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한북정맥 05차(명덕삼거리~축석령) 경기도 포천시.
산 행 일 : 2016. 10. 22.(토)
산행코스 : 명덕삼거리~수원산~국사봉~큰넓고개~죽엽산~비득재~노고산~축석령
(거리 21km)
산행참가 : 20백두.
<산행코스>
추석을 지낸 후, 회사일로 산행을 두 번이나 빠지는 동안 백두들은 강원도 민둥산과 호남알프스 산행을 했다. 살아가면서 뭔가 우선순위를 정해야 할 때가 있는데, 반드시 해야 할 일과 안 하면 후회할 일에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 그러다 보면 하고 싶은 산행보다는 회사일에 우선순위가 옮겨가고, 가장 가까운 가족들의 일은 후순위로 처지게 되는데, 가족들을 살갑게 보살피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먼 훗날 후회하게 될 것 같다. 즉 근시일 내에 후회하는 게 우선이 되는 샘이다.
산행에 두어번 빠지는 사이에 어느덧 완연한 가을 산행으로 바뀌어 혹시 산행 중 비를 맞으면 어쩔까 하는 조바심을 내게 되는 시기인데, 이번 산행일에 비 예보가 있었으나 다행히 서울 이남지역에 조금 내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산행을 하루 앞둔 지난 목욜날 김용현 님의 모친께서 유명을 달리하였다는 부음을 듣게 되었고, 부득이 금욜날 산행길에 모두 함께 상문을 하기로 했다. 밤 11시 반에 양재를 출발한 버스는 빈소가 마련된 건대병원을 들러 비록 늦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상문을 하고, 새벽 1시를 넘겨 서울을 출발 명덕삼거리로 이동했다. 다행히 산행지가 멀지 않은 곳이라 버스에서 새우잠이나마 잘 수 있는 여유가 있었고, 새벽 4시 반에 기상하여 산행 준비를 시작한다.
잠시 산행 준비를 조금 지체하며 화장실 다녀오고 하는 사이에, 백두들은 모두 떠나고 빈 버스만 남아있다.
서둘러 기록사진만 남기고 나도 산행길에 나선다.
옛날, 정맥꾼들은 녹색의 화살표 방향으로 다녔으나, 최근 하늘색 화살표 방향으로 난 수레길을 따라 수원산으로 오른다. 나는 뒤에 남겨진 몇몇 분들과 옛길을 따라 들머리를 들어선다.
들머리를 들어서서 30m쯤 오르니, 위 사진의 하늘색 화살표 방향 들머리에서 올라오는 수레길과 만나 본격적인 수원산 오름길을 시작한다.
삼십여분 남짓 오름길을 치고 오르니 군부대 우회길이 나오고,
우회길을 두고 직진의 우측 능선길을 따르니 이내 수원산 정상에 자리한 군부대 철망이 앞을 가로막는다.
한북길은 좌틀하여 진행하면 되지만 수원산 정상을 들르기 위해 우틀하여 철망을 따라 수원산 정상으로 향한다.
잠시 후 군부대 정문으로 통하는 시멘트 도로에 올라서니 길 옆에 이상한 문구가 새겨진 돌비석이 놓여있다.
'통하라' 뭘 통하라는 건지?
시멘트 도로를 50m 정도 진행하면 좌측편에 정상으로 통하는 철계단 통로가 있다.
수원산 정상석이 있는 널찍한 공터에 도착하여 정상석을 카메라에 담는다.
<수원산(水原山, 697m)>
운악산으로부터 연봉되는 포천의 진산으로, 포천천 본류로 서류하는 수원(물이 처음 시작되는 곳)의 근간이 되는 넓은 산이다. 수원산은 하천의 발원지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남쪽에서 발원한 수원은 왕숙천(남양주시, 구리시를 거쳐 한강 유입), 북쪽과 서쪽에서 발원한 수원은 포천천(포천시를 관통, 영평천으로 바뀌어 한탄강 유입), 동쪽에서 발원한 수원은 조종천(가평을 거쳐 북한강으로 유입)이다.
수원산(水源山)은 이 부근 모든 개울물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수원시와 발음이 같아서 이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예전에 수원사람들은 수원산이 여기에 있는 것은 자기네가 포천에 산을 빌려줬기 때문이라고 하여 매년 포천에 와서 세금을 받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총명한 군수가 새로 부임을 하여 그 내력을 듣고는 세금을 주지 않을 방도를 강구한 것이다. 그 해에도 어김없이 세금을 받으러 온 수원사람들에게 신임군수는 ‘이제는 산이 필요 없으니 가져 가시요’라고 했단다. 이 재치 있는 말 한마디에 할 말을 잃은 수원 사람들은 코를 움켜쥔 채 달아나서 그 후엔 세금을 받으러 오지 않게 됐다고 한다.
수원산 정상에서의 조망이 좋다고 하여 올랐으나 인근의 시가지 불빛만이 보일 뿐, 아직은 온천지를 어둠이 덮고 있고, 가야 할 국사봉 방향을 담았는데 분간이 안 된다.
포천시 야경만 담고 수원산 정상을 뒤로한다.
모두들 국사봉 방향으로 가셨는 줄 알았는데, 뒤에서 오던 몇몇 분들이 나의 랜턴 불빛을 보고 군부대 정문까지 쫒아 왔다. 정상에 보이는 게 없이니 돌아가자고 하며 함께 갈림길로 돌아나와, 국사봉 방향으로 한북정맥길을 이어간다.
국사봉까지 6km 남짓의 능선길은 고도의 편차가 거의 없는 편안한 등로가 이어진다.
오래된 임도를 만나서 약수터 정상 방향으로 진행하고,
우측 아래로 골프장 불빛이 내려다 보이더니,
705봉 약수터 갈림길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정맥꾼들은 약수터정상 방향으로 알바를 많이 하는 곳인데, 한북정맥은 좌측 내촌 방향으로 이어진다.
억새가 아름다운 헬기장을 지나고,
자그마한 무명봉을 오르며 돌아본 수원산 방향.
편안한 능선길을 터벅터벅 걷는 사이에 동쪽 하늘이 밝아 오며,
언제 보아도 가슴 찡한 일출! 오늘은 수원산에서 맞이한다.
암봉을 우회하니 불정산이라는 암봉 정상으로 오르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정상에서의 조망이 좋다고 하여 암봉으로 오른다.
불정산(641m) 정상 전경.
북쪽 수원산과 운악산 방향.
가야 할 국사봉과 죽엽산 방향을 배경으로.
주금산 자락에 자리한 채석장이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며 산을 갉아먹고 있다.
죽엽산 너머로 수락산과 도봉산의 모습도 희미하게 보인다.
포천 왕방산 방향도 담는다.
암봉을 뒤로하고 완만한 능선을 따라 #58 송전탑 아래 전망대에 도착하니 시원한 조망이 펼쳐진다.
동쪽 신팔리 방향.
동남쪽 주금산 자락에 자리한 베어스타운 스키장과 왕숙천변에 자리한 팔야리도 보이고,
그 너머로 철마산과 천마산도 희미하다.
<왕숙천과 팔야리>
왕숙천은 포천군 내촌면 신팔리 수원산 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흘러 남양주시 진접읍을 지나 진건면과 퇴계원을 거쳐 구리시 토평동과 남양주시 수석동 사이에서 한강에 흘러드는 한강의 지류로, 길이는 38.5㎞다.
조선초 왕자의 난으로 함흥으로 떠났던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함께 한양으로 환궁하던 중에, 지금의 진접면 팔야리에서 8일을 머물렀다고 해서 이 마을을 팔야리(八夜里)라 부르게 되었고, 이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을 '왕이 자고 갔다'라는 뜻으로 왕숙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설에 따르면, 세조를 광릉에 안장한 후 '선왕이 깊이 잠들다'라는 뜻에서 왕숙천이라 명명했다고도 전하며,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에는 '왕산천'(王山川)이라 표기되어 있다.(포천시)
가야 할 국사봉 방향.
동북쪽 운악산과 대금산 방향.
송전탑 아래 전망바위에서의 조망을 뒤로하고, 국사봉을 향한 정맥길을 재촉하니,
자연스럽게 자라난 모습이 물들기 시작하는 단풍과 조화를 이루는 멋진 소나무도 지나고,
어느새 붉게 물든 단풍이 계절의 바뀜을 실감케 하는 한북정맥 등로를 이어간다.
국사봉 직전 헬기장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백두들이 아침식사를 마치고 국사봉을 향하고 있다.
내가 속한 후미팀도 선두들이 내어 준 헬기장에서 서둘러 아침식사를 시작한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국사봉 정상에서 인증을 남긴다.
<국사봉(國師峰, 546.9m)>
국사봉(國師峰)이란, 한나라의 스승으로 또는 신라와 고려때는 불교(佛敎)에서 최고의 직위에 있던 승려(僧侶)를 칭하였고, 우리나라에 같은 산이름(山名)만도 25개나 있다고 한다. 아마 백운산 다음으로 많은 지명인 것 같다. 정상에는 국사봉이라 쓴 표지목이 한북정맥 이정목에 걸려있고, 또 그 옆에는 국사봉이라고 한글로 쓴 표시석이 세워져 있다.
국사봉 아래에서 바라본, 잠시 후 이어갈 죽엽산 방향 조망.
오랜만에 참석한 천보 형님도 뭐가 재밌는지,
오늘 후미는 비득재까지만 가겠다고 하기에, 여기서 후미와 이별하고 선두를 따라잡으러 발걸음을 서두른다.
좌측 아래로 대규모 채석장이 내려다 보인다.
등로 좌측으로 철망을 둘러놓았으나, 정맥이 상처를 입고 있는 모습에 마음은 안전하지 못함을 느낀다.
커다란 괴목이 '한북정맥길은 내가 지킬게!'라고 속삭이는 듯하고,
급경사가 완만해지면서 호젓한 소나무 숲길이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며,
작은 수레길을 만나 우측으로 수레길을 따르고,
능선을 따르던 등로가 사면길로 접어드는가 싶더니,
이내 '육사생도 참전기념비'에 도착한다.
육사생도 참전기념비.
어린 나이에 전쟁의 포화 속으로 온 몸을 내던진 젊은이들을 위해, 잠시 고개를 숙인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장차 민족의 명운을 지고 갈 어린 학생을 참전케 한 것이 과연 잘한 일일까!
기념비 앞 하늘은 밝은데, 내 마음에 드리워지는 어두운 그림자는 어찌 해 볼 수가 없다.
비록 잘못된 역사 일지라도 우리가 안고 보듬어야 할 우리의 역사다.
87번 국도가 지나는 큰넉고개 통과 방법을 가늠해 보고,
큰넉고개 옛길로 내려선다.
좌측은 진목4리 교차로를 통해 87번 국도를 건너는 길인데 1km쯤 우회해야 하는 길이어서,
나는 우틀하여 고개마루로 이동하여 무단횡단하는 방법을 택한다.
혼자이고 시간을 절약해야 하니까 잠시 범법자가 되기를 자처할 밖에는!
'육사생도 참전 기념비' 앞에서 우틀하여 도로를 따라 진행하면,
우측에 돌로 된 극동금속 표지석이 보이는 고갯마루쯤에 서게 되고,
극동금속 표지석 맞은편 수레길로 좌틀하여 들어서면,
넓은 묵밭이 나오는데,
밭에서 일하던 아주머니가 '길이 없어서 조금 전에도 여러 사람이 왔다가 돌아갔다'며 돌아가라 소리친다.
나는 그래도 가보겠다고 우기며, 묵밭 가장자리를 따라 이동하여 공장 뒷마당으로 내려서고,
건너편 축대 가장자리를 넘어 다시 올라간다.
그렇게 언덕길을 10여 미터 올라서면,
앞쪽으로 87번 국도변의 주유소가 보인다.
아무리 산행기를 읽고 또 읽어도 모호하기만 하던 구간을 통과하는 순간이다.
공터를 지나, 주유소 옆으로 87번 국도변으로 나와, 차량이 뜸한 틈을 타서 무단횡단을 한다.
범법자의 처지는 이로서 끝!
돌아본 87번 국도 큰넉고개.
<큰넉고개>
큰넉고개는 포천시 가산면과 내촌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인데, 남북으로 완만하게 경사진 이 고개는 50여 리나 된다. 고개 마루턱에 올라서 보면, 전후좌우가 탁 트여 광활한 구릉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크고 넓은 지형이라 하여 ‘큰넉고개’라 부른다고 한다.(포천시)
큰넉고개 죽엽산 방향 들머리는 주유소에서 포천 방향 50m 지점에 있다.
돌아본 남쪽 진목교차로 방향.
들머리에 들어서면 이내 묘지가 나오고, 묘지에서 돌아본 국사봉과 수원산 능선 방향이 시원스레 조망된다.
북동쪽 지붕산과 수원산 방향.
잠시 후 다시 묘지가 나오며 뒤편 숲으로 들어서서 조금 오르면,
이내 능선 봉우리에 올라서게 되는데,
소나무 숲으로 둘러져 있어서 주변 지형 파악이 어렵고 등로도 이리저리 얽혀 있어서 한북정맥 능선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찾기가 어렵다. 우측 청색 화살표 방향은 북동쪽 금현리 방향으로 가게 되고, 한북길은 좌측으로 가야 한다. 뒤에 오던 백두들은 금현리 방향으로 30여분 알바를 다녀왔다고 한다.
봉우리에서 최대한 좌측의 능선으로 들어서면 뚜렷한 능선길이 이어지며,
잠시 전, 큰넉고개에서 보았던 주유소 뒤편 건물이 좌측으로 내려다 보이고,
좌측 국사봉 방향으로 지나온 한북능선도 가늠된다.
잠시 후 주유소 옆에서 오르는 수레길과 만나는 갈림길을 지나면,
우측 절개지 아래로 포천시 가산면 정금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좌전방으로는 가야 할 죽엽산이 가늠되며,
좌측 내촌면 진목리 방향으로 조망이 트인다.
작은넉고개로 내려서는데, 우측 인가 마당에 수도가 보인다.
아마도 여름철 물이 부족하면 이곳에서 얻을 수도 있겠다.
작은넉고개에서 본 우측 왕방산 방향.
작은넉고개를 건너 죽엽산 오름길로 들어서면,
최근에 파헤친 듯한 절개지로 오르게 되고,
우측으로 북쪽 포천시 방향 조망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잠시 후 한북길은 좌틀하여 진행하게 되고,
벌목지대를 만나면 지나온 수원산과 국사봉 방향이 시원스레 조망되며,
한북길은 벌목지대 가운데 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죽엽산 정상을 향한다.
포천시 방향.
지진이 있었던 듯 주변에는 땅이 몇 갈래로 갈라져 있고,
높지 않은 바위 절벽 윗부분에 말벌집이 관찰된다.
올해도 산행을 하면서 몇몇 백두들이 벌에 쏘여서 고생한 일이 있었은데, 늘 조심해야겠다.
걸음의 속도를 조금 높이며 죽엽산을 오르는데,
앞서간 몇 분이 가을낙엽 위에서 쉼을 하다가 함께 죽엽산을 오른다.
죽엽산의 단풍에 석여사님도,
여러 색깔로 그려진 그림 앞에서 2016년 가을의 추억을 남긴다.
광릉수목원 출입금지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철조망 울타리 흔적도 보인다.
<광릉수목원(光陵樹木園)>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수목원인 광릉수목원은 산림청에 딸린 임업연구원 부속기관으로,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직동리의 광릉 주변 약 500ha(150만 평)에 자리잡고 있다. '광릉'은 세조의 능으로 조선시대 세조의 묘지로 결정된 뒤부터 소나무·잣나무·전나무 등을 심어왔으며, 엄격하게 보호되어 왔다. 한일합병 뒤 1922년 임업연구원의 전신인 임업시험장이 생기면서 이곳은 임업시험장의 부속시험림이 되어 광릉수목원으로 개원했으며, 1989년에 산림욕장이 개장되었고, 1991년 야생동물원을 만들었다. 1987년 광릉수목원으로 개원하면서 일반인에게 공개되어 공원이나 휴식공간 또는 산림욕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2,800여 종류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으며, 1,600여 종류의 동물들이 산다. 이들 중에는 광릉물푸레·광릉개고사리·광릉용수염풀·광릉골무꽃·광릉요강꽃 등과 같이 우리나라에서도 오직 광릉숲에서만 자라는 식물들도 있고, 외국에서 들어온 식물들도 900여 종류에 이른다.
광릉 수목원이 국립 수목원으로 바뀐 모양이다. 근데 이곳부터는 독도에 유의해야 하고 지도를 자주 봐야 할 것 같다. 수목을 보호한다고 표지기도 없애 놓았고, 이정표도 없다. 정맥꾼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다 제거해 버린 모양이다. 진정 숲을 보호하고 자연을 지키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쭉쭉 자라고 있는 소나무숲이 가을 단풍과 묘한 조화를 이루며 우리의 마음을 편안케 한다.
통나무 의자가 있는 쉼터에서 과일도 나누고,
단풍 든 호젓한 죽엽산을 만끽하며 걷는다.
쓰러진 나무를 넘기도 하고,
단풍 그림을 배경으로 서 있는 노송 앞에서 포즈도 취해 보며,
가을 단풍 숲으로 젖어든다.
죽엽산 정상 증명.
아마도 수목원에서 정상석 설치를 반대해서 그런지, 그 흔한 정상석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죽엽산(竹葉山)>
대동여지도에는 죽엽산이 아닌 주엽산(注葉山)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곳에는 대나무는 흔적도 없다. 요즘은 서울 근교에도 기온 상승으로 인해 대나무가 심심찮게 보이지만, 옛날에는 날씨가 추운 탓에 충청도 이북에는 대나무가 거의 없었다. 나뭇잎이 물 흐르듯이 많다고 하여 주엽산이라고 했는데, 어떤 연유로 죽엽산으로 바뀌었는지 알 수가 없다.
죽엽산 정상을 뒤로하니 등로는 잘 자란 미인송들 사이로 이어지고,
이내 임도를 만나는데, 임도 절개지가 가파르므로 우측으로 돌아내려오는 게 좋을 듯하다.
이제 수목원을 벗어나는 모양인지, 경고판을 다시 만난다.
송전탑을 만나 가야 할 노고산 방향을 가늠해 보고,
갈림길을 만나 우측의 능선길을 고집한다.
좁은 수레길을 만나 건너편 등로로 들어서면,
이내 깨끗하게 조성된 묘지 위에 서게 된다.
묘지에서 지나온 죽엽산 정상을 돌아보고,
이리저리 얽힌 등로에서 능선을 고집하다 보면,
비득재에 도착한다.
<비득재(鳩峴)>
비득재의 좌.우로 노고산과 죽엽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비둘기를 닮았다 해서 비득재라 이름 붙여졌다고 하며, 그래서 한자로 비득재를 '비둘기 鳩'字를 써서 구현(鳩峴)이라 한다.
오늘 산행에서 후미를 형성한 분들은 이곳 비득재에서 산행을 마치기로 예정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한 버스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그런 듯하다. 연락을 해 볼까 하다가, 뒤에 오시는 손 총무님이 알아서 할 것으로 믿고 노고산으로 향한다.
비득재 날머리.
비득재 들머리.
조만간 확장 공사를 할 모양인지 노고산 방향으로 가림막이 둘러져 있다.
노고산 방향 들머리로 들어서며 내려다본 비득재.
노고산 오름길 등로도 뚜렷하게 이어진다.
돌아본 죽엽산.
고모리 산성의 흔적인듯한 돌무더기를 지나 오르면,
유구한 세월의 흔적을 기록한 바위를 만나고,
조금 가팔라지는 등로를 오르면 세월의 흔적이 새겨진 바위도 만난다.
통신탑이 설치되어 있는 노고산 정상 도착.
노고산 정상 인증을 남길 분이 없어서, 배낭에 카메라를 두고 셀프로 인증을 남긴다.
<노고산(380m)>
노고산 정상은 우측 숲 속의 바위 인듯하고, 정상부의 주변 잡초가 제거된 이동통신 송신탑 울타리에 '노고산 380m'라 적인 팻말이 걸려 있다. 노고산 정상부에 자리한 포천군 향토유적 제43호인 고모리 산성은 해발 380m 정상부에 위치하며, 둘레 822m, 면적 36,418㎡인 삼국시대 토.석성으로, 백제와 고구려의 상호관계를 밝히는데 있어 중요한 문화재라고 한다. 노고(老姑)라면 할머니를 뜻하는 것인데 지명유래를 찾기가 힘들다.
우측의 조그만 바위(노고산 정상)에 올랐지만 주변의 나무들로 별다른 조망이 없어서, 서둘러 축석령을 향한다.
고모리 산성 안내판.
<고모리 산성(경기 유형문화재 185호)>
포천 고모리 고모산(古毛山, 386.5m, 일명 老姑山)의 정상부에 축조된 테뫼식 산성으로, 이 산성에 대해서는 지리지 등에 전혀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그동안 지명의 유사함을 들어 ‘광개토대왕비’와 ‘중원고구려비’의 비문에 나타나는 ‘고모루성’으로 비정하려는 견해가 있어 주목을 받아왔던 곳이다.
고모산 정상부에 형성된 평탄대지를 감싸고 있는 내성과 서쪽에 외성이 결합된 형태의 성으로, 대부분 토축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지형에 따라 일부 구간에 석축과 토석혼축 기법을 혼용하였다. 산성의 둘레는 내성 967m, 외성 240m이며, 전체 둘레는 1,207m이다. 성 안 시설물은 문지 1개소, 건물지 7개소(내성 6, 외성 1), 우물지 1개소 등이 확인되었다. 성벽은 남쪽에 솟은 정상부(해발 386.5m)의 봉우리와, 북쪽 봉우리(해발 380.1m)를 중심으로 하여 서벽은 봉우리를 연결하는 가지능선 상에 축조하였으며, 동벽은 봉우리 사이에 형성된 계곡부의 상단면에 축조하였다. 서벽은 무봉리, 이곡리 일대 방향으로 대부분 삭토에 의한 토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축조 방법은 외벽은 경사면을 거의 직각으로 삭토하고, 상면에 내벽을 성토하여 토루를 조성하였다. 북벽은 고모리 저수지 방향으로 멀리 포천평야 일대와 포천읍에 소재한 반월산성이 조망이 된다. 유적이 위치한 곳은 경기북부인 포천의 남동편에 해당된다. 북쪽으로는 한탄강의 지류하천인 포천천을 중심으로 발달한 포천 일대의 평야 지대와 낮은 구릉이 드넓게 펼쳐지고, 멀리 시야가 확보되고 있다. 따라서 남진 세력이 이곳 일대를 점거하지 못하고 한강 방향으로 진출하였을 때는 쉽게 배후를 차단할 수 있어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덤불 터널을 지나니,
또 고모리 산성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오니 쉬어가기 좋을 바위가 나온다.
조금 서둘러 걸었더니 종아리 근육이 뭉치는 느낌이 들어 파스를 한장 붙이고 출발한다.
묘지를 지나니, 포천시 소흘읍에서 이곡리로 넘어가는 도로가 나온다.
도로를 건너,
절개지 사면으로 들어서는데, 이정표에는 축석령까지 아직도 4.64km 남았다고 표시되어 있다.
좌측 소홀읍 이곡리 방향.
돌아본 노고산 방향.
시간 여유가 없는 듯하여 밴치가 있는 쉼터도 그냥 지나치고,
갈림길을 만나, 직진의 거친봉이 방향으로 진행한다.
갈림길에서 좀 더 뚜렷한 좌측 길로 들어서고,
산행기에서 알바를 많이 한다는 청색 화살표의 직진 능선 방향을 두고 급우틀하여 진행하면,
잠시 후, 평평한 봉우리에서 좌틀하게 되고,
산행기에서 보았던 몇 기의 묘지가 있는 곳으로 나오게 되는데,
이곳 천주교공원묘원에서 정맥길은 우측의 산으로 이어질 듯 보이지만,
한북길은 좌측 방향 공원묘원 정상부를 따라 이어진다.
돌아본 죽엽산 방향.
우측 소흘읍 방향.
한북길은 묘원 정상부를 따라 정면으로 보이는 군부대 초소로 이어져,
군부대 철책을 따라 진행하게 된다.
정맥꾼들의 발자국이 희미해질 때쯤이면 어김없이 표지기가 나타나고,
이정표도 세워져 있어서 홀로 걷는 정맥꾼의 불안한 마음을 씻어 준다.
잠시 철책을 벗어나는가 했더니,
이내 철책으로 붙들려 오고,
따르던 철책이 평범한 울타리로 바뀌며 울타리 너머로 염소와 칠면조 등이 보이고,
원형 철조망 너머로 원두막들도 보이며,
나름 유명하다는 '삐노꼴레'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자리하고 있는 다름재로 내려선다.
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이동하여 다름재 고갯마루를 지나 우측으로 조금 더 이동하면,
'대연농원' 표지석 뒤쪽으로 들머리가 있다.
다름재 절개지를 오르며 내려다본 다름재 모습.
등로는 대연농원 밥집 울타리를 따라 이어지다가,
좌측 마을로 내려가는 길과 만나는 T자 삼거리를 지나는데,
지나온 노고산과 죽엽산 방향으로 시야가 트인다.
도로를 따라 조금 진행하면 갈림길을 만나 좌측 산길로 들어서서 오르면,
정수장 시설쯤으로 보이는 철망 울타리가 앞을 막고 서는데 울타리를 따라 좌측으로 진행한다.
정수장 건너편으로 와서 돌아본 노고산 방향.
원형철조망과 철조망 울타리가 번갈아 나오는 부대 울타리를 따라 진행하다 보면,
이런 골짜기로 내려서게 되는데, 건너편 노란색 출입금지 표시를 넘어 올라가야 한다.
언덕을 올라서면 절개지 꼭대기에 서게 되는데, 우측으로 축석검문소로 이어진 도로가 내려다 보인다.
이곳에서 아래로 보이는 공장 정문으로 이동하여 길을 따라 축석검문소까지 가도 되지만,
다시 숲길로 들어서서 조금 진행하면, T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우측은 도로로 바로 내려서는 길이고, 희미한 좌측 길은 귀락터널 위로 이어지는 한북정맥길이다.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내려서면 바로 동물이동통로(귀락터널) 위에 서게 된다.
동물이동통로 위에서 본 축석검문소 방향.
동물이동통로를 지나 우틀하여 내려서면 바로 도로로 내려서게 된다.
지나온 동물이동통로(귀락터널).
<귀락터널>
귀락은 포천시 소흘면과 경계를 이루는 의정부시 자일동의 최북단(最北端) 마을로, 조선 영조(英祖) 중엽 박해문(朴海文)이라는 사람이 평안도 도사(平安道 都事)를 지내다가 이곳에 와서 마을을 개척하여 살면서, 산수가 아름다운 이 곳에서의 삶을 늘 만족하게 생각하며 살았다. 하루는 그의 가노(家奴)들이 마을 이름이 없어서 불편함을 털어놓고 이름을 지어 줄 것을 간청하자, "내가 이곳에 돌아와서(歸鄕) 여생을 즐겁게 지낸다(樂業)"라고 말하면서, 마을 이름을 '귀락'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설에 따르면, 이곳의 지형(地形)이 거북이가 떨어진 것과 같아서 귀락(龜落)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그냥 도로를 따라가도 되지만, 숲길을 따라 한북길을 고수하고자 길가 숲으로 들어서서,
이런 허름한 방갈로도 지나고,
도로 옆 절개지 위로도 걷다 보면,
철봉 아래로 통과하기도 한다.
축석령 거리 표시가 없는 것으로 보아,
금방 축석령 고개로 내려선다.
<축석령(축석삼거리)>
축석령은 천보산(天寶山) 기슭에 있는 고개로, 포천군 소흘면(蔬屹面)과 경계를 이루며 의정부시 북쪽 관문이 된다. 일명 이백리 고개라고도 하는데, 이 고개를 분수령으로 하여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포천천을 거쳐 한탄강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중랑천을 거쳐 한강에 이르므로, 철원과 서울까지의 거리가 2백리가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축석령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지금으로부터 3백여년 전 포천 어룡리에 오백주(吳伯周)라는 효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가 귀성도호사(龜城都護使)로 있을 때, 고향에 계신 부친이 병환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벼슬을 버린 채 고향에 돌아와 부친의 병간호를 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약도 차도가 없어 하늘을 탓하며 탄식만 하고 있는데, 꿈에서 산신령이 크게 꾸짖으며 "네 아비의 병은 석밀(石蜜)을 먹으면 낫는데 게으름만 피우고 있느냐"하고 호령하자, 그는 석밀을 구하기 위해 정과 망치를 들고 온 산을 헤매다가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가 "내가 죽으면 부친을 누가 돌보단 말인가"하며 통곡하자, 호랑이는 간데없고 바위만 남아 바위틈에서 석밀이 흘러나왔다. 이에 부친의 병이 나으니, 사람들이 오백주의 효성에 산신령이 가호를 베풀어 바위를 호랑이로 변신시켰다고 하여 그 바위를 범바위라고 불렸으며, 그 후 오백주가 매년 이 바위에 와서 고사를 지내고 만수무강을 축원하였다 하여 축석령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돌아본 축석령 날머리.
포천시 방향.
의정부 방향.
다음번 들머리가 있는 축석교회 앞에 주차된 애마로 이동하여,
한북정맥 다섯 번째 산행을 마감한다.
포천시로 이동하여 목감을 하고는 시내에 있는 두부요리 식당에서,
시장을 반찬으로 늦은 점심을 한다.
행복하게~~~!
손 지점장을 비롯한 모처럼 모습을 보인 분들과 함께,
마음껏 먹고 마신다.
이런 기억은 당근 없다.!!!
모처럼 산행에서 올가을 단풍을 보았다.
한동안 산행을 않았던 탓에 무릎이 시큰거린다.
아마도 홀로 떨어져 서둘러 걸음을 떼다 보니 그리 되는 것 같다.
먼 거리는 가급적 천천히 이동하여 충격을 줄여야만,
오래도록 산행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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