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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한북(오두)기맥 1차 (분기점~오산리고개) : 산길을 힘들게 하는 것은 높이보다 나뭇가지와 덩쿨!

by 재희다 2020. 12. 8.

산 행 지 : 한북기맥(오두지맥) 1차(분기점~오산리고개), 경기도 양주시, 고양시, 파주시.

산 행 일 : 2020. 12. 12.(토)

산행코스 : 고비골고개(여행스케치) ~ 챌봉 +오두지맥 분기점 ~ 말머리고개 ~ 말머리상봉 ~ 봉화봉 ~ 형제봉 갈림길

               ~ 고령산/앵무봉 ~ 보광사 ~ 됫박고개 ~ 박달산 ~ 매봉 ~ 오산리고개

               (26km, 9시간 소요)

산행참가 : 5백두.

 

<산행지도>

 

<한북기맥(漢北岐脈)/오두지맥(烏頭枝脈)>

조선 후기 실학자 여남 신경준 (1712~1781)이 썼다는 <산경표>의 1대간 1정간 13정맥 분류 중, 백두대간 상의 추가령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남한 지역 수피령에서 광덕산, 국망봉, 운악산, 임꺽정봉, 사패산, 서울의 도봉산 등을 거쳐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교하의 장명산을 끝으로 곡릉천에서 그 맥을 다하는 '한북정맥'이라 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한강봉에 이르러 그 산줄기가 도봉산으로 내려가지 않고, 한강봉과 챌봉 사이의 능선 분기점에서 서진하여 한강과 임진강의 경계를 이루는 파주의 오두산(통일전망대)에서 그 맥을 다하는 산줄기가 진정한 한북정맥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어(신 산경표 저자:박성태), 많은 선답자들이 새롭게 정립된 이 마루금을 따라 종주를 하고 이 맥길이 새로운 한북정맥이라 주장을 하는 사람도 생겨나게 되었다.
아직까지 명확한 정맥 분류 체계가 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잘못된 점은 바로잡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명산인 한양의 도봉산과 북한산을 편입하기 위해 잘못된 분류를 하였다고 옛 선인들이 분류한 정맥 분류 체계를 정확한 연구조사나 이를 증명할 만한 다른 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뒤집는다는 것도 약간은 무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한북정맥이란 산줄기(수피령~장명산)는 산경표를 따르고, 새로운 44km의 산줄기(한강봉~오두산)는 선답자들이 이름 붙인 오두지맥, 한북기맥, 또는 한북오두지맥 중 하나로 통일하여 재정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이같이 산경표의 정맥 분류 체계에 이의가 재기된 산줄기가 한북정맥뿐만 아니라 낙남정맥, 금북정맥 등도 있다.

 

<한북기맥/오두지맥 개략도>

 

 

 

코로나19로 온 나라가 멈추어 서면서 백두들의 산행도 중단이 되었기에 근교의 산행지를 찾다가, 몇 해 전 한북정맥 길에서 보았던 한북기맥/오두지맥을 걸어보기로 한다. 현재 백두들이 진행하고 있는 9기맥에 예정된 기맥이기는 하지만, 서울에 가까이 있고 기맥능선이 뚜렷하지 않은 곳이 많으며, 그나마도 공장이나 축사가 점령하고 있어서 무박산행지로는 그리 좋은 산행지가 아니다. 또한, 최근의 백두들은 힘들고 거친 길을 기피하는 경향이 뚜렷하여, 그져 거칠고 힘들기만 하며 별반 볼거리도 없는 기맥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려고 몇몇 산행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어 보이는 분에게 연락을 드려 함께 한북기맥 종주에 나선다.

 

산행 들머리로 예정한 고비골고개로 접근하는 방법은 의정부역이나 구파발역에서 버스로 이동하면 되는데, 버스로 이동하는데는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관계로 이동거리가 짧은 의정부역에 모여 해장국으로 몸을 녹이고 택시로 이동하려 하였으나, 모두들 아침식사를 않는다고 하여 각자 편리한 데로 구파발역과 의정부역으로 가서 산행들머리로 예정한 고비골고개 여행스케치 카페 앞에서 8시쯤에 만나기로 했다.

 

 

의정부역에서 택시를 타고 고비골고개의 여행스케치 카페 앞에 도착하니,

아직 구파발역에서 오는 분들은 도착을 않은 상태다.

 

<고비골고개 여행스케치>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의 고개에 있는 '여행스케치'라는 레스토랑은 오두지맥을 걷는 산꾼들에게는 산행을 시작하는 들머리로 많이 이용되는 지점이다. 말머리재로 향하는 고개에서 우측 여행스케치라는 레스토랑 정문 계단으로 올라서, 좌측으로 접어들면 챌봉으로 오르는 이정표와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여행스케치 카페 앞에서 보는 도봉산 오봉능선과 북한산 상장능선이 우이령을 사이에 두고 멋지게 조망된다.

 

 

역시나 약속시간에는 철저한 백두들이 구파발역에서 버스를 타고 고개 아래 정류장에서 내려서는 잰걸음으로 도착하여, 우이령 방향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남기고는 한강기맥(오두지맥) 산행에 나선다.

 

 

여행스케치 정문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을 오르다가 좌측으로 이정표가 나오며 챌봉으로 오르는 들머리가 있는데,

혹여 카페에서 손님으로 알고 문을 열고 나와서 인시를 할까 봐 잠시 주저되기도 한다.

 

 

들머리에서 산길을 따라 10여분 오르면 말머리고개에서 이어온 임도가 나오는데,

임도 우측 5m 지점에 챌봉으로 오르는 들머리가 있다.

 

 

챌봉 오름길은 임도 수준의 널찍한 능선길에 밧줄이 매여져 있을 정도로 급경사이고,

 

바닥에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어서 여간 미끄러운 게 아니다.

 

 

한북정맥에 자리한 챌봉 정상에 오르니, 제법 너른 공터에 산불감시카메라탑이 세워져 있고,

 

챌봉이라 씌여진 자연석이 작은 돌탑 위에 얹혀 있다.

 

<첼봉(516m)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있는 봉우리로 한북정맥길에 있다. 정상에는 무인산불감시 카메라가 있고 헬기장이 있다. 이곳에 서면 서울의 진산인 북한산과 도봉산이 한눈에 보인다. 4년 전 한북정맥길에서도 12월 둘째주에 챌봉을 올랐는데, 오늘도 12월 둘째주에 오르게 되었으니 우연치고는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든다.

홍복마을에서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제일 높은 봉우리가 첼봉이다. 백석읍 기산리, 장흥면 석현리, 부곡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제일 높은 봉우리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제일봉'이라고도 한다. '챌봉' 참으로 생소하고 이질적인 이름인데, 우리나라 고지도에는 차일봉(遮日峰)으로 표시되어 있다. '차일'은 햇볕을 가릴 때 쓰는 천막으로, '차일'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챌'로 음운변화되었다고 하는 설과, 산의 모양이 채로 친듯한 모양이라 하여 챌봉이라 부른다는 설도 있다.

 

가파른 오름길에 두텁게 껴입었던 외투를 벗으며 따뜻한 모닝커피를 나누고는,

 

 

한북기맥 분기점을 향해 챌봉을 뒤로하니,

 

전방 나뭇가지 사이로 한강봉이 가늠되고,

 

 

급경사를 내려서서는 앙상한 나무들이 빼곡한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니,

 

 

한북기맥/오두지맥 분기점에 도착한다.

 

<한북기맥/오두지맥 분기점>
한북정맥 한강봉과 첼봉 사이에 위치한 분기점에는 예전에는 한강봉산사랑산악회에서 설치한 이정표와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작은 나뭇가지에 '오두지맥분기점' 코팅지만이 걸려있을 뿐이다. 이제 이곳 분기점에서 한북정맥의 끝을 장명산으로 하는 게 맞는지, 아니면 임진강과 좀 더 가까운 오두산으로 정하는 게 맞는지를 느껴보려 오두지맥이라 불리는 능선을 따라 걸어보려 한다.

 

오두지맥 분기점 인증.

 

 

 

오두지맥 능선으로 접어드니 앞쪽 나뭇가지 사이로 말머리고개 건너편의 연수원 건물이 보이고,

 

 

이내 꾀꼬리봉 갈림길에 도착하여,

우측 100여 미터 거리의 꾀꼬리봉을 다녀오기로 한다.

 

 

꾀꼬리봉 정상에 꾀꼬리는 없다!

 

<꾀꼬리봉(498m)>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북쪽 말거리고개의 동쪽에 있으며, 한강봉에서 꾀꼬리봉을 통과해 보광사(普光寺)에서 끝나는 등산 코스가 개설되어 있다. 꾀꼬리봉에서 서쪽으로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백석읍 기산리, 파주시 광탄면,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에 걸쳐 있는 산에 명칭이 비슷한 앵무봉이 있어 사람들이 꾀꼬리봉과 앵무봉을 다소 혼동하는 경우도 있다.
현지 주민들 사이에서 꾀꼬리봉은 꾀꼬리처럼 생긴 봉우리 또는 꾀꼬리처럼 아름답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 오고 있으나, 고깔봉에서 꾀깔봉을 거쳐 다시 꾀꼬리봉으로 변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즉, 고깔 모양으로 생긴 봉우리라는 이름이 지금의 꾀꼬리봉으로 바뀌었을 수도 있다.

 

 

말머리고개 직전 조망처에서 본 좌측 장흥유원지 방향으로 잠시 전에 지나온 챌봉이 우뚝하고,

 

우측 기산리 방향으로는 기산저수지 북쪽에 자리한 팔일봉이 조망된다.

 

 

2차선의 39번 국지도가 지나는 말머리고개에 도착하여,

기맥 능선을 차지한 연수원을 좌회하는 좌측 임도로 기맥길을 이어간다.

 

<말머리고개(백석고개)>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에서 백석읍 기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이곳에서 '말이 굴렀다' 하여 말머리(馬頭)고개라 붙여진 이름이다. 고개가 무척 험하여 지금도 차량들이 넘나드는 데 어려움을 격을 장도이며, 그나마 최근에 도로가 확.포장되어 예전보다는 쉽게 넘을 수 있다.

 

선답자들의 산행기를 보면 말머리고개 들머리 능선을 차지한 크라운해태제과연수원은 주인이 자주 바뀌는 비운을 격은 것 같다. 이곳은 원래 송추유스호스텔이었다고 하는데, 아직도 이 지역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 그러다가 영업이 되질 않아서 강남청솔학원이라는 기숙학원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제과업체인 크라운해태제과의 연수원으로 바뀌어 있다. 과거 기맥꾼들은 연수원 앞마당을 지나 말머리봉으로 진행했으나, 지금은 좌측 임도로 우회하여 능선에 접속한다.

 

말머리고개 이정표.

 

개명산(고령산) 등산 안내도.

 

 

도로 건너편 연수원 입구 좌측에 있는 이정표의 앵무봉 방향 표시를 따라 임도로 들어서면,

 

 

잘 닦여진 임도가 이어지고,

 

 

이내 우측 절개지로 오르는 들머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임도를 따라 봉우리를 하나 더 우회하여 오를 수도 있지만,

어서빨리 능선에 접속하고픈 마음에 밧줄을 잡고 가파른 절개지로 오른다.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능선에 접속하면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능선을 따라 오르다가 우측으로 보면 기산저수지가 있는 백석읍 기산리가 내려다 보인다.

 

<양주군 백석읍>
백석(白石)이란 땅이름은 13세기 중반의 문헌인 여지도서(1757)에서 처음 등장한다. 18세기 후반의 문헌에서는 구체적인 마을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호구 총수(1789)는 백석면이 일패리(一牌里), 이패리(二牌里), 삼패리(三牌里), 사패리(四牌里)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어서 동국여도(1801~1822), 청구도(1834), 양주목읍지(1842), 대동여지도(1861), 대동지지(1864), 양주목읍지(1871), 조선지리략(1888), 양주군 읍지(1899), 양주읍지(1899)에서도 백석이란 땅 이름이 확인된다. 백석은 양주동에서 서쪽에 있으며, 읍치로부터 초경이 10리, 종경이 40리 되는 거리에 있다고 하였다. 한편 정조실록 18년(1794) 1월 17일 조항에서는 양주읍치 뒤로 두 갈래의 길이 있는데, 북쪽에는 울대현(蔚垈峴)이 있고, 서쪽에는 백석면이 있어 곧장 관서로 통하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양주시 11개 읍면동 가운데 하나로 동쪽으로 양주동, 서쪽으로 파주시 광탄면, 남쪽으로 장흥면, 북쪽으로 광적면과 접해 있다. 면적은 군내에서 장흥면 다음으로 크다. 백석들은 남쪽의 앵무봉(鸚鵡峰, 621.8m)으로부터 시작하여 북쪽의 노아봉(老兒峰, 336m)에 이르기까지 한강봉(漢江峰, 436m)과 은봉산(隱鳳山, 379m) 등이 연봉을 이루어서 동서의 지형 구분이 뚜렷해진다. 따라서 북쪽의 오산리(梧山里)에서부터 광적면 가납리와 광석리에 걸친 드넓은 분지가 발달되어 있고, 기타의 지역은 거의 산악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소재지는 오산리에 있으며, 방성리, 홍죽리, 연곡리, 기산리, 가업리, 복지리 등 7개의 법정리와 26개의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면소재지인 오산리에는 면사무소를 비롯하여 경찰지서, 농협, 양주소방서, 초.중.고 학교 등이 있다. 최근 복지리와 가업리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증하였으며, 그 결과 2001년 10월 1일 읍으로 승격되는 경사를 맞이하였다.

 

<은봉산(隱鳳山, 397.8m)>
백석읍 가업리와 홍죽리 그리고 기산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은(銀)이 나는 산 혹은 부엉이가 숨어 있던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은(銀)을 채굴했다고 하며, 지금도 은봉산 중턱에는 당시에 채굴했던 은굴이 있다고 한다. 은봉산은 19세기 중반의 문헌인 양주목읍지(1842)에서부터 확인되는데, 한자로는 은봉산(隱鳳山)이라고 하였다. 양주목읍지(1871), 양주군읍지(1899), 양주읍지(1899)도 마찬가지다. 땅 이름 유래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얘기도 전해진다.
남씨 일가에서 장사를 치르는데, 지관이 말하기를 이곳을 파고 바위돌이 나오면 시신을 그 위에 올려놓고 묻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자손들은 시신을 돌 위에 올려놓고 묻을 수 없어 바위돌을 들어내었더니 마침 부엉이 3마리가 이곳에서 날아갔다고 한다. 그 후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혹은 봉황이 숨었다가 날아갔다고 하여 은봉산이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정상 부근에 부엉이 묘가 남아 있다.

 

<백석읍 기산리(基山里)>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에 있는 리(里)로서 산지에 위치해 있는 마을이며 기산저수지가 위치해 있다. 자연마을로는 턱골, 주리골, 안고령, 석골 등이 있다. 턱골은 마을이 큰 산 밑에 턱이 진 형세로 되어있어 붙은 이름이다. 주리골은 주씨와 이씨가 처음 정착하였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안고령은 고령산에 있는 12개의 계곡 가운데 가장 안쪽에 있는 골짜기에 마을이 형성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석골은 옛날 석씨가 부락을 개척했다 하여 붙은 명칭이다.

기산리에 있는 저수지는 면적 14만 8760㎡, 저수량 878t, 몽리면적 203ha로, 장흥국민관광단지 인근에 있다. 높은 산에 둘러싸여 경치가 수려하며, 잉어가 잘 잡히는 낚시터로도 유명하다. 장흥면에서 백석읍.광적면으로 이어지는 포장도로가 나 있어 수도권 드라이브 코스로도 알려져 있고, 저수지 아래 파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각종 향토음식점과 카페가 많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돌아본 한강봉 방향으로 말머리고개도 내려다 보인다.

 

 

오뚝한 봉우리를 하나 넘으니 임도에서 접속하는 갈림길이 나오고,

 

 

 

꾀나 가파른 오름길을 잠시 오르니 삼각점이 있는 441봉 쯤을 지나는데

일명 말머리봉이 이 봉우리가 아닌가 짐작한다.

 

 

완만한 능선길이 잠시 어어지더니,

 

 

말머리고개에서 1km 왔다는 이정표를 지나고,

 

 

잠시 오름길을 오르면 장군봉 갈림길이 있는 485봉 정상에 도착하는데,

어떤 산행기에는 이곳을 말머리상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가야할 개명산 방향.

 

 

말머리 상봉에서 잠시 여유를 부리다가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서고,

 

 

오목한 안부를 지나 다시 가파른 오름길으로 오르면,

 

 

기산보루성으로 보이는 축대가 나타나고,

 

 

삼각점이 있는 봉화봉(봉수대)이라고도 불리는 기산보루성 봉화봉(530m)에 도착한다.

 

<기산보루성 봉화봉(530m)>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석현리와 백석읍 기산리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으며, 말머리고개에서는 서쪽으로 위치해 있고, 앵무봉에서는 동쪽으로 위치해 있는 봉우리로 오두지맥이 지나는 곳이다. 봉우리에는 삼각점과 기산보루성 봉수대가 있으며, 지나온 챌봉은 물론 도봉산과 삼각산(북한산) 일대 조망이 멋진 곳이다.


보루성이란 적의 공격이나 접근을 막기 위해 돌이나 흙으로 쌓은 진지를 말하는데, 기산보루성은 양주시에 분포된 28개 중에 하나라고 한다. 성의 축조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고, 다만 이곳에서 출토된 약간의 토기 유물로 보아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역사학자들의 추정만 있을 뿐이다. 이곳 보루성은 남쪽으로 높이 4m, 북쪽으로 높이 1m, 길이 4m 정도의 성벽이 남아 있고, 활석을 이용해 자연경사를 유지하면서 바른층쌓기로 축조되었음을 볼 수 있다. 성 내부의 북쪽 한 칸에 400x460x100cm 정도의 구덩이가 있는데, 집수시설인지 군사시설인지 알 수 없지만, 이 곳이 봉화를 피웠던 봉수대의 흔적이 아닌가 추정만 할 뿐이다. 이 성의 축조 시기를 삼국시대로 추정하고 있는데, 현재의 형태로 보아서 조선시대에 개축한 모습을 띠고 있어 고려 및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보루성은 적의 공격이나 접근을 막기 위하여 돌이나 흙으로 쌓은 진지를 말하며, 양주시에 현존하는 봉수대는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양주문화원에서 편찬한 <양주땅이름역사>에 나오는 봉수대는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백석 한강봉 봉화터, 백석 기산리 팔일봉 봉화터, 남면 신암리 백적산 봉화터, 장흥면 교현리 상장봉 봉수지, 유양동 대모산 봉수와 산북동 태매산 봉수, 산북면 큰황산 봉수, 덕정동의 봉우재산 그리고 이곳 기산보루성 봉화터 등이 있다.

 

동쪽 한강봉 방향 조망.

 

남쪽 도봉산과 북한산 방향 조망.

 

가야할 개명산과 앵무봉 방향.

 

살짝 당겨본 불곡산 모습.

 

수락산과 도봉산 모습.

 

도봉산과 북한산 모습.

 

봉우리 한켠에 고령산 등산안내도가 놓여 있다.

 

언제 어디서 보아도 멋진 북한산 모습.

 

 

봉화봉을 뒤로하고 완만해진 능선길을 따르면,

 

좌전방으로 수리봉이 조망되고,

 

 

이내 좌측으로 수리봉이 500m 떨어져 있다는 수리봉 갈림길을 지난다.

 

 

앞쪽으로 개명산 정상의 군부대 건물이 뚜렷이 가늠되고,

 

 

가이드 로프가 설치된 내림길을 잠시 내려서면,

 

 

다시 완만한 능선이 이어지며 좌측으로 돌고개유원지 방향 갈림길을 지나게 되고,

 

 

작은 암릉을 올라서면,

 

 

망봉/현석봉이라고도 부르는 소나무 전망대가 나오는데,

잠시 걸음을 멈추고 따스한 햇살과 주변 조망을 즐긴다.

 

돌아본 챌봉 방향.

 

남쪽 일영봉 방향.

 

가야할 개명산 방향.

 

발아래로 장흥면 석현리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인다.

 

 

오두지맥 개명산 정상을 차지한 군부대로 인하여 개명산을 어떻게 우회할 것인지에 대한 예기를 나누며,

너무 자주 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야 다시 오두지맥 걷기에 나선다.

 

 

좌측으로 돌고개마을 갈림길을 지나면,

 

 

개명산 정상을 차지한 군부대를 좌회하여 됫박고개로 갈 수 있는 형제봉 방향 갈림길이 나온다.

 

양주시의 최고봉으로 유서 깊은 고찰 보광사를 품고 있는 고령산(앵무봉)은 오두지맥에서 살짝 벗어나 있지만, 어차피 개명산 정상은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서 우회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차라리 고령산을 올랐다가 보광사를 둘러보고, 여유가 된다면 보광사 앞에 있는 보리밥집에서 점심까지 해결하고서 됫박고개로 올라 오두지맥을 이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 따라 직진의 능선으로 들어서며 고령산으로 향한다.

 

형제봉 갈림길 이정표.

 

 

고령산(앵무봉) 갈림길 헬기장.

 

오두지맥은 이곳에서 좌측으로 꺾여져 개명산으로 이어지지만, 개명산 정상에는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서 대부분의 지맥꾼들은 앵무봉을 올랐다가 보광사를 거쳐서 됫박고개로 우회하여 이어간다.

 

가지 못하는 오두지맥의 개명산 방향을 카메라에 담고는,

 

고령산/앵무봉으로 향하면,

 

 

이내 고령산/앵무봉에 도착한다.

 

<고령산(高嶺山)/앵무봉(鸚鵡峰, 622m)>
파주시 광탄면 기산리와 영장리,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와 장흥계곡에 걸쳐있으며, 개명산(開明山, 565m), 형제봉(547m)과는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숲이 울창하고 감악산 남맥 끝머리에 우뚝 서 있는 이 산 위에는 앵무새가 마주앉아 있는 모양을 한 앵무봉이 있으며, 고령산이란 이름은 이 봉우리에 올라 사방의 아름다운 경관을 바라본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높이는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경기도 북서지역에서는 감악산(675m)과 더불에 가장 높은 산으로 꼽히며, 봉우리 정상에는 사각정자와 이정표가 있고, 북쪽 바로 옆에는 작고 편평한 공터에 오석 정성석이 있는 또하나의 봉우리가 나란히 있다.
고령산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양주시가, 남쪽으로 북한산 백운대가, 동쪽으로 불국산, 사패산, 도봉산 등의 봉우리가 있다. 산 아래에 있는 보광사는 894년(진성여왕 8) 도선국사가 왕명으로 창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산기슭에는 도솔암이 있는데 말 그대로 소나무로 둘러싸인 암자다. 도솔암에서 조금 더 오르면 정상인데, 정상은 사각정자가 자리한 봉우리와 평탄한 공터로 북쪽 감악산이 보이는 봉우리가 나란히 있다. 고령산은 1634년에 주조한 보광사 범종과 조선 후기에 편찬된 《양주목읍지》에 각각 고령산(高嶺山)과 고령산(高靈山)으로 기록되어 있어, 높고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산정에서 북서쪽으로 능촌교를 지나면 영조대왕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묘소인 소령원(昭岺園)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조선 광해군 14년(1622)에 복구하였다.

 

고령산 정상의 이정표.

 

고령산(앵무봉) 등산 안내도

 

서쪽 잠시 후 가게될 박달산 방향.

 

앵무봉에서 바라본 남쪽 개명산(開明山, 585m) 모습.

 

<개명산(開明山, 585m)>
개명산은 양주시 장흥면에서 백석읍 방향으로 가다 보면 좌측으로 보이며, 인근에 앵무봉과 수리봉(521m)이 있는데, 개명산(開明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전에는 고령산(高嶺山) 또는 고령산(高靈山)으로 불리었다. 모두 산이 높은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그 후로 한때는 계명산(鷄鳴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동여비고(東輿備考)』[1682]에서는 고령산을 일명 계명산으로 부른다고 하였고, 『동국여도(東國輿圖)』[1801~1822]에는 고령산(高靈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령산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전기부터 나타난다. 『세종실록(世宗實錄)』 1448년(세종 30) 12월 10일조의 기록에 삼군진무소에서 고령산 등을 강무장(講武場)으로 정할 것을 건의하는 기사가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고령산 또는 고령사(高嶺寺)[현 보광사(普光寺)]와 관련된 기사가 모두 7건이나 등장한다. 숙빈 최씨(淑嬪 崔氏)의 묘소인 소령원(昭寧園)이 고령산에 있었기 때문에 특히 영조와 정조 시대에 임금이 이곳으로 행차한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일제 강점기에 조사한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에는 백석면에 내고령리(內古靈里)와 대고령리(大古靈里)가 기록되어 있는데, 파주시 광탄면 개명산 자락 밑에도 현재 대고령리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령산이라는 이름의 연원이 매우 오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는 장흥관광지, 돌고개유원지, 기산유원지, 일영유원지 등이 있으며, 장흥조각아카데미, 장흥아트파크, 송암스페이스센터, 장흥자생수목원 등과 온릉(사적 제210호) 및 권율 장군묘(경기도기념물 제2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현재 네이버지도에는 앵무봉을 고령산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앵무봉과 고령산 중에서 어떤 이름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고령산 앵무봉이 맞다면 고령산의 범위와 다른 봉우리는 있는지, 그리고 현재 군부대가 자리한 개명산을 과거에는 고령산이라 했었던 듯한데, 고령산과 앵무봉 그리고 개명산의 이름에 대한 표기가 지도마다 다르고 기록마다 차이가 나므로 통일된 정함이 필요해 보인다.

 

 

사각정자 북쪽에 또다른 봉우리가 있는데,

 

봉우리에는 '앵무봉'이라 새겨진 정상석이 있고,

 

삼각점도 설치되어 있다.

 

 

앵무봉 정상 인증.

 

 

정상 북쪽 아래에는 데크목 쉼터가 있고, 나뭇가지 사이로 기산저수지도 내려다 보인다.

 

 

다시 사각정자가 있는 봉우리로 돌아나와 앵무봉을 뒤로하고 보광사 방향 급경사 내림길로 내려서고,

 

 

 

보광사에서 도솔암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접속하여 우측 보광사 방향으로 내려가면,

 

 

이내 거대한 석불이 굽어보고 있는 보광사 경내로 들어서게 된다.

 

보광사 전경.

 

 

영조대왕의 친필 편액이 걸려있는 대웅보전(大雄寶殿)을 둘러보려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방문객 명부를 작성해야 해서 발길을 돌린다.

 

<보광사(普光寺)>
보광사는 경기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13번지에 있는 사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인 봉선사의 말사로 한강 이북에 있는 6대 사찰로서 유서깊은 절이다. 보광사는 천년고찰로 효(孝)의 도량으로도 유명하다. 신리 진성여왕 때 건립된 고찰이기도 하지만, 조선 제19대 숙종의 후궁이었던 숙빈 최씨의 아들인 영조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애틋한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신라 진성여왕 8년(894년)에 왕명으로 승려 도선이 건립한 후 고려 고종 2년(1215년) 승려 원진이 중창하였고, 우왕 14년(1388년) 승려 무학이 삼창한 것이 임진왜란으로 모든 건물이 불탔고, 광해군 14년(1622년) 법당과 승당을 복원하였다. 그 후 현종 8년과 영조 16년에도 중수가 이루어졌다. 철종 14년 쌍세전과 나한전이 건립되었고, 고종 21년에 관음전과 별당이, 고종 30년에 산신각이 지어졌다. 그 뒤 광무 5년(1901년)에도 중수가 있었고, 6.25전쟁으로 일부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재건과 중창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광사 예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분이 조선 21대 임금 영조다. 십여년 전 TV에서 '동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나왔던 동이가 바로 영조대왕의 생모인 숙빈 최씨다. 영조는 1740년(영조16)에 자신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묘인 “소령원"이 보광사에서 5~6km 북쪽에 있어서 이 절을 숙빈 최씨의 원찰로 삼았고, 대응보전 광응전을 중수하고 만세루를 건립하였으며 어실각(御室閣)을 세워 숙빈 최씨의 영정과 신위를 모셨고, 그 앞으로는 영조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늙은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른바 무수리였다는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에 대해서는 무수히 많은 사극(史劇)에 등장했으니 긴 이야기는 거두고, 두 가지만 짚고 가려한다. '숙빈 최씨는 무수리였나?' '장희빈을 결정적으로 보낸 사람은 누구였을까?'

숙빈 최씨가 무수리였다는 역사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또한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는 고종의 후궁 삼축당 김씨와 광화당 이씨가 고종에게 직접 전해 들은 이야기라고 하여 숙빈 최씨는 본래 침방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조선의 궁녀에 대해 이해를 바꿀 필요가 있다. 영화나 TV극에서와는 달리 궁녀는 왕과 잠자는 것이 주 임무는 아니었다. 그들은 지밀나인(至密內人:왕의 시중), 침방나인(針房內人:바느질), 수방나인(繡房內人:수놓기), 소주방나인(燒廚房內人:음식, 잔치) 등으로 궁중살림 전문가 집단이었고, 이들의 취사와 세탁 등을 담당하는 하인 성격이 무수리, 취반비, 방자, 파지 등이었다. 최씨가 침방출신이라면 무수리가 아니라는 예기다.

한편 숙종 27년(1701년) 9월 23일 실록의 기록은 의미심장하다.

‘외간(外間)에서는 혹 전하기를, 숙빈 최씨가 평상시에 왕비(민비)가 베푼 은혜를 추모하여 통곡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임금에게 몰래 고(告)하였다’하였다.(外間或傳, 淑嬪 崔氏, 追慕平日逮下之恩, 不勝痛泣, 密告於上). 무엇을 고한 것일까? 장희빈이 취선당에 신당(神堂)을 차려 놓고 수시로 민비를 저주했다는 내용이다. 이 일로 장희빈은 갔다. 숙빈 최씨는 베갯머리송사로 연적을 꺾었으며 세 아들을 낳아 둘째 아들이 왕이 되었으니, 사랑과 인생에서 모두 성공한 여인이었다.(한성 형님의 '이한성의 옛 절터 가는 길'에서..)

 

돌아본 앵무봉 모습.

 

 

미처 다 둘러보지 못해 아쉬운 마음으로 보광사를 뒤로하고 일주문을 나서면,

 

 

고양시 백제동에서 파주시 광탄면으로 이어지는 367번 도로가 나오며,

오른쪽으로 유명한 보리밥집 간판이 보이는데,

다들 밥생각이 없는지 좌측 도로를 따라 됫박고개로 향한다.

 

 

교통량이 많지않은 도로를 따라 10여분 오르니 됫박고개에 오르게 되고,

우측 추모관으로 이어지는 도로 옹벽이 끝나는 지점에서 능선으로 올라야 하지만,

이내 다시 도로로 내려서게 되므로 그냥 도로를 따라 새문안교회 추모관까지 진행하기로 한다.

 

<됫박고개>
경기도 고양시 백제에 있는 용미리 공동묘지에서 파주시 광탄면으로 넘어가는 367번 국지도가 지나는 고개로, 보광사로 가는 길이다. 조선조 영조대왕이 모친의 묘소가 있는 "소령원(昭岺園)"으로 왕림할 때 됫박고개가 너무 높아 힘들어서 '더 파서 낮추라'해서 '더 파기고개'라 했다가 변음되어 '됫박고개'가 되었다고도 하고, '됫박'처럼 가파르다고 해서 '됫박고개'가 되었다고도 한다. 의주로의 옛길인 혜음령과 더불어 예전에 한양에서 북으로 가려면 첫번째로 마주치게 되는 험한 고개였다고 한다. 이 고개 주위 전체가 용미리 공원묘지이다.

 

 

오두지맥 능선을 좌측에 두고 도로를 따라 오르는데,

능선 좌측의 동남쪽 사면은 온통 공동묘지와 화장터, 추모관 등 망자들의 보금자리가 즐비한 곳이지만,

예전에는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이 한양을 가기 전에 꼭 묵어야 했던 백제관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따르던 도로는 새문안교회 추모관으로 이어져 있고,

오두지맥길은 추모관 좌측의 임도로 이어진다.

 

돌아본 앵무봉과 개명산 모습.

 

 

따르던 임도가 좌측으로 휘어져 나가는 곳에서,

그냥 임도를 따라도 우회하여 다시 능선으로 이어지게 되지만,

표지기가 걸려있는 우측 숲으로 들어서 능선을 따라 오르면,

 

 

이내 다시 우회하여 오는 임도와 만나 우측 임도를 따라 진행한다,

 

 

임도를 따라 5분여 동안 진행하면 Y자 임도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측의 임도는 서서울CC가 있는 우암산(329m)으로 이어지고,

오두지맥은 우측 송전탑이 있는 능선으로 이어진 임도로 들어서야 한다.

 

돌아본 앵무봉과 개명산 방향.

 

 

70번 송전탑 옆 임도에서 점심식사를 위해 자리를 펴는데,

서여사님이 갖가지 떡을 가져와서 다른 사람들은 명함도 못 꺼내보고 떡으로 포식을 한다.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10여분 편안한 임도를 다르면,

 

잡풀이 자라난 헬기장이 있는 367봉을 지나게 된다.

 

 

헬기장을 지나자 오두지맥길은 다시 거친 능선길로 이어지고,

 

 

완만한 능선 내림길이 이어지더니,

 

앞쪽으로 박달산이 우뚝해 보이고,

 

 

앞쪽으로 철조망 울타리가 능선을 가로막으며 좌측으로 우회하라는 표시가 되어있는데,

철조망을 넘어 능선을 따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좌측 우회길로 접어든다.

 

 

낙엽이 수북한 급경사 사면을 따라 잠시 내려서다가 수레길이 나오면,

우측 오름길로 진행하고,

 

 

부대 정문이 나오면 진입도로를 가로질러,

 

반대편 등로로 올라가서,

 

 

군부대 울타리를 따라 박달산으로 향한다.

 

돌아본 오두지맥 능선.

 

앵무봉과 개명산 방향.

 

 

능선길을 잠시 오르니 박달산 갈림길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오두지맥은 좌틀하여 사면 아래로 이어지지만,

직진의 능선 오름길을 따라 박달산을 다녀오기로 한다.

 

아래 캡처된 지도는 박달산 갈림길에서 달구니고개로 가는 루트를 표시해 놓은 것으로,

녹색 실선이 가장 지맥 능선에 가까운 루트이지만, 하늘색 실선과 같이 우회를 많이 하는 듯하다.

(하늘색과 녹색 실선이 갈라지는 곳에서 녹색 실선 루트에는 등로가 없음)

 

 

박달산을 향해 둥그런 안부를 지나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후방으로 조망이 트이며 앵무봉에서 이어온 오두지맥 능선이 한눈에 가늠되고,

우측으로 박달산에서 달구니고개 방향으로 이어갈 지맥 능선도 가늠된다.

 

 

데크목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고 헬기장 표식이 있는 박달산 정상에 도착한다.

 

<박달산(朴達山, 369m)>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마장리, 신산리, 영장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박달봉이라는 이름은 산에 박달나무가 많은데서 유래되었는데, 예전에는 독수리가 많아서 수리봉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그 밖에 박달산, 발산, 당현봉이라고도 부른다. 개명산에서 남북으로 뻗은 능선상에 있고, 만장산(萬丈山)과 이웃하여 있다. 예로부터 파발마로 쓰이던 말을 사육하던 장소였는데, 현재는 주능선 중간에 군부대 훈련장이 있으며, 2000년부터 2001년까지 파주시가 마장리에 4억원을 들여 삼림욕장을 조성하였다. 산기슭에는 성종의 아들 완원군(完原君) 이수의 9대손인 이건섭(李建燮)이 산 아래 연못에 내려가 목욕하고 공부에 전념하였다는 마당바위가 있다. 주변에는 윤관장군묘(사적 제323호), 용미리석불입상, 파주삼릉 등 유적이 많아 역사기행을 겸한 가족산행에 적합한 산이다. 북쪽 기슭에는 산림욕장과 자연학습장이 조성되어 있으며, 승마나 온천욕을 즐길수 있는 유일레저타운이 있다. 헬기장인 정상에 서면 동쪽으로 고령산 앵무봉을, 남쪽으로는 도봉산과 북한산을, 그리고 북으로는 멀리 감악산을 볼 수 있다.

 

서쪽 일산 방향.

 

북쪽 비학산 방향.

 

우측 멀리가 비학산 쯤이다.

 

동쪽 앵무봉과 개명산 방향.

 

박달산 이정표.

 

 

박달산 정상에서 10여분 쉼을 하고는 인증을 남긴 후,

왔던 길을 되돌아 박달산 갈림길로 향한다.

 

 

박달산 갈림길에서 우측 사면 내림길로 들어서면,

 

 

오두지맥을 따라 박달산 삼거리로 오기 직전에 지름길로 접어들면 만나는 지점을 지나고,

 

 

사연 많은 소나무가 자리한 작은 봉우리를 넘으면,

 

 

따르던 등로가 우측 사면으로 꺾여져 내려가는 지점이 나오는데,

우틀하여 내려서는 등로는 우회하여 달구니고개로 이어가는 길이고,

우리는 오두지맥 능선을 고수해보고자 길이 없는 능선으로 들어선다.

 

 

길이 없는 능선을 따라 잠시 진행하다가

능선이 갈라지는 끝지점에서 우측 능선으로 들어서서,

 

 

어디가 능선인지 거의 구분이 안되지만 달구니고개 방향으로 내려서다가,

 

 

달구니고개 방향 능선에는 축사와 공장들이 들어앉아 있어서 능선 좌측으로 내려서고,

 

 

오두지맥 능선 좌측의 마을 안길을 따라 달구니고개 방향으로 진행한다.

 

 

 

달구니고개로 이어지는 장지산로에 접속하여 우측으로 진행하면,

 

 

달구니고개가 나오고, 도로 건너편 숲길로 들어서며 다시 오두지맥 능선에 복귀한다.

 

<달구니고개(鷄鳴峴)>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와 용미리의 경계능선에 있는 고개로, 분수 3리 고개라는 표기도 있는데, 잠시 전에 지나온 마을이 달구니 마을이다. 옛날에는 닭이 알을 품는 모습의 명당이거나, 닭이 울면 새벽이 오기 때문에 닭의 울음 그 자체가 밝은 꿈이었다. 그래서 '달구재' '덜구니' 등의 마을 이름이 '닭의 울음'과는 관계 없음에도 한자로 옮겨질 때는 '계명(鷄鳴)'이 되었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등에 있는 달구재나 달구니 등의 산이나 마을이 그런 예이다. 여기서의 '달구'는 바로 '산(山)'을 나타내는 옛말 '닥', '닭'을 바탕으로 나온 이름으로 보인다.(펌)

 

박달산 내림길에서 우회길로 오게 되면 고개 반대편에서 오르게 된다.

 

 

달구니고개에서 능선으로 올라서면 묘지들이 나타나고,

 

돌아본 박달산 방향 오두지맥 능선에는 온통 공장들이 들어차 있다.

 

좌측 달구니마을 조망.

 

 

달구니고개를 지나서도 능선 우측을 차지한 공장 담벼락 옆으로 길이 없는 잡목지대를 잠시 헤쳐나가면,

 

 

해평윤씨 묘지가 나오는데, 갈증도 나고 하여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목을 축이고는,

 

다시금 제법 뚜렷한 산길로 접어들어 오른다.

 

 

돌아본 박달산 기슭에는 베스트밸리CC가 보이고,

 

 

버려진 군 훈련시설도 지나면,

 

 

국기 게양대와 삼각점이 있는 168봉이 나오고,

 

표지기들도 잔뜩 걸려있다.

 

 

폭발물을 왜 매각하는지 알 길이 없는 경고판을 지나면,

 

 

엄청난 규모의 채석장이 나오는데,

 

지맥길은 채석장 가장자리 능선을 따라 좌측으로 이어진다.

 

 

돌아본 박달산과 베스트밸리 방향.

 

우측으로 까마득이 내려다 보이는 채석장의 규모가 엄청나다.

 

 

아슬아슬한 채석장 절개지 위로도 지나고 군 훈련장으로 쓰였음직한 숲길도 지나서,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힘겹게 올라서면,

 

 

삼각점이 있는 장지산에 도착하는데,

 

원형철조망에 '장지산 178m'라 표시된 코팅지를 메어놓은 모습이 눈길을 끈다.

 

장지산 인증.

 

 

장지산을 뒤로하고 잠시 내려서면 좌측으로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나오는데,

 

뒷모습만 보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앞쪽으로 가서 마애석불의 모습을 뵙고 가기로 한다.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모습.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8번지 용암사를 내려다보며 우뚝 선 '파주용미리석불입상'은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석불로 형태가 특이하다. 거대한 자연석을 몸통으로 하고 그 위에 머리를 얹어 놓아 반은 자연적으로 반은 인공적으로 조성한 석불이다. 이러한 형태의 석불은 삿갓을 쓰고 있는 것으로 미래세계를 주관하는 미륵부처님이라 부른다.
마을 사람들은 이 석불 입상을 '용미리 쌍미륵'이라 불렀으며, 마을 이름도 '미륵뎅이'라고 불린다. 이와 같은 형태는 안동 제비원(연미사) 미륵불과 유사하다. 그 모습이 특이해 보물 제93호로 지정돼 있는 용미리 석불입상은 예로부터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도해서 득남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일설에 의하면 이 석불 입상은 고구려시대에 천연 암벽에 57척 2촌 (13m)의 거대한 입상이 신령스런 힘에 의해 조각됐다고 하나, 조각수법으로 볼때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른쪽의 불상(向左像)은 4각형의 갓을 쓰고 있고, 왼쪽의 볼상向右像)은 원통형의 관을 쓰고 있어 용미리 쌍미륵석불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머리 위에 갓이나 천개(天蓋)를 쒸우는 것은 눈 또는 비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고려시대에 이르러 특히 유행하였다. 이 석불들은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굉장히 거대한 느낌이 든다. 이런 점에서 불성(佛性)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 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오른쪽의 4각형 갓을 쓴 방립불(方立佛)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 뿐 신체 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 지방민의 구전에 의하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 한다.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고려 선종(宣宗)과 원신궁주(元信宮主)의 왕자인 한산후(漢山候)의 탄생과 관계된 설화가 있다. 한편, 1995년에 발견된 명문으로, 이 석불입상이 고려시대의 작품이 아니라 1465년(세조 11)에 세조와 정희왕후의 모습을 미특불로 조각한 것이라는 설도 제기되었으나,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진 않았다. 한때 왼쪽 어깨 위쪽에 대통령 이승만이 세웠다는 동자상과 칠층석탑이 있었는데, 1987년 철거하여 요사 뒤편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삼성각 입구로 다시 옮겨져 있다.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마애이불입상 아래로는 용암사가 내려다 보인다.

 

<용암사>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절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창건 연대는 분명하지 않지만 용미리 석불입상(쌍석불) 조성 절의 창건에 얽힌 설화가 전하고 있어 석불이 만들어진 11세기(고려시대)를 창건 연대로 잡고 있지만, 창건 이후 절의 옛 역사는 거의 전하지 않고 있다.
1936년에 파주군의 유지들이 절을 새로 지은 뒤, 백정(白淨) 만월(滿月)과 승려 혜성(慧城)이 중창 불사를 시작 하였고, 1978년 대웅전 불사에 착공하여 1979년 완성하였다. 이듬해에 대웅전 안에 지장탱화와 감로탱화를 조성하고, 요사채는 1982년 이후 꾸준히 증.개축하였으며, 1984년에 종각을 지어 범종을 봉안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 미륵전, 요사채, 범종각이 있다.

 

<용암사의 동자상과 칠층석탑>
이승만 대통령 모친이 이곳 쌍미륵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하여 이 대통령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1954년에는 이 대통령이 용암사에 참배하여 남북통일과 후손잇기기원 기념으로 동자상과 칠층석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원래는 이곳에 있던 게 아니고 동자상은 좌측 미륵불상 어깨에 있었고, 칠층석탑은 동자상 뒤편에 세워져 있었으나, 4.19로 인하여 이 대통령이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한 후에 재야단체들이 문화재를 훼손한다는 비판이 심하여 철거하여 절 뒷간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던 것을 현 주지스님이 부임하여 이곳에 모셨다고 한다.

 

마애이불입상을 뒤로하고 다시 능선으로 복귀하여 내려서면,

 

 

78번 국지도가 지나는 양지재에 도착한다.

 

<양지재/용미고개>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과 고양시 백제동을 잇는 78번 국지도가 지나는 곳으로, 백제 방향으로는 용미리 공원묘지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 길은 고양시 백제관에서 광탄 방향으로 연결되는 길로, 옛날 한양에서 의주로 가는 중요한 길이였으며, 먼 길을 가는 나그네들의 쉼터 역할을 한 곳이라는데, 지금은 해음령이라는 지명은 없어지고 양지재로 불리고 있다.

 

 

양지재 도로를 건너 맞은편 길로 들어서니 양지마을 표석이 나오는데,

표석 우측으로 오르면 개고생길이라 좌측 밭 가장자리로 우회하여 진행하다가,

 

 

계속 숲 가장자리를 따라 우회했어야 하는데,

우측 능선의 우거진 잡목지대로 들어서니 우측 아래로 국궁장이 내려다 보이고,

 

 

잠시의 개고생 끝에 잡목지대를 빠져나오니,

 

 

빨간 지붕 민가가 나온다.

이곳에서도 좌측으로 우회하여야 하지만,

막판이라 호기 있게 우측 개고생 능선으로 접어들면,

 

 

넝쿨과 마른 잡풀이 우거져 진행이 매우 어렵다. 절대비추!

 

 

100여 미터도 안되는 거리를 10여분이나 걸려 겨우 탈출구(철조망문)를 찾아 나오니,

 

 

 

좌회하여 온 운수 좋은 창병씨가 기다리고 있다.

 

 

잠시 동안 목을 축이며 넝쿨지대를 빠져나오며 격은 고생담을 나누고는,

 

 

완만한 능선을 따라 잠시 오르다가 뚜렷한 T자 능선 갈림길이 나오면,

우틀하여 진행하는데,

 

좌측으로도 뚜렷한 등로가 이어져 있지만,

 

우측으로도 널찍한 수레길 수준의 산길이 이어져 있다.

 

 

둥그런 안부를 지나서 오르면,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 돌봉산 정상석이 나온다.

 

<돌봉산(163m)>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와 장곡리 사이에 있는 산으로, 지도상에는 표기조차 되어있지 않은 산이다. 산 정상에는 팔각정과 벤치가 있고, 최근에 설치한 듯한 표시석과 정상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행사 때 제를 지내는 장소로 쓰이는 모양이다.

 

돌아본 앵무봉 방향.

 

돌봉산 인증.

 

서쪽 파주시 방향으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걷기 좋은 능선길이 이어지고,

 

 

약수터 갈림길 이정표도 지나면,

 

 

매봉이 400m 남았다는 이정표가 반갑고,

 

 

저물어가는 저녁햇살을 쫓아,

 

 

높고높은 매봉(133m) 정상에 도착하여,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 인증을 남긴다.

 

 

매봉을 뒤로하고 잠시 내려서면,

좌측 파주시 조리읍 장곡리와 우측 광탄면 분수리를 잇는 도로가 나오는데, 바로 올라도 될 듯 하지만,

 

도로 우측 10여 미터의 들머리로 오르면,

 

 

수레길 수준의 뚜렷한 산길이 이어진다.

 

 

완만한 구릉지대라 뚜렷한 능선 구분이 잘 안되어서 독도에 주의하며 진행하면,

 

 

진입금지 표지판이 붙어있는 철문을 통과하게 되고,

 

 

능선 분기점으로 보이는 곳에서 직진의 능선길을 두고 좌측 능선으로 들어서야 할 듯 보이지만,

앞서간 일행들이 직진의 능선길을 따라 진행하여,

하는 수 없이 좌측으로 분기하는 오두지맥 능선을 두고 직진의 수레길을 따른다.

 

 

우후방으로 조망이 트이는 곳에서 돌아본 앵무봉 방향으로는 이어온 오두지맥 능선이 가늠되고,

 

살짝 당겨본 채석장이 있었던 장지산 너머로 북한산도 조망된다.

 

 

능선으로 이어진 군용 도로를 계속 따르면,

 

 

좌측 오산일반산업단지로 이어지는 도로에 내려서게 되고,

 

좌측 도로를 따라 오산일반산업단지로 향한다.

 

 

앞쪽으로 오산일반산업단지가 나타나며,

오산리고개로 가기 위해서는 우측 전진아파트로 들어서야 겠지만,

 

 

서울 가는 버스 정류장이 있는 광탄삼거리로 가기 위해 계속 도로를 따라 진행하면,

 

 

오산리고개에서 광탄삼거리 방향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접속하게 되고,

 

 

오산리고개는 좌틀하여 전방에 보이는 고개로 진행해야 하지만,

오늘 산행은 이곳에서 종료하고 서울 가는 버스를 타러 광탄삼거리로 향한다.

 

<오산리고개>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오산리와 신산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종이 관련 업체들이 많이 입주해 있는 오산일반산업단지가 있다. 고개에는 4차선의 56번 지방도가 지나며 오산지하차도가 있다.

 

 

우측 도로를 따라 광탄삼거리로 가서,

 

 

광탄삼거리에서 774번 버스를 타고 불광역으로 이동하여,

감자탕으로 간단한 요기를 하고는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한다.

 

미뤄둔 숙제를 시작한 기분이랄까!

백두들이 함께 걷기에는 이프로 부족해 보이는 한북기맥길 반을 걸었다.

나머지 오두산 통일전망대까지는 새해 두번째 토욜날에 걸을 예정으로,

산도들도 아닌 어거지 산길 30km 정도를 걸어 미뤄둔 숙제를 마무리하려는데,

낮시간이 짧은 시기에 통일전망대가 입장 가능 시간에 맞추어 걸을 수 있을지 자뭇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