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금북기맥 3차(부시치고개~서천오거리) 충남 부여군, 서천군.
산 행 일 : 2021. 01. 16.(토)
산행코스 : 부시치고개 ~ 월명산(278.8m) ~ 놋점이고개 ~ 246.5봉 ~ 노루지고개 ~ 작은재 ~ 봉림산(346.1m)
~ 선낭고개 ~ 싸리뫼(90.9m) ~ 오석산(127.2m) ~ 서천 사곡리 ~ 서천읍성 ~ 서천오거리
(20km, 7시간 20분 소요)
산행참가 : 창병씨와 함께.
<산행지도>
이번 구간은 서천군 구간으로, 산행 초반 월명산 이후로는 좌.우 모두 온전히 서천군으로 들어가 서천읍 시내에서 산행을 마치게 된다. 산도 그리 높은 곳이 없어서 가장 높은 봉림산도 346.1m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대체로 길도 잘 나있는 편이다. 하지만, 낮은 산이라 마을이 가까워 샛길이 많아 길을 잘못 들 가능성도 크다. 그리고 몇몇 곳은 잡목이 많아 저항이 심하고, 일부에서는 칡과 넝쿨이 가로막는 곳도 있다. 다행히 겨울이라 넝쿨은 말라있었지만, 여름에는 진행에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초반에는 별다른 조망처가 없지만 봉림산에 오르면 우측으로 희리산이 보이며 주변 서천군 일대가 조망되기 시작하고, 벌목을 한 곳이 여러군데 있어서 시원한 조망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가장 힘든 곳은 봉림산을 오르는 것이지만, 사실 산행 종반부에 맞닥뜨리는 오석산 오름길과 서천읍성 오름길이 더 힘든 것 같다. 오석산 오름길과 서천읍성 오름길은 경사가 무척 가파르고 등로가 없다시피 한 상태라 오름길 내내 마음을 졸이며 힘겹게 올라야 한다. 하지만 힘들게 오석산 능선과 서천읍성 성곽길에 오르면 넓은 산책로가 있어서 약간 허탈하게 만든다.
코로나19로 백두들의 산행이 중단된 상태라, 백두들이 싫어할 만한 거칠고 별반 볼거리도 없는 기맥산행 일부 구간을 걸어버리려고 남겨진 금북기맥을 걷기로 했다. 예정은 지난 1월 둘째주 토욜에 걷기로 했었는데, 산행을 앞두고 폭설과 한파가 덮치는 바람에 한주를 미루어 오늘 걷기로 했다. 함께 걷기로 했던 몇몇 분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빠지는 바람에, 창병씨와 단 둘이서 과천에서 5시 40분 경에 출발하여 차량 통행이 뜸한 고속도로와 국도를 달려 금북기맥 세번째 산행 출발지인 부시치고개에 도착하니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차량 통행이 뜸한 서천군과 부여군의 경계인 부시치고개에 주차를 하고 바로 산행에 나선다.
<부시치고개>
충남 부여군 옥산면 대덕리와 서천군 판교면 복대리를 잇는 고개로, 서천과 부여를 잇는 4번 국도가 지난다. 부소산(扶蘇山) 아래에 있다 하여 부소치(扶蘇峙)라 하였는데, 원래는 부소치였다가 부시치로 변음된 듯하다.
부시치고개 도로 위 간판에는 한산 소곡주와 한산 모시를 알리고 있고, '서래야'는 서천의 농산물 브랜드명으로 "서천 들에서 올라온 좋은 농산물"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지난번 하산 지점에서 4번 국도를 건너는 대덕육교를 건너 산행 들머리인 대덕1리 버스정류소로 향한다.
대덕육교에서 내려다본 서천 방향의 4번 국도가 고속도로처럼 시원하게 닦여있다.
4번 국도는 금강 하구의 서천군 장항읍에서 경주시 감포읍까지 동서로 이어지는 도로다.
대덕육교를 건너서 들머리로 향하는 창병씨.
대덕육교로 지나는 이 도로는 예전에는 서천에서 부여로 통하는 4번 국도가 지나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4차선으로 확장되어 다리 아래로 통과하면서 군내버스나 다니는 도로가 되었다.
부시치고개 들머리가 있는 대덕1리 버스정류장에서 좌측 도로로 들어서며 금북기맥 잇기 산행을 시작한다.
정류소 옆 도로를 따르다가 4번 국도 절개지로 오르는 시멘트 포장도로로 들어서서 절개지 상단부로 오르면,
4번 국도 부시치고개 건너편으로 지난번 산행에서 힘들게 내려섰던 금북기맥 능선이 가늠되고,
절개지 상단에서 좌측 숲으로 들어서며 본격적인 산행길을 시작한다.
산길로 접어드니 예상보다 등로가 뚜렷하며 최근에 다닌 흔적도 보이고,
낯익은 표지기가 쓸쓸한 산객에게 힘을 준다.
산행기에서 보았던 No68 송전탑을 지나,
좌측으로 벌목이 되어 시야가 트인 곳을 지나며,
돌아본 지난 구간의 옥녀봉이 멀찍이서 쓸쓸한 산꾼을 응원하고 있다.
지난주에 내린 폭설로 눈이 많이 쌓여 있을 듯하여 아이젠을 가져왔는데 그냥 짐으로만 남을 듯하고,
우측 아래로 임도가 지나는 잘 단장된 묘지 상단에 서니 우측 판교리 절골 방향으로 조망이 트이고,
묘지를 지나 우측으로 임도가 지나는 월명산 직진의 안부가 장고개라고 하는데, 특별한 흔적이나 표식은 보이지 않는다.
장고개를 지나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지난 구간에 이어 같은 이름의 월명산 정상에 도착한다.
<월명산(月明山, 276m)>
충남 부여군 옥산면 신안리와 서천군 판교면 판교리의 경계 능선에 위치한 산이다. 산 정상에는 있어야 할 삼각점은 보이지 않고, 준.희 님의 표지판과 손글씨로 월명산이라 쓴 표지판이 나무둥치에 걸려있다.
월명산 인증.
이제 금북기맥 줄기는 이곳 월명산에서 좌측의 부여군과도 이별하고 온전히 서천군의 품으로 들어선다.
<서천군(舒川郡)>
동쪽은 부여군, 서쪽은 황해, 남쪽은 금강을 경계로 전라북도 군산시, 북쪽은 보령시와 접하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2개 읍, 11개 면, 315개 행정리(173개 법정리)가 있다. 서천은 옛부터 여러 명칭으로 불렸는데, 설림(舌林), 서림(西林), 서주(西州) 등으로도 불렸으며, 한때는 남양(南陽)이라고 불릴 때도 있었다. 서천(舒川)이란 명칭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작은 냇물이 펼쳐져서 수려한 지역을 이룬 곳이라 하여 서천(舒川)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보령시와 부여군의 경계에 장태산(將胎山, 367m)·원진산(遠進山, 271m)·노고산(老姑山, 229m)·석천산(石泉山, 209m) 등이 있고, 군내에 천방산(千房山, 324m)·희리산(希吏山, 329m)·월명산(月明山, 298m) 등 300m 내외의 산이 있다. 원진산에서 발원한 도마천(都馬川)이 봉선지(鳳仙池)에서 한산천(韓山川)과 합류하여 길산천(吉山川)을 이루어 금강에 흘러들며, 판교면 북동부에서 발원한 판교천(板橋川)이 남류하다가 남산들에서 서쪽을 지나 장구만(長久灣)으로 흘러 황해로 흐른다. 이들 하천유역에는 넓은 평야가 형성되고 관개시설도 잘되어 있어서 논농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서천군 내에는 비인면·종천면 등지에 고인돌이 분포해 있어 청동기시대부터 이 지역에 주민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마한시대에는 이 지역에 비미국(卑彌國)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에는 서천이 백제의 설림군(舌林郡)이었으며 한산에는 마산현(馬山縣)이, 비인면에는 비중현(比衆縣)이 있었다. 특히 백제시대에 크게 발전한 곳은 한산으로, 이곳의 건지산성은 백제의 서쪽을 지키는 요충지였다. 백제 멸망 뒤에도 그 유민들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756년(경덕왕 15)에 서림군(西林郡)이라고 하였고 한산은 가림군(嘉林郡)의 영현이 되었으며, 비중현은 비인으로 개칭되어 역시 가림군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서천은 이 지방 출신인 이언충(李彦忠)이 충선왕에게 공로가 있다고 하여 지서주사(知西州使)로 승격되었다. 한산은 고려시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뒤에 지한주사(知韓州使)로 승격되었으며, 감무가 있어 홍산을 겸무하였다. 비인은 1018년(현종 9)에 가림현에 속하게 되었으며, 뒤에 따로 감무가 두어졌다. 한산 출신인 이색(李穡)은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뒤에 한산백(韓山伯)이라는 작위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서천군으로 개칭되었고 한산현이 한산군으로 승격되었으며, 비인은 비인현으로 하여 홍주진관에 속하게 하였다가 그 뒤 비인군이 되었다. 비인현의 만호 김성길(金成吉)은 1419년(세종 원년)에 왜선 50여 척이 침입하자 이를 물리쳤다. 비인은 그 전에도 해적이 자주 침입했는데, 이를 방비하기 위해서 1421년에 성을 쌓았다. 성의 길이는 3,000m, 높이 2m 정도였다. 한산 출신인 이상재(李商在)는 한말 구국운동의 선구자였다. 그는 독립협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했으며,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898년에 그는 독립협회 사건으로 붙잡혔으며, 1902년에는 개혁당 사건으로 다시 구금되기도 하였다.
1913년에 서천군·한산군·비인군이 합쳐져 서천군이 되었다. 1930년 장항항이 개항하였고, 1931년에는 장항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1938년 서남면 일부와 마동면 일부가 장항면에 편입, 읍으로 승격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설립된 군내의 장항제련소는 광복 후에도 발전을 거듭하여 구리·아연·주석 등의 전문제련소가 되었다.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마서면 남산리가 서천면에, 화양면 구동리가 한산면에, 기산면 이사리와 한산면 송림리가 마산면에, 종천면 흥림리가 판교면에 편입되었다. 1979년 5월 1일 서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3년 문산면 등고리와 금덕리가 판교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에는 기산면 내동리 일부가 화양면 금당리에 편입되었다.
월명산을 뒤로하고 잠시 내려섰다가 오르면,
이내 원진지맥 분기점에 도착한다.
<원진지맥(遠進枝脈)>
원진지맥(遠進枝脈)은 금북정맥 백월산(579m)에서 남쪽으로 38.5km 떨어진 신산경표 호서정맥의 부시치고개와 놋점이고개 사이의 표고 276m 봉에서 동쪽으로 가지를 쳐, 원진산(遠進山,270m), 마가산고개, 덕림고개, 안장고개, 학산(鶴山, 168.5m), 잣티고개, 함박산(咸朴山, 90m)을 지나 부여군 세도면 가회리 금강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38.1km의 산줄기를 말한다. 표고 276m의 분기점이 최고봉일 정도로 200m 대의 낮은 구릉지대로 수시로 도로와 임도를 건너는 지맥인데, 찾는이가 적어 등산로도 제대로 없는 잡목지대로 독도에 특히 신경을 써야하는 지맥이다. 대표적인 산인 원진산의 이름을 따 원진지맥(遠進枝脈)이라 칭한다.
원진지맥 분기점 인증.
좌측 원진지맥 방향으로는 길흔적이 희미하고,
원진지맥 분기점에서 직우틀하여 내려서면,
시멘트 포장 임도에 내려서게 되고, 임도를 가로질러 수레길로 들어서면,
최근에 조성된 듯 보이는 평양조씨 납골묘가 자리하고 있고,
말끔히 벌목된 능선이 펼쳐지며 앞쪽으로 보이는 화살표 지점에서 우측 능선이 금북기맥 능선인데,
무심코 직진의 능선으로 들어섰다가 10여분 알바를 한다.
직진의 능선으로도 뚜렷한 등로가 있어서 별다른 의심을 않다가, 최근에 다닌 흔적이 없는 듯하여 지도를 확인하니 문산면 금복리 방향의 지능선을 가고 있다. 앞서가던 창병씨를 불러세워 되돌아 나간다.
10여 분의 알바를 마치고 금북기맥으로 복귀하는 창병씨.
알바에서 복귀하여 말끔히 벌목된 능선을 따라 놋점이재로 향하면,
우측 아래로 옛날에 놋점이 있어서 놋점, 유점이라 불리는 판교면 판교리 유점(鍮店)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말끔하게 벌목된 능선에는 어린 편백나무 묘목이 식재되어 있다.
돌아본 월명산 방향의 지나온 금북기맥 능선.
놋점이재 직전 Y자 갈림길에서 좌측의 뚜렷한 길은 지역민들이 다니는 좋은 길이고, 우측 길은 기맥꾼들이나 다니는 험로인데, 괜히 우측의 능선길로 들어서서는 놋점이재 절개지 상단부에서 좌측으로 고생스럽게 내려서게 된다.
좌측이 내려온 길인데, 직전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내려오면 묘지 우측으로 편히 내려올 수 있다.
묘지에서 시멘트 계단길을 따라 놋점이재로 내려서면,
놋점이재 건너편 낙석방지용 철망에 놋점이고개라 쓰인 코팅지가 걸려있다.
<놋점이고개>
충청남도 서천군의 문산면 금복리에서 서쪽 판교면 판교리 유점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다. 고개 아래에 놋점이 있었다고 하여 지명이 유래되었다는데, 유점고개라고도 부른다.
좌측 문산면 금복리 방향.
우측 판교면 판교리 유점마을 방향.
놋점이고개 들머리 묘터에서 따뜻한 커피와 창병씨가 가져온 고구마를 먹으며 10여분 휴식을 하고,
다시금 희미한 금북길에 들어서면,
제법 가파른 오름길이 이어지더니,
골프장 카터 유턴지점처럼 보이는 평탄한 능선 임도에 올라서게 되고,
자동차가 다닌 흔적이 역력한 평탄한 능선 임도길이 이어지다가,
산불감시카메라탑이 있는 249봉 쯤을 지나며,
산불감시카메라탑이 자리한 249봉 삼각점을 찾아려 했으나 관목들의 방해로 포기한다.
<249봉>
서천군 문산면 금복리 안터마을과 판교면 금덕리 산막골의 경계 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정상에는 산불감시카메라탑이 설치되어 있다. 능선 우측의 문산면 금복리 산막이골은 조선 후기 1839년 기해박해 때 프랑스 페롱신부가 사목활동을 했던 곳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산막골이라 하며, 지금은 천주교 산막골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249봉에서 우측으로 휘어지며 내려서는 임도를 따르면 고압 전기목책 경고판도 보이고,
따르던 임도가 우측 아래로 휘어져 내려가는 지점에서 좌측 능선 숲길로 들어서면,
다시 거칠고 어수선한 능선길이 이어진다.
나무들이 자란 묵묘를 지나,
갈비가 푹신하게 깔린 호젓한 등로가 이어지더니,
고개 건너편 들머리 옆에 작은 표지판이 걸려있는 노루지고개에 내려선다.
<노루지고개>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 금단 마을과 문산면 수암리 노루지 마을을 잇는 고개로, 2011년 임도 신설공사를 하였다는 표지석이 있다.
우측 판교면 금덕리 산막이골 방향.
좌측 문산면 금복리 노루지골 방향.
노루지고개 한켠에는 성지순례길 이정목과 임도신설공사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다.
이정표의 독뫼공소가 뭔지에 대해 사뭇 궁금해서 창병씨에게 물어보았더니 역시나 잘 모르겠다고 한다. 둘 다 종교와는 담을 쌓고 살아서 천주교 용어에 대해서는 잼병인지라, 오늘 불참한 손총무님이 옆에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든다. 나중에 쉼을 하면서 검색을 해 보았더니, '공소(公所)'는 가톨릭에서 본당보다 작은 교회 단위로, 본당 사목구에 속하여 있는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예배소나 그 구역을 이른다. 따라서 '독뫼 공소'란 독뫼 마을에 있는 공소를 뜻한단다.
노루지고개에서 독뫼공소 방향 금북기맥 들머리로 들어서면,
성지순례길이라 그런지 지금까지와는 달리 등로가 뚜렷하고 가이드 로프까지 매어져 있고,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 이내 완만하고 호젓한 능선길을 따르게 된다.
주변 지능선들이 구릉처럼 완만하게 이어져 있어서 금북기맥 능선의 구분이 뚜렷하지가 앉지만, 가끔씩 걸려있는 표지기와 뚜렷한 길 흔적을 따르면,
좌.우로 길 흔적이 뚜렷한 편평한 안부쯤을 지나고,
돌아본 금북기맥 능선의 봉우리들이 언덕 수준으로 펑퍼짐 하다.
옛 산행기에는 이 부근에서 알바를 많이 했다는데,
최근에 정비된 순례길 때문인지 등로가 뚜렷하고,
호젓한 소나무 숲길이 걷기에 더없이 좋아 보인다.
이어진 순례길을 편안히 걸어서 줄무덤이 있는 작은재에 도착한다.
<작은재>
충남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와 판교면 만덕리를 잇는 고개로, 수암리와 만덕리 구간은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고 천방산을 잇는 음적사와 천룡사 임도는 비포장 도로다. 작은재의 유래는 조선시대 말기에 천주교 박해가 심하던 시절에 좌측 판교면 지역 신자와 우측 문산면 지역 신자가 이곳에 모여 공부하고 미사를 보았다고 하여 작은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천주교를 지키다가 박해를 받아 선종한 곳인데, 그때 순교 한 30여 기의 신자들 무덤이 발견되어 서천 성당에서 성지로 여기는 곳이다. 큰재는 판교면 금덕리의 삼박골에 있다고 한다.
이곳은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의 동생이 판교로 피신하여 숨어 살던 곳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천주교 박해를 피하여 판교면 금복리 작은재에 교우 마을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황석두(세례명 황루가)가 피신하였다가 잡혀서 보령 수영에서 안 주교, 민 신부와 함께 참수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판교는 자유와 진리를 지키기 위한 피신처이기도 했다. 산과 산으로 연결된 판교의 계곡마다 사연을 담고 있다.
작은재줄무덤 동쪽 800m 문산면 수암리에 독뫼공소가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작은재줄무덤>
이곳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가 있을 때에 독뫼공소(문산) 신자들과 작은재공소(판교) 신자들이 통발을 하던 장소이고, 박해를 피해 신앙을 지키다가 선종한 많은 이향 신자들이 묻힌 장소다.(30여기의 작은 무덤) 1994년 천방산 임도 개설공사를 할 때 파묘가 되었으며, 파묘시 작은 십자가 등 많은 성물이 출토되었으나 연고가 없어 어딘가에 재매장 되었다고 한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이 작은재 고개에는 이름 없이 살다 간 숱한 신앙인들의 줄무덤이 있었지만, 1994년 산림도로 개설과 함께 줄무덤 터는 콘크리트에 묻히고 말았다 한다. 당시 공사현장에서 숱한 유골과 함께 발굴된 십자가와 묵주 등 성물도 있었다지만, 연고자를 찾을 길이 없어 인근에 다시 묻었단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제는 그 위치조차 찾을 수가 없다고 한다.
‘줄무덤(줄묘)’이란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자 묘지를 말한다. 한 무덤에 여러 사람을 줄줄이 함께 묻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대원군 집정 이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할 때 순교한 교도들이 많았는데, 그 친척들이 야간을 이용하여 이곳으로 운구 암장한 것이라 한다.
작은재 봉림산 방향 들머리 전경.
주변 임도가 라이딩하기에 좋아 보인다!
작은재줄무덤 양지바른 곳에서 신앙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10여분 쉼을 하고는,
들머리로 들어서니 봉림산 입구라고 표시된 표석이 있는데,
차라리 5m 앞의 들머리에 세워 놓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 산행의 최고봉이라 그런지 봉림산 오름길은 무척이나 가파르게 이어지고,
한참을 오르니 다소간 완만해지더니,
다시 급경사를 한번 더 치고 올라 'T'자 갈림길 주능선에서 좌틀하여 완만한 능선을 따르면,
우측으로 흥림저수지와 희리산(327m)이 멋지게 조망되며 힘겨운 오름길을 보상해 준다.
<희리산(希吏山, 329m)>
희리산(327m)은 왜구가 쳐들어 왔을 때 최무선이 이곳에서 무찔렀다고 전하며, 희망을 주는 산이라 하여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희리산은 희이산(希夷山)이라고도 하는데 '아전 리(吏)' 자를 '오랑케 이(夷)' 자로 잘못 표기하여 그리된 듯하며, 현지 사람들은 흐리산 또는 흐이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희리산의 최고봉은 문수봉이다.
산 전체가 해송으로 사계절 내내 푸르름을 간직한 채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으며, 숲속의집과 해송림, 저수지가 빼어난 조화를 이루고 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숲속수련장(60인실)은 총 5객실로 강당과 식당을 갖추어 단체 이용객이 사용하기에 적합하고, 숲속의집은 소나무, 잣나무, 낙엽송, 삼나무, 해송, 층층나무, 참나무 7개 수종의 판재로 제작, 내부를 장식하여 수종 특유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숲 속에 들어가면 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와 테르핀이라는 방향성 물질이 있는데 향기 좋은 방향성, 살균성의 성분으로 스트레스를 없애고 심신을 순화하는 등 여러가지 질병을 예방하기 때문에 인체에 유익하며 수종의 95%가 해송인 희리산은 산림욕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휴양림 내에는 취사장, 세면샤워장, 급수대 등의 편익시설과 산림 및 숲의 기능과 혜택을 설명한 숲해설판, 야생화관찰원, 버섯재배원, 무궁화전시포가 있으며 체육시설로는 강돌로 특색있게 만든 물놀이장과, 농구장, 배구장이 있어 가족단위 또는 각급 학교나 단체에서 방문하여 심신과 정서를 함양하고 초.중.고 학생의 자연학습 체험의 교육장소로 손색이 없다. 뿐만 아니라 휴양림 가까이에 있는 서해안 갯벌에서 가족단위의 맛살조개잡이를 체험할 수 있어 산과 바다를 동시에 즐길 수가 있고, 휴양림에는 임도 4.4.km와 등산로 5.4km가 있어 산책이나 체력을 단련할 수 있다고 한다.
삼각점이 있는 정상 직전에 작은 사각기둥 모양의 정상석이 있는 봉림산 정상에 도착한다.
<봉림산(鳳林山, 346m)>
충남 서천군 문산면과 판교면의 경계에 위치하는 산으로, 남동쪽 1km 거리에 천방산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또한, 대수산(大蓚山)이라고도 한다. 관아의 북쪽 20리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지 도서』에 "산은 아득하고 바다는 너르다. 북쪽으로 봉림산이 쭈뼛하고, 서쪽으로 응암(鷹巖)이 우뚝하다.'라고 노래한 이승소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해동지도』에는 봉림산 (鳳林山)이라는 지명과 함께 그 산줄기에 대수산(大蓚山)이라는 지명도 표기되어 있다.
맑은 날 봉림산 정상에 서면 일망무제라고 한다. 남쪽 멀리로 장항 앞바다와 서천읍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서천의 진산이라는 천방산이 손에 잡힐듯하며, 야트막한 구릉과 너른 들판의 문산면과 시초면의 모습이 시원하게 조망되고, 홍림저수지 가운데로 장항선 철도가 지나가고 그 너머로는 해송(海松) 휴양림으로 유명한 희리산도 가까이 보인다.
서쪽 희리산 방향을 배경으로 선 봉림산 정상석.
봉리산 정상 인증.
봉림산 정상은 좁다란 능선의 볼록한 부분으로, 삼각점이 자리하고 있다.
남서쪽 서천IC 방향.
서쪽 봉림저수지와 희리산 방향.
서쪽 희리산 방향.
동남쪽 천방산 방향.
<천방산(千房山, 322m)>
천방산은 금북기맥 산줄기에서는 벗어나 있는 산이지만, 서천군 판교면, 문산면, 시초면 등 3개 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서천의 진산이다. 산이 험하거나 거칠지 않아서 보는 이로 하여금 푸근함을 느끼게 하며, 동서남 방향으로 7개 봉우리가 둘러있고 동남북 방향이 훤히 트여 시원한 풍광을 자랑한다.
천방산은 산 이름과 관련한 아래와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백제 말기 소정방이 백제를 치기 위해 기벌포(현재의 서천군 장항읍)에 진입하자 멀쩡하던 하늘이 갑자기 풍랑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에 소정방은 어느 도승에게 도움을 청했고 이 도승이 시키는 데로 천 칸의 집을 짓고 천일제를 지내자 풍랑이 가라앉았다. 이후 소정방은 군사를 이끌고 사비성으로 진격하여 백제군을 꺽고 승리를 거두었다. 그 뒤 소정방이 지은 천칸의 집은 절이 되어 천방사라고 하였으며, 이때부터 천방산이라 불리었다고 전한다. 소정방이 남겨놓은 천방사(千房寺)는 사찰로서 조선시대까지 존속되어오다가 1664년 승려들의 반란으로 불타버렸다고 전한다. 지금은 천방산 아래에 천용사가 현대적인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 천용사는 대한불교 삼론종 소속의 사찰이다.
천방산 좌측 아래로 문산면의 문산저수지가, 천방산 너머로는 시초면의 봉선저수지가 살짝 보이고,
천방산 우측 아래로는 천용사도 지척으로 내려다 보인다.
살짝 당겨본 천용사와 약사여래관음상 모습.
남쪽 기산면과 서천읍 방향.
봉림산을 뒤로하고 가파른 내림길을 잠시 내려서면 돌탑이 있는 언덕 수준의 봉우리를 지나게 되고,
좌측 천방산 방향.
가야 할 북산리 방향의 금북 능선 조망.
움직이지 않아도 미끄러질 듯한 가파른 내림길을 잠시 더 내려서면 작은재에서 이어온 임도에 내려서게 되고,
우측 작은재 방향의 임도 상태가 너무 좋아 보인다.
좌측 천방산 방향의 임도는 천룡사로 연결되는 듯하다.
임도를 건너 내림길 들머리에는 작은 밧줄이 메어져 있을 정도로 가파르다.
잣나무 조림지를 지나고,
묘지 관리용 수레길이 닿아있는 풍양조씨 가족묘지를 지나자,
널찍한 수레길이 이어지며 북산리 도로 직전 묘지를 지나며 Y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좌.우 어느 쪽으로 내려서도 되지만 우측 길이 좀 더 완만하고 잘 나 있지만,
좌측 길은 조금 걸칠지만 능선을 고수하는 것으로 보여 좌측 길로 들어서면,
이내 표지기나 기맥 등로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북산리 도로에 내려서는데, 앞서간 창병씨가 벌써 건너편 능선으로 올랐는지 보이지 않아 서둘러 길도 없는 절개지를 헤치고 건너편 능선으로 오른다.
<북산리도로/가루골고개>
판교면 등고리와 문산면 북산리를 연결하는 1차선 도로다. 우측에 있는 등고리(登古里)는 서천군 문장면의 지역으로서 높고 험한 고개가 있으므로 등고개 또는 등고(登古)라 불렸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등고리라 하여 문산면에 편입되었다가 뒤에 판교면에 편입되었다.
좌측 문산면 북산리 방향.
길도 보이지 않는 사면을 올라 능선에 오르니 비교적 뚜렷한 등로가 이어지는데, 앞서간 줄 알았던 창병씨가 북산리 도로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전화가 걸려와 능선 좌측으로 벌목지대 양지바른 곳에서 지나온 봉림산과 천방산을 조망하며 창병씨를 기다려 잠시 쉬었다가 출발한다.
커피와 빵을 나눠 먹으며 천방산과 천용사 방향을 한번 더 카메라에 담고는,
말끔히 벌목 된 능선 분기점에서 우측 능선으로 들어서면 금북길은 "역 C" 자 형태로 이어지며,
좌측으로 문산면 일대의 구릉들과 마을들이 시원하게 조망되고,
그저그런 밋밋한 언덕 수준의 봉우리에 '147봉' 코팅지가 걸려있고, 금북길은 좌측으로 휘어지며 이어진다.
잠시 후 좌측으로 뚜렷한 능선이 이어지지만, 금북길은 우측으로 내려서야 하고,
잠시 갈비가 푹신한 희미한 등로가 이어지더니,
여름에 왔으면 고생깨나 했을 넝쿨지대가 이어지며,
좌측으로 문산면 북산이 마을과 들판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겨울에 오기를 잘했다며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넝쿨지대를 지나다가,
돌아본 금북능선 너머로 지나온 봉림산과 천방산이 살짝 보인다.
오늘 산행 시작 지점인 부시치고개에서부터 일정하게 나무에 박힌 "첼로"라 쓰인 표지기가 알바가 아닐까 하며 가끔씩 불안해지는 마음에 안도감을 가져다주고,
좌.우로 희미한 길흔적이 있는 무명봉에서 우측으로 진행하면,
빼곡한 대나무 숲을 통과하여 내려서게 되고,
좌측 문산면 북산리 화약골과 우측 종천면 석촌리를 잇는 농로를 지난다.
우측 석촌리 방향.
능선 좌.우로 연이어 가족묘지들이 나타나고,
우측 석촌리 방향.
돌아본 봉림산과 천방산 방향.
족적이 희미한 숲을 잠시 더듬어 내려서면,
석촌리 고개를 지나게 된다.
<석촌리 고개>
서천군 종천면 석촌리와 시초면 문장리 마을을 잇는 고개로 대체로 나지막하고 주변에는 농지가 많다. 지도 상에는 한너울 고개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우측 고개 너머에는 종천산업단지가 보인다.
종천면은 조선 시대에는 비인현 이방면(二方面)의 지역이었다. 산세가 우람하고 또한 낮은 반면에 수려하여 전국에서 명당지로 손꼽히는 고장이다. 백제 이전부터 인류가 정착하였다는 증거로 지석리의 관돌을 증거로 할 수 있다. 충남 서부 문화권이 내륙으로 접어드는 기점이 또한 이 지역부터다.
우측 종천농공단지 방향.
좌측 북산리 방향.
석촌리 고개 건너편 들머리로 들어서서 널찍한 수레길을 따르면 풍천김씨 가족묘역이 나오고,
우측 석촌리와 희리산 방향 조망.
묘역 상단부를 지나니 버려진 표고버섯 재배단지가 나타나고,
호젓한 산길을 따르는데 좌측으로 북산2리 마을이 지척으로 내려다 보인다.
제법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이내 완만하고 호젓한 등로가 이어지다가,
육산 능선에서 하얀 차돌이 눈길을 끌고,
삼각점이 있는 사발봉(139봉)에 올라 직우틀하여 내려서게 된다.
139봉에서 우틀하여 내려서면 좌측으로 시야가 트인 벌목지대가 나타나고,
좌측 시초면 방향.
다시 숲으로 들어 완만한 능선길을 따르다가,
'ㅏ'자 갈림길이 나오면 뚜렷한 직진길을 두고, 우측 길로 들어서야 한다.
잠시 갈비가 푹신한 오솔길이 이어지다가,
좌측 화성리 전경.
우측 유해조수 방지용 그물망을 넘어 밤나무밭으로 들어서면,
우전방으로 신설된 장항선 철로와 희리산이 조망된다.
화성리 도로가 내려다 보이는,
가족묘지 옆 양지바른 곳에서 장항선 철로와 희리산을 조망하며,
창병씨가 가져온 고구마를 나누며 쉼을 한다.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어 느긋한 휴식을 가진 후 농로를 따라 내려서니,
지도에 선낭고개로 표시된 서천읍 화성1리와 화성2리를 잇는 도로가 나오고, 좌측으로 조금 이동하여 건너편 도로로 들어서서,
앞쪽으로 보이는 숲을 향한다.
돌아본 화성리 도로(선낭고개).
갈비가 푹신하게 깔린 희미한 숲길을 잠시 따르면 작은태봉산(76m) 쯤을 지나게 되고,
'ㅓ'자 갈림길에서 뚜렷한 직진 능선길을 두고 급하게 좌측으로 꺾어서 진행하면,
완만한 능선을 따라 제법 뚜렷한 등로가 이어지다가,
최근에 벌목된 능선으로 나서게 되며,
우측으로 희라산이 조망된다.
작은 봉우리에 올라 좌측 능선으로 들어서면,
용궁전씨 묘지를 지나고,
깊게 파인 옛고개 흔적을 지나,
거친 등로를 따라 우측으로 휘어지며 내려서니,
이내 광산김씨 묘지를 지나며 뚜렷한 수레길이 이어진다.
서해안고속도로 직전 Y자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진행하면,
좌측으로 서해안고속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서해안고속도로를 건너기 위해 잠시 더 도로를 따라 내려서면,
서해안고속도로를 아래로 통과할 수 있는 토끼굴이 나온다.
돌아본 금북기맥 능선 방향.
토끼굴을 통과하여 도로를 따라 좌측 금북기맥 능선 방향으로 진행하면,
언덕 위에서 좌측 능선으로 오르는 임도 들머리가 있다.
서해안고속도로 절개지 시작 지점에서 숲길로 들었던 창병씨와 다시 만나 널찍한 수레길을 따르면,
수레길은 가족묘지까지만 연결되어 있고, 길 흔적이 거의 없는 능선을 잠시 치고 오르면,
편평하게 임도가 닦여있는 태봉산 정상부에 오르게 되고,
널찍하게 닦여진 임도를 잠시 따르면,
태봉산/큰태봉봉산(90m) 정상에 도착한다.
<태봉산(太峰山, 90m)>
충남 서천군 서천읍 태월리에 있는 산으로 지도에표 표시가 되어 있는 산이지만, 기맥꾼들의 표지기 외에는 별다른 표식이 없다.
태봉산 정상 인증.
임도 끝 지점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태봉산 정상에서 다시 임도 끝 지점 기맥길로 돌아나가, 진행방향에서 우측 사면으로 들어서면,
아래로 철망 울타리가 쳐진 농장쯤이 내려다 보이고 길이 없는 사면을 태충 내려서서,
농장 철망 울타리를 따라 진행하는데,
길 흔적이 분명치 않은 거친 능선을 더듬어 진행하다가,
철망 울타리와 이별하고 다시 숲길로 든다.
돌아본 태봉산 방향.
앞쪽으로 시야가 트이며,
폐 장항선 철길로 내려서고,
이제는 사람들의 산책로로 사용되는 옛 장항선 철로를 지나게 된다.
<장항선(長項線)>
충남 서산시를 거쳐 천안과 장항을 잇는 철도다. 충남 서북부에 위치한 서산 등의 내포 지역은 일제 강점기 철도 교통의 사각지대에 속하였다. 조선 경남(京南)철도주식회사가 사설 철도로 1922년 천안역~온양온천역 구간을 시작으로 1931년 남포~판교 구간까지 단선(單線)으로 개통해 놓았고, 당시 명칭은 충남선이었다. 해방과 한국전쟁이 끝난 1955년 충남선은 장항선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이후 선로 개량이 전혀 이뤄지지 않아 한쪽 방향 열차가 다 지나가거나 대피선으로 대피할 때까지 반대방향 열차는 그대로 서 있어야 하는 일이 많아 열차 지연도 매우 잦았다. 2007년 개량화 1단계 사업의 일환으로, 천안~온양온천의 복선전철화를 비롯하여 온양온천~신창의 복선전철화 및 신창~신성, 주포~남포, 간치~장항 구간을 직선화 하였다. 또한 2008년 금강을 횡단하는 철교를 건설하여 강 건너의 군산선과 연결하였다. 이에 군산선 대야~익산 구간을 편입하는 동시에 군산선이란 이름이 소멸되었다. 동시에, 장항역이 서천군 마서면으로 이전, 노선 이름의 유래인 서천군 장항읍에는 지나가지 않는 노선이 되었다. 2008년 12월 15일, 장항선 신창역까지 수도권 전철이 연장 개통되었고, 이 구간에선 누리로와 전철이 같이 운행되었다. 현재 청량리/서울~신창 간 급행 전철이 운행 중이며, 서울과 신창을 오가던 누리로 열차는 그간 저조한 수요로 폐지와 부활을 반복하며 몇 번의 고비를 넘기다 2020년 5월 22일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폐 장항선 판교역 방향.
폐 장항선 서천역 방향.
폐 장항선 철길에서 건너편 농로를 따라 우측으로 진행하여 절개지를 올라,
묘지와 밭의 경계를 따라 숲으로 들어서면,
등로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고,
태충 방향만 잡고 무작정 가파른 사면을 치고 오르면,
오석산 능선 위로 이어지는 정규 등산로에 올라서서 좌측 방향 등산로를 따라 진행한다.
천신만고 끝에 넋이 나간 모습으로 정규등로에 들어서서 잠시 진행하다가,
벤치가 있는 등로 옆 양지바른 곳에서 거친 산길의 고됨을 씻으며 집나간 넋을 다시 찾아온다.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어 편안한 오석산 등산로를 따르는데,
좌측으로 서천군 기산면 벌판이 펼쳐지고,
묘지 주변에 꽂아놓은 총천연색 조화가 그다지 좋아보이지를 않는데, 고인이 편히 잠들기는 글러먹은 듯하다.
정자 쉼터가 있는 'ㅓ'자 갈림길에서 기맥길은 좌틀하여 진행하고, 우측 직진길은 오석산 정상으로 이어지는데, 70m 거리의 오석산 정상을 다녀온 창병씨가 그냥 능선으로 아무런 표식이 없었다며 괜한 헛걸음 했다고 투덜거린다.
삼거리 갈림길에서 기맥길은 좌틀하여 서천여자정보고등학교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
계속해서 멋진 산책길이 이어지고,
좌측으로 서천의 들판과 어울리는 산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긴 산행으로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는 멋진 산책로를 따르다가 서천여자정보고등학교 방향 갈림길을 지나게 되고,
기맥 길은 클래시움 APT 방향.
잠시 더 호젓한 솔숲길을 따라 내려서면,
서천읍 사곡리의 클래시움 아파트가 나오고,
도로로 내려서서 잠시 진행하면 사곡리 도로가 나온다.
서천읍내 시내 도로인 사곡리 도로 건너편 절개지로 이어지는 기맥 길은 좌틀하여 잠시 진행하다가,
절개지가 끝나는 부분에서 우측 밭으로 올라,
다시 길이 없는 사면 숲으로 들어서서,
대충의 방향만 잡고 무턱대고 오르면,
서천읍성 성곽길에 올라서서 좌측 성곽길을 따라 진행한다.
토성의 뚜렷한 형태가 남아있는 능선 위로 이어진 성곽길을 따르면,
우측 아래로 서천여고 건물이 내려다 보이고,
서천여고 갈림길을 지나,
솔잎이 양탄자처럼 깔린 서천읍성 성곽길을 따르면,
군데군데 치(雉)로 보이는 돌출부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서천읍성은 제대로 만든 성곽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치(雉)는 성벽 바깥으로 덧붙여 쌓은 시설로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는 데 사용되는 시설이다.
2019년에 복원공사가 마무리된 서천읍성 동문 도착.
복원된 서천읍성 동문 주변 모습.
<서천읍성(舒川邑城)>
서천읍성(舒川邑城)은 충남 서천군 서천읍 군사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읍성(邑城)으로, 시가지의 동쪽 야산에 축조한 포곡식의 성곽이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 자료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읍성은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고을과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쌓았는데, 이 읍성도 그 과정에서 세종대에 축조되었다. 현존하는 읍성은 동서로 긴 직사각형에 가까우며, 둘레는 1,190m이다. 성벽은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돌을 사용하여 쌓았으며, 성돌과 성돌 사이에는 작은 돌로 쐐기돌을 끼워 넣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부대시설로는 치성 14개소가 확인되고 있는데 외벽만 돌로 쌓고 내부는 흙으로 채웠다. 출입구는 동문과 남문 2곳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성벽 밖에는 동.서.남 벽에서 8~10m 떨어져 폭 5~6m, 깊이 2~3m로 도랑을 판 해자시설이 남아있다. 성 안에는 관아와 건물 및 우물 등이 있었으나 각종 시설물로 인해 원래의 모습을 잃어 확인되지 않는다. 전설에 의하면 여자 100명이 성을 쌓고 장사 1명이 홍여다리를 짓는 내기를 하였는데, 여자들이 성을 다 쌓고 즐거운 함성을 지를 때 장사가 급히 마지막 돌을 끼워서 똑같이 끝나 무승부가 되었다고 한다.
서천읍성 동문 모습.
좌측으로 서천향교도 보인다.
<서천향교>
1413년(조선 태종 13년)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전하는 말에 의하면 756년(경덕왕 15년) 처음으로 문산면 문장리 향교골 돌고개 쪽에 암자 형식으로 세워졌다가 1314년(충숙왕 1년) 서부면 동조리로 옮겼으며, 1413년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고 한다.
1869년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보수하였으며, 1983년 폭설로 대성전이 붕괴될 상태에 놓여있던 것을 1984년 다시 고쳤다. 현존하고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고, 홍살문 밖에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10철(十哲).송조5현(宋朝五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모셨으며, 봄.가을로 향사를 받들어 온다.
돌아본 서천읍성 동문.
서천읍성 동문을 지난 사거리에서 직진의 능선 방향 숲길로 들어서면,
이내 서천성당이 있는 숲길 날머리가 보이고,
서천읍 시가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서천군(舒川)>
서천은 옛부터 여러 명칭으로 불렸는데, 설림(舌林), 서림(西林), 서주(西州) 등으로도 불렸으며, 한때는 남양(南陽)이라고 불릴 때도 있었다. 서천(舒川)이란 명칭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작은 냇물이 펼쳐져서 수려한 지역을 이룬 곳이라 하여 서천(舒川)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금북기맥이 금강과 만나는 서천군(舒川郡)은 충남 서해안 남쪽 끝에 자리하는 고장이다. 장항은 서천군에서도 가장 남쪽 지역으로 금강 하구에서 전북 군산과 마주한다. 서천군(舒川郡)은 몰라도 장항읍(長項邑) 만큼은 아는 시절이 있었는데, 이는 장항선 철도와 장항제련소의 명성이 한몫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장항제련소는 초딩 시절 사회과부도 책에 사진으로 오르던 시절이 있었기에 더욱 유명했으리라. 어릴 적 장항읍에는 서천읍에는 없는 것들이 있었다. 항구와 선박은 물론이고, 장항제련소, 비료공장, 제지공장, 유리공장 등이 활기차게 가동이 되었었고 세무서, 경찰서, 등기소 등이 서천군의 소재지인 서천읍을 제치고 장항읍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관공서가 보령시나 서천읍으로 통폐합 또는 이전으로 한결 조용해진 항구가 되었다.
서천읍 조망.
서천성당.
서천성당 앞으로 나와,
앞쪽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진행하면,
좌측으로 서천문예의전당을 지나게 되고,
서천로에 접속하여 좌틀하여 서천오거리 방향으로 진행하면,
월남 이상재 선생의 동상이 자리한 서천오거리에 도착하여 금북기맥 세번째 산행을 마무리한다.
<서천오거리(사곡로터리)>
서천오거리에는 독립운동가이며 정치가, 민권운동가, 청년운동가인 서천 출신 한산이씨 월남 이상재 선생 동상이 로터리 가운데에 자리한 오거리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태어났으며,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조선의 자주 자강 평등을 주장한 구한말 독립운동가이자 신간회를 구성하여 기회주의자를 배격하고 민족의 독립을 강조하는 등 개화운동의 선구자였다.
서천오거리 직전의 산우각이라는 중식당에서 해물짬뽕으로 점심을 때우고,
택시로 산행 출발지인 부소치고개로 복귀하여 차량을 회수하여 귀갓길에 오른다.
등로가 거칠다는 기맥길이라 살짝 염려스러웠지만,
예상보다 등로의 상태가 양호하다.
일부 등로의 흔적조차 없는 곳도 있기는 했지만,
노오란 솔잎이 푹신하게 깔린 구릉지대의 등로는
산객으로 하여금 한결 푸근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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