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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대간남진 29차(갈령삼거리~신의터재) : 중화지구 전장터를 누비며 생존이란 단어를 떠올린 대간길 y

by 재희다 2014. 7. 27.

산 행 지 : 백두대간 29차(갈령삼거리~신의터재)

산 행 일 : 2014. 07. 26.(토)

산행코스 : 갈령 + 갈령삼거리~비재~봉황산~화령재~윤지미산~무지개산~신의터재

              (거리 23km + 1.1km)

산행참가 : 17명.

 

<산행코스>

 

본디 이번 산행은 늘재에서 시작하는 속리산 구간을 이어 갔어야 하지만, 한여름 암릉이 있는 긴 능선산행은 무리일듯하여 속리산 구간 산행은 다음번 8월 말로 미루고, 금번 한여름 산행은 중간 탈출이나 식수 조달이 가능한 구간을 진행하려고 상주의 중화지구대 구간 산행을 먼저 진행하기로 했다.

오늘 산행은 중화지구대(中化地溝帶)의 화령(化寧) 구간이고, 다음 구간(큰재~신의터재)은 중화지구대의 중모(中牟) 구간이다. 조선조(朝鮮祖) 때, 이곳 상주목(尙州牧)에는 네 개의 현(縣)이 있었는데, 그중 서(西)쪽에 자리잡은 현(縣)이 중모와 화령이었고, 다음 구간인 중모현(中牟縣)은 오늘날 모동면(牟東面)과 모서면(牟西面)이 되었다. 오늘 걷게 되는 화령현(化寧縣)은 화동(化東), 화서(化西), 화북(化北), 화남(化南)면이 되었는데, 오늘 걸을 대간길은 주로 화동과 화서의 경계를 따라 걷게 된다.

 

 

03:16 더운 한여름날의 산행은 밤에 걷는 게 더 좋다는 의견에 따라,

갈령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산행 준비를 하고는 버스에서 내린다.

 

갈령 아래로 터널이 뚫리면서 갈령 고갯마루에는 차량 통행이 뜸하고,

지난밤 내린 비로 도로가 젖어있어서 밤공기가 상쾌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03:21 갈령에서 산행 준비를 하는 사이에 다른 산악회 차량이 도착한다.

백두대간 속리산 구간 산행을 시작하려고 해서 우리는 잠시 기다렸다가 출발한다.

 

갈령 들머리에 있는 이정석.

 

<갈령(葛嶺)>

경북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와 화북면 상오리를 잇는 고개로, 49번 국도가 지난다. 주변에 칡이 많다 하여 ‘칡 갈(葛)’ 자를 써서 갈령이라 부르는 곳인데, 십승지 중의 하니인 상주 우복동이 인근에 있다.

오늘 화서IC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나 갈령으로 오면서, 갈령 직전에 우측 옛길을 두고 새로 난 갈령터널로 들어서는 바람에 모처럼 버스가 알바를 하는 사태를 빚기도 했다. 옛날 북진 때만 해도 갈령 고개가 새로이 포장이 되어서 차로 다니니가 편해졌다고 좋아했었는데, 그새 또 갈령 아래로 터널을 뚫어서 새로이 길을 만드니, 가히 변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03:26 갈령 이정석 뒤편 들머리로 들어서며 산행을 시작한다.

 

갈령 정상에 있는 도로개통 기념비.

그리 오래지 않은 옛날에는 좁은 달구지 길을 개통하면서도 이런 비석을 세웠는데...ㅉㅉ

 

 

03:33 잠시 올라서니 갈령 헬기장을 지나고,

 

 

03:41 어둠을 뚫고 오르막을 치고 오르는데,

등로가 마사토 암릉구간이라서 경사도에 따라 미끄러지기 쉬운 곳이다.

 

 

03:55 우측 상오리 쪽 가로등 불빛이 산자락의 모양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03:57 작은 암봉을 올랐다가 내려서면,

 

 

04:01 이내 쉼터가 있는 갈령삼거리라는 분기봉에 도착한다.

이정목에 모자가 걸려있는데 아마도 앞서 출발한 대간팀에서 두고 간 듯하다.

 

어둠을 뚫고 암릉구간 1.3km를 올라 백두대간의 갈령삼거리에 접속하여,

먼저 도착한 백두들이 벤치에 배낭을 내려놓고 목을 축이며 후미의 도착을 기다린다.

 

 

04:10 후미가 도착하자 잠시의 쉼을 뒤로하고, 남쪽 비재 방향으로 대간남진 산행을 시작한다.

 

 

04:22 잠시 후 급경사 암릉구간을 알리는 '위험'표지판을 만난다.

 

지난밤 내린 비로 낙엽이 젖어 있어서 등로가 상당히 미끄러워 로프를 잡고 조심조심 암릉을 내려선다.

 

 

04:42 암릉을 내려서서는 완만한 내림길이 길게 이어지더니,

 

 

04:43 충북알프스 코스의 장자동고개(구병산 방향)로 이어지는 능선이 분기하는 갈림길이 나온다.

 

 

04:50 장지동고개 방향 갈림길을 지나 잠시 오름길을 따르니 널찍한 헬기장에 도착하고,

 

잠시 목을 축이며 간간이 흩날리는 빗방울에 대비해 우장을 갖춘다.

 

 

05:00 헬기장을 뒤로하고 잠시 내려서니, 백두대간 상(上)의 유일한 습지라는 못제가 나온다.

 

<못제(池堤)>

못제는 백두대간 능선 상에 유일하게 존재한다는 작은 습지로 천지(天池)라고도 하며, 사방이 막혀있는 2~300평 정도에 물이 고여있는 면적은 10여 평이라고 하는데, 이젠 그것마저 보기가 힘들고 갈대가 자라는 것으로 보아 물이 있던 곳이라 짐작만 해 본다. 못제의 제(堤)는 방죽을 의미하는데, 산꾼들은 발음이 같아 고개 이름으로 착각하여 못재(嶺)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이곳 상주 출신이라, 견훤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못제의 맞은편에 솟은 대궐터산에 성을 쌓은 견훤이 이곳 못제에서 목욕을 하며 힘을 얻어 세력을 넓혀 가자, 이를 알게 된 신라장군 황충이 못에 소금을 풀어 견훤의 힘을 꺾었다는 것이다. 지렁이는 소금을 매우 싫어한다는데 착안하고, 「삼국유사」에 “견훤은 지렁이의 자식”이라는 데서 유래된 전설인 듯하다.

 

'견훤'은 후백제를 세운 인물로, 얼마 전 지나온 대야산 구간 대간길 동쪽에 있었던 문경시 가은읍에서 태어났다. 삼국사기에는 견훤을 가은 출신 아자개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는데, 어느 날 부모가 농사일을 하면서 강보에 싼 아기를 숲속에 두었는데,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여 사람들이 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한 처녀가 밤마다 찾아오는 건장한 청년과 정을 통했는데, 정체가 궁금하여 옷고름에 실을 꿰어 놓았다가 아침에 따라가 보니, 커다란 지렁이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견훤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못제 설명판.

 

갈대가 자라고 있는 못제 모습.

 

 

05:02 못제에서 오름길을 조금 오르니, 또 충북알프스 갈림길 표지판을 만난다.

충북알프스 능선은 지나온 장자동 고개에서 갈라지는데, 이곳 갈림길은 사면 방향 샛길인 모양이다.

 

<충북 알프스 개념도>

 

충북 알프스는 충북 보은군과 경북 상주시 사이에 걸쳐있는 산줄기다. 보은군 서원면 서원교를 들머리로 하여, 충북에서 가장 경관이 빼어난 구병산 구간과 속리산 구간의 산줄기를 이어서 보은군 신정리나, 또는 보은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고개인 활목고개를 날머리로 하는 산행코스를 말한다.

충북 보은군에서 1999년 5월 17일 충북 알프스로 특허청에 등록하였고, 이곳에는 신라 진흥왕 때 의신조사가 창건한 법주사와 많은 국보와 보물들이 있을 뿐 아니라, 원시림이 자연 그대로 잘 보존된 구병산과, 수석전시장이라 불릴 만큼 기암괴석을 간직한 속리산을 비롯한 볼거리가 풍부한 곳이다. 우리 백두산우회도 올 가을쯤에는 백두대간 부록으로 '충북알프스 걷기'를 진행하려고 한다.

 

 

05:06 억시기 마을 갈림길을 지난다.

 

<억시기 갈림길>

억시기 마을은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의 자연부락으로, 농사를 지어서 억석(億石)을 할 부자가 날 곳이라 한다. 화전(火田)으로 개척되었지만 6.25전란 후 난민정착촌이 되어 지금은 큰 마을이 되었다. 참고로 '억시기'는 매우 또는 억척, 억세게의 뜻이라 한다.

 

 

05:11 좌측으로 청계산(두루봉)이 조망된다.

좌측이 청계산 두루봉(투호봉)이고 우측의 뾰족봉이 대궐터산이다.

 

<청계산(873m)>

청계산은 산 모양새가 두리뭉실하다 하여 두루봉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측의 대궐터산은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산에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고 하여, 청계마을 사람들에 의해 대궐터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지역 상주의 역사서인 상산지에는 두루봉과 대궐터산 전체를 청계산으로 표기하고 있은 등 지도마다 표기하고 있는 이름이 다르므로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05:13 주변이 밝아지며 밧줄이 메어진 암릉구간을 내려선다.

 

 

05:26 이제 좌측으로 청계산(두루봉) 능선이 훤히 보인다.

 

대궐터산 조망.

 

두루봉과 대궐터산 파노라마.

 

충북알프스 갈림봉을 지나 암릉 내리막을 내려서는데,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며 우측 건너편으로 속리산 형제봉에서 분기하는 모악지맥의 두루봉이 있는 청계산 능선(두루봉/대궐터산)이 시원스레 조망된다. 대궐터산은 상주시의 역사지인 상산지에서 유래된 산 이름인데, 산 아래 마을에서는 두리뭉실하게 생겼다 하여 두루봉이라고도 부르고, 또다른 이름은 청계산이라고도 한다. 후백제의 견훤이 이 산에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 하여 대궐터산이라고도 하며, 산기슭에 청계사와 후백제의 견훤이 쌓았다는 성산산성이 있다. 성산산성은 둘레가 3.3km인 토석성으로 산 아래에서 보면 바위산으로 보이는 천혜의 요새라고 한다.

 

 

05:34 조망바위 안내판을 따라 우측 조망바위로 향한다.

 

조망바위에 올라서니 지나온 충북알프스능선 분기봉이 조망되고,

 

당겨본 충북알프스능선(구병산 방향) 분기봉.

 

가야 할 비재 방향의 봉우리 우측으로 구병산 능선도 조망되며,

 

앞쪽으로 비재 건너편 봉황산 갈림봉으로 이어지는 대간 능선도 가늠된다.

 

봉황산 방향 조망.

 

좁은 조망바위에서 조망을 즐기는 백두들.

 

구병산 방향.

 

서쪽 동관리 방향.

 

서쪽 방향 파노라마.

 

남동쪽으로 대궐터산과 봉화산 사이의 골짜기가 조망된다.

 

살짝 당겨본 상주 방향.

 

 

05:54 오래된 묵묘가 있는 510봉을 지난다.

정상에 올라서니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주렁주렁 열려있고 무명묘지 1기가 있다.

 

 

06:03 최근에 만들어진 듯한 나무계단을 따라 비재로 내려선다.

 

 

06:05 비재 쉼터에 도착하여 잠시 쉼을 하는 백두들.

 

쉼터 한켠에는 비재 안내판도 설치되어 있다.

 

<비재(320m)>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와 장자동 사이에 있는 재다. 새가 나는 형국이라서 붙여진 이름인데, 비조치(飛鳥峙) 또는 비조령(飛鳥嶺)으로도 불린다. ‘비스듬하다, 비탈, 벼랑’등의 뜻으로 쓰이는 말을 지명에서 한자로 표기할 때는, ‘천(遷), 애(崖), 별(別), 성(星), 비(飛)’로 나타난다. 상주지역에서는 ‘비루', '비알’이라고 한다. ‘비탈’과 ‘비루’를 땅이름에서 한자로 옮길 때, ‘비(比, 飛, 琵)’를 썼는데, 특히 ‘비(飛)’가 많이 쓰였다.

 

새로이 만들어진 비재 에코브리지 모습.

옛날 북진 때는 가파른 절개지에 철계단이 있는 2차선 도로였는데,

지금은 에코브리지를 만들어 놓아서 동물들 때문에 등산객들이 덕을 본다.

 

비재 동쪽 상주 방향.

 

비재 서쪽 보은 방향.

 

 

06:15 비재 에코브리지를 건너서 봉황산으로 향하는 백두들.

 

이제 이곳 비재를 출발하여 추풍령까지의 중화지구는 대간길 중 슬리퍼구간, 실버산행구간 등으로 불려진다. 아마도 업다운이 거의 없는 완만한 육산 구간이라 그리 불려지는 듯하다.

 

봉황산 방향 들머리로 들어서는 백두들.

 

 

06:25 비재 들머리 이정목에는 매직으로 '비재'라 적혀 있다.

아마도 북진하는 대간꾼들에게 비재가 가까웠으니 힘내라는 뜻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06:31 잠시 후, 고사목 한그루가 구병산을 가리키고 있는 전망바위를 지난다.

사진을 찍어와서 보니 고사목이 가리키는 곳이 구병산 정상이다.

'백두들아 구병산도 한번 다녀가거라'하는 하늘의 뜻으로 해석함이 어떨지..ㅋㅋ

 

서북쪽 동관리 방향.

 

구병산을 담고 있는 용현 형.

 

 

06:33 459봉에는 널찍한 공터가 있는데, 아마도 오래되어 허물어진 묘지터인 듯하다.

 

 

06:49 다시 우측으로 구병산이 조망되더니,

 

 

06:53 이번에는 좌측 상주 방향으로도 조망이 트인다.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장관을 연출한다.

 

 

07:01 지도상 660봉에 도착한다.

우측으로 구병산 방향 능선이 분기되는 봉우리로, 대간길은 좌틀하여 봉황산을 향한다.

 

 

07:12 작은 무명봉에서 잠시 쉼을 하며 지도를 확인한다.

 

 

07:36 언제 봐도 반가운 백두대간 이정표를 지나고,

 

 

07:46 암릉을 올라서자 뒤쪽 구병산 방향으로 조망이 트인 조망바위가 나타난다.

 

남서쪽 화남면 천탁산(683m) 방향.

 

남쪽 백화산 방향.

 

남서쪽 방향 파노라마.

 

서쪽 구병산 방향.

 

구병산으로 이어진 능선이 시원스레 뻗어 있다.

 

형제봉 방향으로 아침에 지나온 능선과 봉우리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잠시 전에 지나왔던 구병산 갈림봉.

 

북서쪽 속리산 방향으로 지난밤 산행 출발지였던 갈령도 보인다.

 

북쪽 대궐터산 방향.

 

북서 방향 파노라마.

 

천탁산(좌)과 화남면 방향.

 

구병산 방향.

 

남서쪽 방향 파노라마.

 

 

07:48 전망바위를 뒤로하자, 가야 할 봉황산 쪽 또다른 암릉 위에서 백두들이 조망을 즐기고 있다.

 

남쪽으로 화서면 앞쪽 들판이 조망되고, 멀리로 지장산(772m)과 백화산이 조망된다.

 

 

07:51 암릉 위 전망바위에서 돌아본 형제봉 방향.

 

서북 방향 파노라마.

 

살짝 당겨본 속리산 방향.

 

서쪽 구병산 방향.

 

남서쪽 천탁산 방향.

 

남서 방향 파노라마.

 

남쪽 백화산 방향.

 

 

07:57 봉황산 정상에 도착하니, 백두들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봉황산(鳳凰山, 740.8m)>

경북 상주시 화서면과 화남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 표지석엔 '白頭大幹 鳳凰山 740.8m'라 적혀 있다. 정상에는 삼각점과 백두대간 안내 표지판이 보이는데, 오늘 산행구간 중에 가장 높은 산으로 중화지구 화령(化寧) 북쪽에 우뚝 솟아있는 백두대간 상(上)의 산이다. 1300여년 전 이 산에 봉황새가 찾아들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하여 봉황산이 됐다고 하는데, 산의 생김새가 정상을 봉황새의 머리라 하고, 양쪽으로 뻗은 능선의 봉우리는 날개에 해당된다고 한다면, 그런대로 봉황 모습 같다고 할 수 있어서 그런 전설이 배태된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중종(9대 임금)의 태를 묻어서 태봉(胎封)산으로 불리기도 했고, 이 지방의 진산(鎭山ㆍ그 지역을 진호 하는, 제사도 지내는 主山)이며 팔음지맥 분기점이기도 하다.

 

<팔음지맥(八音枝脈)>
백두대간 봉황산에서 남서방으로 분기하여 천택산(683.9m), 팔음산(771m), 천금산(464.9m), 천관산(445.4m), 철봉산(449.5m)을 만들고 북으로는 보청천, 남으로는 송천(초강천)의 분수령이 되어 금강2교에서 맥을 다하는 산줄기다.

 

 

봉황산 정상에 예전에는 없었던 쉼터가 조성되어 있어서, 잠시 여유를 부리며 쉬어가기에 좋은 장소가 되었다.

 

우리는 봉황의 머리 꼭대기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아침식사로는 좀 늦은 시간이지만 오늘의 최고봉에서 하는 식사라 한결 부담이 덜하다.

 

 

08:20 식사를 마치고 봉황산 정상 인증을 남긴다.

 

봉황산 정상은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조망이 없지만, 북쪽 대궐터산 방향으로만 조망이 트인다.

 

봉황산을 뒤로하는 창병씨.

 

봉황산 정상의 백두대간 안내판.

 

 

08:22 동쪽 방향의 조망을 살피며 봉황산을 뒤로한다.

 

봉황산을 내려서며 바라본 동남쪽 방향 조망.

 

 

08:25 잠시 내려서자, 동쪽 방향으로 갑장산과 기양산이 조망된다.

 

살짝 당겨본 기양산(704m) 방향 조망.

 

동쪽 의성군 방향으로 팔공기맥 끝자락의 봉우리인 청화산과 만경산쯤도 가늠된다.

 

동쪽 방향 파노라마.

 

대궐터산 맨 앞쪽 봉우리 우측 허리께에 있는 극락정사도 선명하게 구분이 된다.

(사진으로는 구분이 잘 안 되네..ㅉㅉ)

 

북쪽 방향 파노라마.

 

 

08:33 돌아본 속리산 방향.

 

 

08:34 봉황산 내림길 등로 옆에서 예쁜 영지버섯을 발견한다.

 

영지버섯 발견에 열광하는 손점장!

 

 

08:35 봉황산 내림길은 완만하게 이어진다.

 

등로 우측 아래로 보이는 상주시 화서면 조망.

 

<상주시 화서면>

화서면은 동으로 내서면과 외서면, 북서쪽으로 화북면과 화남면, 남으로는 화동면에 접해있고, 상주시와는 26km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행정명은 화서면(化西面)이고 화령(化寧)이라고 부른다. 화서는 중화지구(中和地區)의 중심으로, 신라시대에 답달비(答達匕), 답달건비(答達建匕), 또는 답달비현(答達匕縣)으로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 16년에 화령현(化寧縣)으로 고쳤다고 하며,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조 1413년(태종 13년)에 현으로 고쳐서 상주목에 속하였다.

 

화서면 앞쪽 산그림.

 

 

08:36 우후방으로 조망이 트이는 곳에서 돌아본 형제봉과 대궐터산 방향.

 

북쪽 대궐터산과 작약지맥 능선 조망.

 

북쪽 방향 파노라마.

 

예쁜 도라지꽃!

 

 

08:49 우측으로 조망이 트인 곳에서 돌아본 봉황산.

 

봉황산과 형제봉 방향.

 

형제봉과 대궐터산 방향.

 

대궐터산과 작약지맥 능선.

 

 

08:50 돌아본 봉황산.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봉우리 아래에서 잠시 쉼을 하는 백두들.

 

 

08:54 지도상 580봉에는 산불감시초소가 세워져 있는데,

 

남쪽 백화산 방향으로 조망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상주시>

 

상주시는 18개 읍.면으로 되어 있으며, 백두대간이 남북을 가로지르고, 작약지맥, 숭덕지맥이 동쪽 낙동강으로 뻗으며, 백두대간 거리만도 67km나 되는 넓은 지역이다. 경상도(慶尙道)라는 이름은 경주(慶州)와 상주(尙州)를 함께 부르면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백두대간과 낙동강이 빚어낸 삼백(三白)의 고을 상주는, 흰쌀과 누에고치, 곶감의 고장이다. 쌀, 누에, 곶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하얗다는 것이다. 영남지방의 큰 고을이었던 상주(尙州)는 옛부터 이 세가지로 유명해, 상주를 흔히 ‘삼백(三白)의 고을’이라고 불렀다. ‘삼백미’로 불리는 상주쌀은 경기미와 어깨를 견줄 정도로 질이 좋았고, 임금의 수라상에도 오르던 진상품이었다. 게다가 생산량도 많아 한때 상주에서 생산되는 쌀의 양은 강원도 전 지역에서 생산되는 그것에 비해 두배 가까이 됐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누에치기를 시작한 지는 4,000년쯤 되었는데, 상주 함창읍은 신라시대부터 명주 산지로 이름난 곳이었다. 하지만 한때 산기슭을 온통 차지했을 뽕밭은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고, 더불어 양잠농가도 사라져 예전 명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요즘도 함창 장날에는 명주장이 설 정도로,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은척면 두곡리에 은척뽕나무로 불리는 350년쯤 된 늙은 토종 뽕나무가 있는 것도 이 고장의 누에치기가 아주 오래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곶감은 분명히 빨간빛이 도는 주황색인데 왜 ‘삼백’에 속할까? 사정은 이렇다.

타래에 그대로 걸어 말린 곶감에서는 하얀 분가루가 생기지 않고, 사람이 손으로 만지작거려야만 분이 생겨난다.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곶감을 걸어놓고 손으로 만지며 모양을 만들었기에 하얀 분이 나와 곶감을 감쌌던 것이다.

 

 

08:56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580봉에서 급경사 내림길을 내려오자,

전방의 능선길은 가지 말라고 나무로 막아 놓았고, 대간길은 우틀하여 이어진다.

 

 

08:59 사면길 처럼 보여서 불안해지는 대간꾼들의 마음을 나부끼는 표지기들이 달래준다.

 

 

09:14 대간길은 소나무숲 호젓한 오솔길로 이어진다.

 

 

09:16 간벌을 하지 않아 빼곡한 소나무들이 왜 이리 굽어 있을까?

 

 

09:27 인공 조림지를 지나는데 백두대간 이정표가 반갑고,

 

 

09:29 완만하게 내려서던 등로 앞에 표지기들이 나부끼며, 화령재 방향을 표시하는 이정표가 나타난다.

 

드디어 등로에서 내려와 25번과 49번 국도가 교차하는 수청삼거리로 내려선다.

 

수청삼거리의 백두대간 안내판.

 

수청삼거리.

 

49번 국도는 상주 화북면과 괴산군, 그리고 문장대관광단지로 이어지는 길이고, 동서로 뻗은 25번 국도의 서쪽 방향은 화서면(화령:寧).청주.보은 등지로 이어지며, 동쪽으로는 화령재와 상주.선산으로 가는 길이다.

수청삼거리의 상곡1리 마을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25번 국도를 따라 동쪽 상주.선산 방향으로 300m 정도 완만한 고갯길을 올라가면 화령재다. 이 지역은 해발 200∼300m의 고원지대로, 일교차가 심하고 일조량이 많아서 질 좋은 포도, 배, 사과 등의 과일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

 

 

09:32 25번 국도를 따라 화령재로 향하며, 돌아본 수청삼거리.

 

 

09:36 화령재에는 백두대간 고개임을 알리는 분수령 표지판이 있고,

 

고갯마루 공터에는 '백두대간 화령' 이정석과 정자가 있다.

 

<화령(火寧, 320m)>

경북 상주시와 충북 보은을 잇는 25번 국도가 지나는 고갯마루로, 정상엔 '화령재 해발 320m'라 새겨진 표석이 있고, 도로 왼편(북쪽)엔 상당히 넓은 주차장과 화령재 정자가 있다. 도로 건너 산행 들머리엔 '낙동강-금강 분수령' 안내판이 서 있다.

고개 이름은 아래 고을 화령(化寧)에서 유래되었다는데, 왜 '불 화(火)' 자 화령(火嶺)이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고려 때 기록에 이곳의 장(場)을 화령장(華令場)이라 한 것을 보면 자주 변한 것 같다. 실제로 현재 화령(化寧)이란 행정지명은 없다. 그러나 이 지방 사람들은 화서면 일대를 화령이라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예전에 그 일대의 화서면, 화동면, 화북면, 화남면을 합쳐서 화령현이라 했고, 그 화령현의 소재지가 지금의 화서면 소재지였기에 지금도 화서면을 화령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근의 모동면과 모서면을 합쳐 옛날엔 중모현이라 했다. 그리하여 화령현 지역과 중모현 지역을 합쳐서 지금도 상주에서는 중화(中化)지구라 하여, 충북에 인접한 특수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고구려, 신라, 백제가 서로 차지하려는 국경지대였고,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할 때에도 이 화령재에서부터 북상했다는 말이 전하고 있으며, 후삼국시대에도 견훤이 중요시했던 고개라고 한다. 그리고 6·25 때도 이 지역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었다고 하는데, 이런 배경을 가진 고개였기에 싸움이 잦아서 화령(火嶺), 즉 '불붙는 고개'라는 별칭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수청삼거리에서 화령재에 도착하는 백두들.

 

상주와 보은을 잇는 25번 국도가 지나는 화령재는, 한때 제법 번잡하던 고개였다고 한다. 고갯마루 서쪽의 화서면 신봉리 장터에선 매월 끝자리가 3, 8일인 날에 화령장이 선다. 고려 때부터 화서.화동.모동.모서.화북.화남 등 상주 서부인 중화지역의 중심 시장으로 역할을 해 온 화령장은, 1965년부터 현대식 정기시장이 개설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70~80년대엔 "다른 지방에서는 화서는 몰라도 화령장은 안다”라고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화령장으로 유명했던 화령은 6.25전쟁 때 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 칠곡군 가산면의 다부동전투 다음으로 치열했던 '화령장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한국전쟁사’는 1950년 7월 17일부터 25일 사이 화령장 주변에서 처절하게 벌어졌던 전투를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북한의 인민군 제15사단은 괴산에서 보은에 이르기까지 국군 제1사단을 공격하는 한편, 증강된 1개 연대로 일거에 화령장을 돌파하고 상주를 점령하려 했다. 국군 제6사단의 병참선을 차단해 이를 격파한 다음, 북한군 제1사단과 협공하여 대구를 점령하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화령 주변은 백두대간을 따라 나 있는 산간도로인 보은~화령장~상주에 이르는 도로와, 괴산~갈령~화령장~상주 도로의 합류지점으로 백두대간을 통과하여 상주로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그러나 국군은 이곳의 중요성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고, 따라서 병력도 배치하지 않았다. 이 점을 간파한 인민군은 이곳에 제15사단을 투입하여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화령장 주변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인민군 전령을 생포한 국군 제17연대가 적의 작전을 미리 파악하고, 화령 동쪽의 상곡리와 갈령 주변의 동관리에서 각각 매복작전을 펼친 끝에 남진하는 인민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이로써 백두대간 분수령을 넘어 상주 지역에서 국군 제2군단의 퇴로를 차단코자 했던 인민군의 의도는 저지되었고, 결국 개전 이후 계속 밀리기만 하던 국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최후의 낙동강 전선 구축에 6일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었다.(펌)

 

 

화령정 정자에서 내려다본 화령재 전경.

 

 

09:39 '화령정'에서 쉼을 하며 막바지 산행을 준비한다.

 

화령정에 걸려있는 '화령정 건립기'

 

화령정에서 모처럼 편안한 쉼을 하는 백두들.

 

 

 

 

 

09:53 화령정에서 20여분을 기다리니, 수청삼거리에서 괴산 방향으로 둘러보러(알바) 갔던 분들이 도착한다.

 

늦게 도착한 분들도 잠시 여유를 찾은 후,

 

 

09:59 화령재 인증을 남긴다.

 

 

10:00 화령재 도로를 건너 윤지미산 방향 들머리로 향하는 백두들.

 

화령재에 설치되어 있는 백두대간 안내판.

 

 

10:01 화령재에서 윤지미산 방향 들머리로 들어서는 백두들.

 

 

10:08 화령재에서 조그마한 봉우리를 하나 지나니, 우측으로 묘지가 나오며 서쪽 방향으로 조망이 트인다.

 

 

10:10 청원상주간 고속도로 터널(화서1터널) 위에서 바라본 서쪽 청원 방향.

 

 

10:16 옛날 대간길에서의 기억이 전혀 없는 임도에 내려선다.

지도를 확인하니 대간길은 건너편 봉우리로 올랐다가 다시 도로로 내려서서 좌측 능선으로 이어지는데, 임도 건너편으로는 등로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임도 좌측으로 표지기들이 한두 개 보이길래 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이동한다.

 

 

10:19 임도를 따라 좌측으로 200m쯤 진행하니, 좌측으로 신의터재 방향 이정표가 있는 들머리가 나온다.

 

 

10:26 조그마한 봉우리를 하나 지나니 최근에 조성된듯한 묘지가 나오고,

앞쪽으로 가야 할 윤지미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10:31 널찍한 수레길을 따르니, 능선 우측으로 밭이 나오며 화동면 판곡리 삽바골 방향으로 시야가 트인다.

 

밭 가장자리에 있는 이정표에는 윤지미산이 20분 거리로 가까워졌다고 알려준다.

 

 

10:43 급경사의 오름길을 오르는데, 등로 한켠에 이름 모를 버섯이 나란히 돋아나 있다.

나도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 가만히 머물면 좀 편할까...ㅋㅋ

 

 

10:59 윤지미산 정상에 도착한다.

 

윤지미산 정상의 이정표.

 

<윤지미산(538m)>

경북 상주시 내서면과 화서면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이름이 좀 특이하여 인터넷을 검색해 보아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어느 대간꾼의 산행기를 보니 윤지미산의 정확한 시기와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언제부터인가 윤지미산으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일부 설에 의하면 윤집걸중(允執乞中)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로, "인생전반을 다 안다", "세상을 포용한다", "세상을 두루 알아맞힌다"라는 의미를 가진 산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화동면 판곡리(板谷里) 마륜(말구리) 마을 북동쪽에 있는 산으로, 신의터재에서 화령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 11.3km 구간에서 주봉 역할을 하고 있는 산이며 화동면 판곡리와 내서면 서원리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산 이름의 유래에 대한 또다른 설은, ‘윤’은 판곡리 마륜(말구리)에서 유래했으며 ‘지’는 고개를 뜻하고 ‘미’는 산을 뜻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름과 마찬가지로 유래 또한 별나다는 느낌이다.

 

마륜(말구리)마을은 화동면 판곡리(板谷里)에 있는 마을로, 예전에는 관청의 말을 사육하던 곳이었으며 말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입주한 것이 이 마을의 시초라고 한다. 산골 마을이지만 큰 마을이었는데 판곡저수지를 만들면서 수몰되어 지금은 20여 호만 남아 있다고 한다.

 

윤지미산 정상에서 쉼을 하는 백두들.

 

먼저 도착한 분들은 방을 빼줘야 된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11:10 남은 백두들이 윤지미산 정상 인증을 하고 신의터재로 향한다.

 

 

11:22 이정목도 서 있기가 피곤했던지 등을 깔고 누워있다.

 

 

11:28 나는 신의터재로 가고 있는데, 이정표의 거리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귀신에 홀렸나..ㅉㅉ

 

 

11:58 고도차가 거의 없는 편안한 대간길이 이어지는데, 등로 한켠에서 갓 돋아난 상황버섯도 카메라에 담는다.

 

 

12:15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이정표이지만, 신의터재까지의 거리가 줄어 있다.

 

 

12:18 잣나무 조림지를 지난다.

 

 

12:24 자그마한 봉우리에 있는 이정표를 지나며, 좌측으로 휘어져 진행한다.

 

오랜 옛날의 우산처럼 보이는 버섯은 무슨 버섯?

답 : 갓버섯(식용, But 비슷한 모양의 흰독큰갓버섯은 독버섯임)

 

곁에 있는 이 친구는 위 사진 속 버섯의 아이들일까?

 

 

12:32 무지개산 갈림길에 도착한다.

 

<무지개산(441.4m)>

경북 상주시 내서면 어산리와 화동면 선교리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2등 삼각점이 있다. 산 근처에 무지개폭포가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라 하며, 무지개골은 개울을 뜻하는 묻이개골에서 변음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좀 더 그럴싸한 지명유래를 떠올렸었는데..ㅉㅉ

 

무지개산 갈림길에서 200m 떨어져 있다는 무지개산 정상을 다녀올까 잠깐 고민을 하다가, 산 정상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조망이 없다는 산행기를 읽은 기억이 나서, 그냥 신의터재로 향하는 대간길에 들어선다.

 

 

12:51 신의터재로 향하는 대간길은 그야말로 평지 수준의 편안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12:56 노간주나무 군락지라는 팻말을 지나고,

 

 

13:00 자그마한 봉우리 하나를 넘어서면,

 

 

13:01 대간길은 급하게 우측으로 휘어져 내려간다.

 

 

13:07 잠시 후 밭이 보이는 안부로 내려서는데, 우측은 막창골이고, 좌측은 맹맥이골이라 표시되어 있다.

 

최근에 내린 비로 등로 주변에서 많은 버섯들이 보인다.

모양은 그럴싸해 보이는데, 도대체 뭔 버섯인지?

 

이놈은 힘이 천하장사를 빰친다.

두텁게 쌓인 낙엽들을 들치고 올라왔다.

(독우산광대버섯인 듯한데.. 독버섯)

 

 

13:16 아무리 평탄한 중화지구의 대간길이지만, 산행이 길어지며 자그마한 봉우리 조차도 힘겹게 느껴진다.

 

이렇게 사면길로 우회하여 지나는 곳이 반갑기만 하다.

 

 

13:22 서어나무 군락지를 지나나.

 

'서어나무', 보기는 많이 본 나무인데 이름은 무척이나 생소하여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서나무라고도 하며 나무 이름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지만 서쪽에 있는 나무라는 뜻으로 추측된다. 주로 산지에서 자라며 흔하게 발견된다. 서어나무는 표고버섯 재배용 골목으로 사용하지만 참나무에 비해 생산량이 적으며 땔감용으로 많이 이용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13:30 그렇게 조금은 지겹기도 하고 지치기도 할 무렵에, 신의터재가 가까워졌다는 이정표를 만난다.

 

그래 예쁜 꽃들을 보며, 조금 더 힘을 내 보지 뭐!

 

 

13:41 이제 500m 남았다. 별로 신뢰가 가지 않던 이정표도 이제는 믿고 싶다!

 

 

13:45 산책길 같은 대간길이 이어지더니,

 

 

13:47 앞쪽으로 불쑥 신의터재가 나타난다.

 

신의터재 이정목에 거리 표시가 없으니, 신의터재에 도착한 것이다.

 

 

13:49 그렇게 신의터재에 도착하며, 또 대간길 한자락을 마감한다.

 

<신의터재(280m)>

상주시 화동면과 내서면을 잇는 2차선 도로가 지나고, 작은 공원형태의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쉼터 한켠에 세워진 커다란 정상석에는 '신의터재 해발 280m'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임란 이전에는 신은현(新恩峴)이라 불렀고, 임란 때 의사 김준신(金俊臣)이 이 재에서 의병을 모아 최초의 의병장으로 상주진에서 많은 왜병을 도륙하고, 임진년(1592년) 4월 25일 장렬하게 순절한 사실이 있은 후부터 '신의터재'라 불리었으나, 일제 때 민족정기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어산재'라 불리게 되었다가, 문민정부 수립 후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민족정기를 되찾고, 후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옛 이름인 '신의터재'로 다시 고치다"라고 적고 있다.

 

신의터재의 백두대간 안내판.

 

신의터재 인증은 정여사님께서 홀로!

 

 

'신의치정'에서 후미를 기다리며,

 

편안한 휴직을 즐기는 백두들.

 

더운 날씨에 오랫동안 백두들의 하산을 기다려온 애마!

 

다음구간 들머리.

 

백두대간과 신의터재 안내판.

 

신의터재 이정석이 요란하다.

 

 

14:04 다음구간 들머리에서 내려다본 신의터재 전경.

 

<의사 절곡 김준신 유적비(義士 節谷 金俊臣 遺蹟碑)>

신의터재는 임진왜란 초기 의병장 김준신이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해서, 이름 끝자를 따서 신의터재인 듯하다. 이번 구간 중간쯤의 화령재에는 화령장전적비가 있었는데, 이렇게 내륙 한가운데가 수많은 전쟁의 장이 되었다니 쉬이 믿기지를 않는다.

 

'신의터재 내력' 비문.

 

 

14:19 화령장에 있는 '화령장'에서 땀을 씻고,

 

 

14:51 인근 식당에서 산행에서 흘린 땀을 보상한다.

 

 

 

 

 

 

 

14:34 수박은 얼마나 단지 검사만!

 

뒤풀이를 마치고,

 

화령을 뒤로하고 서울로 향한다.

 

14:39 회장님이 식후 디저트로 제공한 예뻐서 감히 먹지 못한 복숭아!

 

평탄해 보이는 중화지구 대간 능선에서도,

우리의 삶을 지키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 있었음을

다시금 깨달으며 걸은 대간길이었다.

 

싸움을 불사할 의지가 있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