌아다니다가 두타산에 와서 흑련대를 창건하였는데 이것이 지금의 삼화사라고 하였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1년(642)의 일로 적혀 있다. 또, 고적(古蹟)에 의하면, 약사삼불(藥師三佛)인 백(伯)·중(仲)·계(季) 삼형제가 처음 서역에서 동해로 돌배[石舟]를 타고 유력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와서 맏형은 흑련(黑蓮)을 가지고 흑련대(黑蓮臺)에, 둘째는 청련(靑蓮)을 손에 가지고 청련대(靑蓮臺)에, 막내는 금련(金蓮)을 가지고 금련대(金蓮臺)에 각각 머물렀다고 하며, 이곳이 지금의 삼화사·지상사·영은사라고 전한다. 또, 약사삼불은 용을 타고 왔는데 그 용이 변하여 바위로 되었으며, 바위 뒤쪽에는 약사삼불이 앉았던 자리가 완연한 형태로 남아 있다고 하며, 약사삼불의 손은 외적(外賊)이 잘라 땅 속에 묻었다고도 한다.

 

이 절은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1747년(영조 23) 홍수와 사태로 인하여 무너지자 옛터에서 조금 위로 옮겨 지었고, 1820년(순조 20) 화재가 나서 1824년에 중건하였으며, 1829년 다시 불타자 정원용(鄭元容)·이기연(李紀淵)·이광도(李廣度)·윤청(尹晴) 등이 서로 협력하여 중건하였다. 1869년(고종 6) 화운(華雲)덕추(德秋)가 단청을 하였고, 1873년(고종 10) 선당(禪堂)을 세웠으며, 1896년 학송(鶴松)·창명(彰明) 등이 승당(僧堂)을 지었다. 이처럼 수차례의 화재와 중건을 거쳐오다가 1907년에는 의병(義兵)이 숙박하였다는 이유로 왜병(倭兵)들이 방화하여 대웅전·선당 등 200여 칸이 소실되었다. 그 이듬해 이 중 일부를 건축하였으며, 1979년 8월에 무릉계반(武陵溪盤) 위쪽으로 절을 옮겨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약사전(藥師殿)·요사채·삼성각·육화료(六和寮)·큰방·천왕문·일주문 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삼층석탑 1기를 비롯하여 운암당상준대사부도(雲巖堂尙俊大師浮屠)와 원곡당대선사부도(元谷堂大禪師浮屠) 및 비(碑)가 있다. 이 가운데 대웅전 안에 안치된 철불은 창건설화와 관련된 약사삼불 가운데 맏형의 불상이라고 전해지며, 삼층석탑은 높이 4.95m로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는 고려시대의 탑이다. 한편 삼성각 안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철불(鐵佛) 한 구가 있었는데, 1997년 이 철불 뒷면에서 조성 당시에 새겨진 명문(銘文) 150여 자가 발견되었다. 명문의 판독 결과 이 철불이 9세기 중엽에 조성된 노사나불(盧舍那佛)임이 밝혀졌다.

 

명문 가운데는 이두(吏讀)가 포함되어 있으며, 불상 조성에 관계되었던 결언(決言) 등의 승려와 시주자들의 이름이 적혀져 있는 등, 당시의 사회·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불상은 1998년 12월 보물 제1277호로 지정되었으며, 절에서는 대적광전을 지어서 이 철불을 봉안하고 있다. 특히, 고려 말의 이승휴(李承休)는 이 절 가까이에 객안당(客安堂)을 짓고 이곳에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하였으며, 10여 년 동안 불경을 독파하다가 객안당을 삼화사에 희사하고 간장암(看藏庵)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 절의 주변에는 대승암(大乘庵)·성도암(成道庵)·은선암(隱仙庵)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설이 깃들어 있는 명승지인 두타산성(頭陀山城)·오십정(五十井)·용추폭포·학소대(鶴沼臺) 등이 유명하다.

 

두타산과 청옥산 입구에 살며시 위치한 천혜의 삼화사를 말할 때 수륙재를 빼놓을 수 없다. 삼화사에서는 조선시대(태조 4년) 최초로 국행수륙대재가 설행되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건국과정에서 희생된 영혼을 위무하고 친고려 성향의 세력들을 포용하여 백성들과 소통,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동해의 삼화사와 강화도의 관음굴, 거제도의 견암사에서 국행수륙대재를 설행하였는데 이것이 조선시대 수륙재의 시작이다. 삼화사 국행수륙대재는 하늘과 (天地) , 죽은자와 산자( 冥陽 ), 사성과 육범(水陸)의 모든 존재가 서로 소통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삼화사에서 국행수륙대재가 설행된 배경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두 아들이 삼척에서 교살되었기 때문이며, 이들 왕씨 일가의 영혼을 달래어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들과 소통 화합하기 위하야 매년 봄과 가을에 왕실에서 주관하여 설행한 의례였다.

 

삼화사 대웅전 모습.

 

무릉계곡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삼화사의 전각들.

 

 

무릉반석이 내려다 보이고,

 

무릉반석이란 금란정과 삼화사 입구 중간의 계곡에 있는 1,500여 평의 넓은 바위를 말하는데, 무릉계곡의 대표적인 경관 중의 하나이다. 무릉계곡을 흐르는 하천 바닥 전체를 차지할 만큼 넓은 바위를 이루고 있는데, 무릉반석 위에는 옛날 이곳을 찾았던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남긴 많은 암각서들이 남아 있다.

 

무릉계곡의 가을색은 점점 짖어 간다.

 

돌아본 삼화사 방향.

 

무릉반석이 넓기는 하다.

 

 

'두타산삼화사'란 편액을 보듬고 있는 일주문을 지나,

 

<삼화사 일주문>

“頭陀山三和寺” 현판은 탄허스님께서 쓰신 것이란다.

 

 삼화사(三和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로서, 오대산에 성지를 열고 동해안으로 내려오던 자장율사가 두타산의 산세에 반하여 이곳에 절을 세우고 흑련대(黑蓮臺)라 부른 데서 기원하였다. 당시 자장율사에게 한을 품고 악신이 된 3명의 여신(女神)을 감화시켜 이들의 도움으로 절을 짓게 되었는데 이 3명의 여신이 화합 발심하여 창건한 절이라 하여 나중에 절 이름을 삼화(三和)라 하고 마을 이름을 삼화동이라 하였다 한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삼화사 창건 당시 약사삼불(藥師三佛)인 백(伯), 중(仲), 계(季) 삼형제가 처음 서역에서 용을 타고 이곳 동해로 왔다. 는 전설이 있다. 이때 맏형은 흑련(黑蓮)을 가지고 흑련대(黑蓮臺)에, 둘째는 청현(靑蓮)을 가지고 청련대(靑蓮臺)에, 막내는 금련(金蓮)을 가지고 금련대(金蓮臺)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그곳에 세워진 절이 각각 지금의 삼화사, 지상하, 영은사라고 전하고 있다. 그때 약사삼불을 태우고 용이 투타산을 오르던 길이 바로 무릉계곡이었기에 무릉계곡을 용오름길이라고도 한다. 용오름길의 정점인 용추폭포는 날이 가물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맑고 깊으며 산림이 우거져 있다.

 

 또 다른 설은 고려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부처님 영험의 덕택이었으므로,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절 이름을 삼화사(三和寺:삼국이 화합하여 통일이 되었다는 뜻)로 고쳤다고 한다.

 

 또 하나는 신라말에 3명의 신인(神人)이 있었는데, 그들은 각각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지금의 삼화사 자리에 모여 무언가를 모의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떠난 후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삼공(三公)이라 불렀으며, 그 후 얼마 뒤 사굴산문(闍堀山門)의 개산조인 범일(梵日)국사가 이곳에 들러 절을 창건하고 삼공사(三公寺)라 하였다.

 

 고려말에 시어사(侍御史)를 지낸 이승휴(李承休)가 절 가까이에 객안당(客安堂)을 짓고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저술하였으며, 이곳에서 10여 년간 삼화사에 있는 불경을 독파하다가 객안당을 삼화사에 희사하면서 간장암(看藏庵)이란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일주문 옆 무릉계곡 안내판.

 

 

돌아본 무릉계곡.

 

 

무릉계곡 시설지구로 하산한다.

 

무릉계곡 안내도.

 

<무릉계곡>

국민관광지 제1호로 지정된 무릉계곡은 두타산 등산로 입구의 호암 소(沼)에서 용추폭포가 있는 곳까지 약 4km에 달하는 지역으로,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형성되어 일명 무릉도원이라 불릴 만큼 수려하고 아름답다. 이곳은 곳곳에 기암괴석이 즐비하며,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서 무릉반석.학소대.병풍바위.선녀탕.쌍폭포.용추폭포.문간재 등 빼어난 절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금란정.삼화사.두타산성 등의 유적지도 불 수 있다.


 

 

돌아본 무릉계곡 입구.

 

 

강릉에 가면 자추 찾는 그 목욕탕에서 젖은 옷을 갈아 입고,

 

 

언제나처럼 그 한정식 집에서,

 

긴~ 산행의 여독을 소맥잔에 녹인다.

 

늦은 점심의 결말!

 

 

 

늦은 점심, 아니 저녁을 해결하고,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올해의 대간 산행은 청옥산에서 마침표를 찍고,

한겨울 동안은 한남금북정맥을 따라 걷다가,

내년 오월쯤에 다시금 대간길로 복귀하려 한다.

 

지지난해 중봉산을 거처 두타산에서 햇대등 두타산성으로 산행했었고,

올해는 학등능선과 바른골을 둘러보았고, 

내년에는 쉰움산을 거쳐 두타산으로 가는 코스를 가려한다.

백두산우회는 호기심이 무척 강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가려운 것은 참아도 궁금한 것은 참기 어렵다!

 

혹시 뭐 궁금하신 곳 있으면 바로 알려 주세요.

함께 호기심이란 채워지지 않을 바다를 매우려 떠나 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