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한북기맥(오두지맥) 2차(오산리고개~오두산) 경기도 고양시, 파주시.
산 행 일 : 2021. 03. 06.(토)
산행코스 : 오산리고개/상촌고개~영산수련원~103봉~해방교회공원묘원~100봉~도내고개(생태통로)~헬기장봉
~경의선/1번국도~다락고개~118.8m봉~헬기장봉~월롱산~5번군도~기간봉갈림길임도~200봉~21번군도/물류센터앞~54.3봉~바구니고개(소리개고개)~기독교공원묘원~131봉(한려산)~동화경모공원묘지~각시고개~보현산~탄현지방산업단지~성동사거리~117봉~자유로~오두산(통일전망대)
(도상거리 약 28km, 9시간 소요)
산행참가 : 2백두.
<산행지도>
지난해 12월 한북기맥(오두지맥) 첫 구간을 걸은 후 3개월만에 두번째 구간이자 마지막 구간을 걷기로 한다. 새상만사가 그러하듯 첫구간을 함께 걸었던 인원은 5명이었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산행이 미뤄지면서 끝내는 2명이서 한북기맥 종주를 마감하게 되었다. 꼭 맞는 표현은 아니지만 옛말에 "쇠뿔도 단김에~~"라는말이 있듯이 매사가 의기투합할 때에 바로 진행하는 게 좋다는 예기로, 사소한 걸림돌 때문에 일의 진행을 뒤로 미루게 되면 더욱 진행이 어렵게 된다는 예기가 아닐까 한다. 아무튼 코로나19로 산우회 회원들을 뵙지 못한 지도 꾀나 긴 시간이 흐르고 있는데, 아무쪼록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새벽 5:45 동작역에서 창병씨와 만나 한적한 도로를 달려 산행 출발지인 오산리고개를 향하는데, 네비 아가씨가 이끄는 데로 진행하다 보니 전혀 생소한 문산수원간 고속도로를 타게 되었고, 비싼 통행료를 지불한 대가로 예상보다 20여분 일찍 목적지에 도착하여, 지도에서 보아두었던 장소에 주차를 하고는 산행 준비를 한다.
상촌고개라고도 부르는 오산리고개 들머리의 기도원 표석 아래 길가에 주차를 하고,
산행 준비를 하며 바라본 남동쪽 하늘에는 아침해 대신에 하현달이 외로이 걸려있다.
<오산리고개>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오산리와 신산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다. 고개 동편에는 파주 오산일반산업단지가 있으며, 이 단지는 주로 인쇄와 종이 관련업체들이 많이 입주해 있다.
오산리고에서 출발하여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인적이 뜸한 도로를 따라 기도원 방향으로 진행하니,
바로 영산수련원 입구가 나온다.
<영산수련원>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교회인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운영하는 영산수련원과 금식기도원, 그리고 추모공원이 있다.
오늘 먼 길을 함께 걸을 창병씨가 당당한 걸음으로 한북기맥 능선을 찾아간다.
최근에 선두대장 창병씨가 회사에서 전무님으로 승진을 하였다니 김전무님으로 호칭을 바꿔 불러야 한다. 하지만 아직은 승진턱을 내지 않았으니 그냥 김상무님이라 부르는데, 이도 코로나19로 5인 이상 집합이 금지된 상태라러 부득이한 상태이고 앞으로 얼마나 더 오랫동안 지속될지 모르는 상황이니 미리 비대면 축하 메시지라도 보내고 약간의 책임감을 안겨드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한다.
"김 전무님 영진을 축하드려요!!!"
기도원 입구 T자 삼거리에 도착하면 우측은 기도원 방향이고,
정면 좌측으로 보이는 주차장 뒤편에 공원묘원을 거쳐 103봉으로 오르는 임도 들머리가 있다.
주차장 뒤편의 임도로 들어서서 공원묘지 가장자리를 따라 잠시 오르면,
공원묘지 상단부에 정자가 보이고,
공원묘지 위에서 바라본 광탄면 소재지 방향으로,
순복음교회에서 조성한 엄청난 규모의 묘원과 기도원, 수련원 시설이 한눈에 들어온다.
<광탄면(廣灘面)>
광탄면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술이올현에 속한 곳이었다. 그 후 통일신라 때에는 한주의 봉성현, 고려 전기에는 양주, 후기에는 양광도의 서원현, 그리고 조선 말기까지 파주군에 속한 곳이었다. 광탄이라는 명칭이 1841년 '파주목읍지'에 이미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그 이전부터 현재의 광탄면과 거의 같은 지역이 같은 이름으로 불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지역은 양주군 백석면과 광적면 양쪽에서 흘러내린 물이 문산천으로 합류하는데, 이것이 넓은 여울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한자 말로 광탄(廣灘)이라 한다.
정자 뒤편 능선에 올라서니 잘 정비된 등로와 이정표가 있고, 한북기맥은 좌틀하여 103봉 방향으로 이어진다.
능선 등로를 따르면 군데군데 성경 글귀가 적힌 안내판과 체육시설이 보이고,
이내 삼각점이 있는 103봉 정상에 도착하여서는 우틀하여 진행한다.
옛날 산행기에는 이곳을 좌방산이라 한다는데, 이곳이 좌방산이라는 구체적인 증거는 찿을 수가 없다.
따르던 뚜렷한 등로는 안부에서 우측으로 이어지고 기맥능선으로 보이는 직진 방향의 희미한 등로를 따르면,
군부대 철조망 울타리를 따르게 되고,
돌아본 103봉 위에는 반달이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잠시 철조망 울타리를 따르다가 우측 아래로 보이는 등로에 내려서고,
따르던 등로는 이내 우측으로 휘어지는 지점에서 다시 좌측 철조망 울타리 옆 거친 등로로 들어선다.
원형철조망이 덧대어진 울타리 옆길을 따라 120봉쯤을 지나고,
앞쪽 멀리로 보이는 두번째 봉우리까지 철조망 울타리를 따라 진행하게 된다.
등로가 오르내림이 심하고 거칠어지며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배낭에 갈무리하고,
'ㅏ'자 갈림길이 있는 능선분기점에서 직우틀하여,
해방교회 공원묘원 가장자리 울타리를 따라 내려서면,
좌측의 삼각지성당 공원묘원과 우측의 해방교회 공원묘원을 경계하는 안부를 지나게 된다.
돌아본 군부대 울타리가 있는 능선분기점 방향.
안부를 지나 다시 능선으로 올라도 묘지들이 줄지어 이어지며,
오늘 한북기맥 등로는 군부대와 공원묘지를 번갈아 누비게 될 것임을 짐작케 한다.
삼각지성당 하늘묘원 가장자리 능선을 따라 진행하면,
기맥길은 공원묘원 상단부에서 다시 뚜렷한 등로에 접속하여,
숲으로 싸인 100봉 정상 직전에서 우틀하여 아래로 이어지는데,
여러 기맥길에서 늘 보아 온 낯익은 표지기가 반갑고,
뚜렷한 수레길을 따라 내려서면,
생태통로 위에 쉼터가 조성된 도내고개에 도착한다.
<도내고개>
좌측 파주시 월롱면 영태리와 우측 도내리를 잇는 고개로, 예전에 탱크 방호벽이 있었던 자리를 철거하고 생태통로를 설치해 놓았다. 우측의 월롱면 도내리(都內里)는 조선시대 자곡면 지역으로, 도감 벼슬을 한 사람이 살았다 하여 도감골 또는 도감동이라 하였다. 그 마을 위에 있다고 해서 도내고개라 부른다고 한다.
우측 도내리 방향.
좌측 영태리 방향.
도내고개 쉼터에서 잠시의 쉼을 뒤로하고 호젓한 수레길을 따라 편안히 진행하니,
꾀나 큰 규모의 헬기장이 있는 봉우리에 올라서게 되고,
좌측 헬기장으로 이어지는 임도를 두고 직진 방향의 우측 숲으로 들어서면,
기맥길은 소나무숲으로 희미하게 이어지다가,
임도가 지나는 안부로 내려서서,
공사판으로 변한 기맥능선을 더듬어 진행한다.
돌아본 헬기장이 있는 능선 방향.
좌.우로 공장이 들어서며 조만간 다니지 못하게 될 듯 보이는 능선을 더듬어 진행하면,
옛 산행기에는 수로가 가로질러 이어지던 도로가 나오는데, 지금은 옛날의 콘크리트 수로는 없어진 상태이고,
기맥길은 좌측의 넵스홈이라는 가구회사 옹벽을 따라 앞쪽으로 보이는 능선으로 올라 우틀하여 진행하게 된다.
좌측의 넵스홈 공장 경계를 따라 진행하여 능선으로 오르는 사면으로 들어서면,
등로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가시나무와 작은 관목들이 우거져 진행이 무척이나 어렵고,
어렵게 능선으로 오르면 군부대 울타리가 나오며 제법 뚜렷한 족적이 우측으로 이어져 있어서 안도의 한숨을 들이키며 돌아본 한북기맥 방향.
부대 울타리를 따라 모퉁이를 돌아서 계속 진행하면,
철조망 울타리를 따르면 대와 우측 아래의 월롱체육공원을 연결하는 안부 도로를 지나게 되고,
잠시 더 진행하면 군부대 울타리가 철망 울타리로 바뀌며 더 이상 등로의 흔적이 보이지 않지만,
철망울타리를 자세히 살피면 고정되지 않아 밀치고 들어설 수 있는 곳이 있어서 울타리 안으로 들어설 수 있다.
세광씨앤에이치라는 회사 안에서 숲을 따라 잠시 진행하면,
세광씨앤에이치 정문 진입 도로에 접속하게 되고, 이후 도로를 따라 1번 국도까지 진행한다.
삼거리에서 좌측은 군부대 정문이므로 우측 길로 접어들고,
우측에 위전3리 표석이 있는 삼거리에서 좌측 도로로 진행한다.
우측에 위전3리 표석이 있는데, 옛날에서 이곳에서 사진의 좌측 공장 방향으로 진행하여 1번 국도 아래의 경의선 철길을 무단횡단 하였지만, 최근에는 공장들이 들어서며 기맥길을 막고 있어서 도로를 따라 1번 국도의 횡단보도를 건너 안전하게 경의선 철길을 통과하게 된다.
<위전리(葦田里)>
위전리(葦田里)는 조선시대 자곡면 지역으로 다락고개 밑이 되므로 다락고개.달.누현.위전이라 하였다. 위전은 옛날에 마을 주변에 갈대가 무성하고 배(舟)가 왕래하였는데, 그 후에 갈대를 베고 마을을 이루어 붙인 이름이다. 옛날에는 지금의 영도초등학교 앞까지 배가 올라왔었다고 한다.
잠시 도로를 따라 진행하여 1번 국도 횡단보도를 건너고,
우측 문산 방향으로 1번 국도를 따라 진행하면,
경의선 철길을 위로 건너게 되고,
교량을 지나면 이내 좌측으로 들어서라는 희미한 흔적과 표지기도 한두 개 보인다.
지나온 1번 국도와 경의선 철길 모습.
경의선 철길 옆에 있는 창고건물 뒤편으로 들어서면,
우측의 한북기맥 능선과 나란히 이어지는 도로를 따르다가 철대문을 가볍게 우회하여 통과하고,
잠시 도로를 따르면 'ㅏ'자 갈림길이 나오는데, 우측의 거친 기맥능선을 두고 계속 직진의 도로를 따른다.
공장재대 도로를 따라 다락고개로 이어지는 대로에 접속하여 우틀하여 잠시 더 진행하면,
탱크 방호시설이 있는 다락고개에 도착하여 기맥길은 급좌틀하여 계속 도로를 따라 진행하게 된다.
한북기맥 능선은 하늘색 화살표 방향으로 이어지지만, 잠시 후 수원문산간고속도로 월롱 IC가 한북능선을 차지하여 진행이 불가능하다.
<다락고개>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에서 금촌읍으로 연결되는 368번 지방도(산들길)가 지난다. 이곳도 전방지역이라 그런지 도로에 어김없이 대전차 방호벽이 있다. 「'파주시지」에 따르면 월롱은 '높은 곳'을 뜻하는 우리말 다락을 한자로 쓴 것이다. 月(월)은 우리말 '다'나 '달'을 한자로 쓴 것이고, 龍(롱)은 '락'이 '랑'이나 '롱'으로 변한 것이다. 실제로 월롱산은 '다랑산'이라고도 불린다. 월롱산 주변에는 '다락고개', '달앗'과 같은 지명이 아직도 남아있다.
산들로를 따라 예비군훈련장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좌후방으로 잠시 전에 지나온 1번 국도와 다락고개 사이의 한북기맥 능선이 공장건물들 뒤로 가늠되고,
수원문산간고속도로를 건너는 산들로 교량을 건너게 된다.
좌측 금촌 IC 방향.
우측 월롱 IC 방향.
고속도로를 지나면 이내 산들로를 두고 우측 예비군 훈련장 방향 도로로 들어서야 하는데, 또다시 방호벽이 설치되어 있다. 옛날 한남정맥 능선에서도 군포 이후부터는 군부대 울타리와 함께 했었는데, 이곳 한북기맥 파주구간도 돌아서면 군부대와 탱크 방호시설이 나타난다.
탱크 방호시설을 지나면 이내 월롱 IC 진입도로가 나타나며 좌측으로 휘어지는 도로를 계속 따르면,
360번 지방도 덕은2교차로가 나오는데, 직진의 예비군훈련장 방향으로 진행한다.
교차로를 건너 예비군훈련장 방향 도로를 따르면,
예비군 훈련장 정문 앞에서 좌측 울타리를 따라 산길로 들어서며 다시 한북기맥 능선에 접속하게 된다.
예비군 훈련장으로 사용되는 능선을 따라 오르면,
정상부에 자리한 송전탑을 지나 월롱산 이정표가 세워진 등산로에 접속하여 우측 월로산 방향으로 진행한다.
삼각점과 깃대가 설치되어 있는 118.8봉 정상에서 인증을 남기고,
예비군 훈련장으로 쓰이는 능선을 두고 좌측의 월롱산 등산로를 따르면,
예비군 훈련장으로 쓰이는 한북기맥 능선 모습.
이내 기맥능선과 월로산 등산로가 합쳐지고,
잘 정비된 월롱산길 등로를 따라 안부를 지나게 된다.
기맥길을 월롱산 정상 방향이다.
호젓한 소나무숲 쉼터에서 진한 커피 향을 음미하며 10여 분간 휴식을 하고서 멋진 등로를 유유히 따르다가,
짧은 암릉을 오르면 커다란 돌탑이 자리한 능선을 지나게 되는데,
우측에는 LG디스플레이 파주공장이 자리하고 있고,
좌측이 절벽인 능선 소나무숲에 벤치들을 설치해 놓아 멋진 조망을 즐기며 쉬어가기에 좋아 보이는데,
좌측 금촌과 교하 방향으로는 지나온 한북기맥(오두지맥) 능선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파주시 금촌과 교하>
지금의 금촌읍은 백제 근초고왕(346~375) 시기에는 백제 세력권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 일대는 천정구(泉井口)라는 지명으로 불렸다. 그 후 5세기 고구려에 귀속되었고, 군현제가 도입됨에 따라 천정구현이 되었다. 이후 557년(진흥왕 18)에 신라의 북한산주에 속하게 되었고, 삼국통일 후에는 한산주에 속하게 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는 지방제도가 정비되면서 교하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고려시대 당시 교하군은 처음에 양주, 1063년(문종 17)에는 개성부, 그리고 1390년(공양왕 2)에는 양광도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1394년(태조 3) 교하현으로 강등되어 한양과 원평군으로 그 소속이 변하다가, 1687년(숙종 13)에는 죄인의 출생지라는 이유로 혁파되기도 하였으나, 1691년 다시 교하현으로 복구되었다. 1731년(영조 7) 교하 읍치(邑治)가 인조의 능인 장릉의 이전지로 결정되면서 다시 교하군으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 부군제가 실시되면서 이 지역은 일시 파주에 속했다가 교하군으로 복귀하였다.
현 금촌읍 지역은 1899년(광무 3) 당시 교하군 아동면, 현내면 일대였는데, 1914년 4월 1일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시 교하군 아동면의 신금촌, 야동리, 아동리, 금릉리와 현내면의 맥금리, 검산리 지역, 지석면의 하지석리의 일부 지역, 청암면의 갈현리 일부 지역, 파주군 자국면의 용은동 일부 지역이 병합되어 아동면이라 하였다. 한국전쟁 와중인 1.4후퇴 당시에 군청이 문산리에서 아동면 금촌리로 옮겨오면서 군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좌측 용상사 방향 갈림길을 지나,
우측 아래로 LG기숙사 방향 갈림길 삼거리에서 좌틀하여 오름길을 잠시 오르면,
월롱산성지인 편평한 월롱산 정상부에 올라서게 된다.
편평한 공원길 분위기의 등로를 잠시 따르면 월롱산성 안내판이 있는 임도가 나오는데, 기맥길을 이곳에서 기간봉을 향해 우측으로 도로를 따라 내려서게 되고, 월롱산 정상은 직진의 계단길로 올라가야 한다.
갈림길 이정표와 월롱산성 안내판.
<월롱산성(月籠山城)>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월롱산 정상부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 시기에 초축된 테뫼식 성곽으로, 한강유역에 자리한 백제가 남진하는 고구려와 말갈 세력을 방어하고 나아가 임진강유역과 한강 하류의 교역망을 장악하기 위하여 축조한 성곽이다.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한 월롱산 정상부 천험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한 백제 산성인데, 성 안의 정상부에 오르면 동서남북으로 매우 조망이 좋아 시야가 매우 넓음을 알 수 있다. 북동쪽으로는 파주일대 평야와 임진강 연안이 한눈에 들어오며, 서쪽으로는 교하 일대의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또한 남쪽으로는 고양 일대와 북한산과 함께 멀리 관악산이 조망이 되고 있다.
산성은 월롱산의 정상부와 9부 능선상에 축조되었는데 현재 성벽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성벽은 북동쪽으로는 자연절벽을 이용한 천연지세를 갖추고 있으며 동남쪽은 산의 경사면을 이용하였는데 군사용 참호시설이 성벽을 따라 개설되어 있다. 성의 전체 형태는 남북이 길쭉한 세장한 타원형이다. 성벽은 천연적인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거의 수직의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성내에는 고도의 차이가 거의 없는 평탄지가 형성되어 가용면적이 매우 크다. 현재 체육공원이 들어서 있는 곳에서 많은 양의 백제 토기편이 채집되어 매우 주목된다. 이밖에도 성내 중앙으로 개설되어 있는 도로와 남쪽 헬기장 주변에도 백제 토기편이 산재한다.
월롱산성의 좌우에는 임진강의 주요 지류인 문산천과 곡릉천이 흐르고 있다. 동쪽의 문산천은 북류하여 임진강 하류로 흐르고 있으며, 남쪽의 곡릉천은 서쪽으로 흘러 오두산성 남쪽에서 한강하류로 합류한다. 주변 관방유적으로는 서쪽으로 6㎞ 지점에 오두산성이 있으며, 남서쪽으로 곡릉천을 사이에 두고 4㎞ 지점에 장명산 보루가 있어 삼각형 형태로 배치하고 있다. 또한 동쪽으로 문산천로(汶山川路)를 사이에 두고 5.5㎞ 지점에 봉서산성이 대응하고 있다. 즉 월롱산성은 좌우로 흐르는 주요 하천로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천을 사이에 두고 4~5.5㎞ 거리에 대응하는 성곽과 보루가 있어 주변 하천로를 통제하고 차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나아가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교하면 일대 평야지대의 중앙부에 위치하여 거점성으로서 양강의 하류 유역을 모두 관할할 수 있다는 점, 즉 임진강을 도하하여 남진하는 세력과 한강을 통해 육지로 진입하는 세력을 동시에 통제할 수 있는 주요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지리적인 이점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계단을 올라서면 바로 월롱산 정상석(229m)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남쪽으로 200여 미터 지점에 또 다른 정상석(218m)과 삼각점이 있다.
<월롱산(月籠山, 229m)>
경기도 파주시의 월롱면에 위치한 산이다. 월롱면과 탄현면의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 기간봉(旗竿峰)과 연결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주내 서쪽 15리 지점에 위치한다."라고 되어 있고 『여지도서』와 그 이후에 발간된 문헌에서는 교하군(交河郡)과 경계를 형성한다는 기록이 추가되었다. 월롱산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월롱면이라는 지명도 생겨났다. 조선 시대에 발간된 『해동지도』, 『조선팔도지도』 등에서도 월롱산이 파주군과 교하군의 경계 지점에 표시되어 있다. 산 일대에는 월롱산성이 있다.
남서쪽 한북정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장명산 방향.
서쪽 가야 할 기간봉 방향.
서북쪽 임진강과 파주시 장단면 방향.
<파주(坡州)>
옛글에는 이 고장을 술이홀현(고구려), 봉성현(신라), 서원현(고려)이라 하다가, 조선 태종 무렵에 와서는 원평도호부라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왕위에 오르는 바람에 수양대군의 아내가 정희왕후가 되었고, 왕비는 이곳에 살던 파평윤씨 윤번의 딸이었다. 그래서 이곳이 왕비의 내향(內鄕)이라고 해서 윤씨의 본관인 '파평'의 '파(坡)'에 고을 '주(州)'로 이름하고 '파주목(坡州牧)'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파주의 인물로는 율곡 이이, 황희정승, 문숙공 윤관장군, 동의보감을 만든 허준, 구봉 송익필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이 이곳 파주이다.
정상부 우측 가장자리를 따라 남쪽으로 200여 미터 진행하면,
또 다른 월롱산 정상석(218.5m)이 자리하고 있다.
<월롱산(月龍山, 218.5m)>
경기도 파주시 금촌읍 야동동과 월롱면 덕은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고령산 북맥 벌판 가운데로 솟은 산정에 배가 떠나는 모양의 형국이 있는데, 마치 반달과 모습이 흡사하여 월롱산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옛날 청전구현(교하현) 청사가 있어 선성이라 불리기도 한다. 월롱산은 예로부터 신산으로도 알려져 있다. 월롱산 내령은 크게 두 개의 봉우리로 나누어져 있는데, 월롱면 덕은리와 야동동 쪽을 '파주 월롱산'이라 하고, 탄현면 금승리 쪽을 '교하 월롱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산 입구에는 용주서원이 있으며 용상사라는 사찰이 있다. 전체적인 산세는 육산이지만 능선 곳곳에는 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멋진 전망대가 여럿 있고, 특히나 정상부는 육산에서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바위 절벽이 있어 마치 해안가의 절벽을 연상케 한다. 정상부의 바위를 오르면 멋진 전망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된다.
정상석 남쪽에 붉은 깃발이 내걸린 암릉이 있는데,
깃발 아래에는 월롱산 삼각점이 설치되어 있다.
돌아본 월롱산 정상부 모습.
월롱과 백석 방향의 걸어온 한북기맥 능선 조망.
남쪽 금촌과 교하 방향 조망.
살짝 당겨본 운정신도시 방향 우측 뒤로 보이는 산이 한북정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장명산쯤이다.
맑은 날에 왔으면 동쪽으로 북한산은 물론 남쪽으로 고양과 파주를 감싸고 흐르는 한강도 조망할 수 있을 듯한데 아쉬움을 남기고,
널찍한 공터와 철쭉이 식재된 공원 도로를 따라 돌아나가면,
입구 갈림길로 돌아나와 도로를 따라 기간봉 방향 한북기맥길로 진행한다.
급경사의 S자 시멘트 포장임도를 따라 내려서면,
따르던 포장 임도는 좌측 아래로 내려가고 기맥길은 직진의 비포장 임도로 이어져,
갈림길 이정표의 팔각정자 방향이 기간봉 방향 기맥길이다.
헬기장을 지나고,
따르던 임도가 우측 위로 휘어지는 지점에서 기맥길은 좌측 능선 숲길로 들어선다.
비교적 뚜렷한 능선길을 따르다가 우측 아래로 내려서면,
탱크 방호시설이 있는 금탄고개에 도착하게 된다.
<금탄고개>
경기도 파주시 금촌읍 야동동에서 탄현면 축현리를 잇는 고개다. 2차선 5번 군도가 지나고 있는 곳으로 대전차 방호벽이 설치되어 있다.
금탄고개 들머리는 방호시설 남쪽 아래의 수레길을 따라 묘지까지 쉽게 올라갈 수 있는데,
북측 아래 통신중계기 울타리에 걸린 표지기를 따라 들어섰다가 길없는 사면에서 개고생을 한다.
힘겹게 사면을 치고 올라 가족묘지에 도착하니 먼저 온 창병씨가 기다리고 있다.
묘지에서 지나온 월롱산을 돌아보며 잠시 쉼을 하고는,
묘지 상단부에서 이어지는 희미한 족적을 잠시 따르니 기간봉 정상으로 이어진 임도가 나오는데,
기맥길은 우틀하여 아래로 진행하여야 하나, 좌측 기간봉 정상이 궁금하여 오름길로 진행하면,
기간봉 정상은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서 발길을 돌린다.
정상 아래로 이어지는 임도로도 잠시 들어가 보았지만 역시나 좌측 아래로 이어져 정상과는 멀어진다.
다시 임도 접속지점으로 돌아나와 임도를 따라 내려서다가,
기맥 능선은 좌측 고생길의 부대 울타리 방향으로 진행해야 하지만,
잠시 후 다시 만나게 되므로 그냥 임도를 계속 따르면,
임도가 우측 아래로 휘어지는 지점에서 좌측 수레길로 들어서면,
부대 울타리를 따라 이어오는 기맥능선과 만나 우측 능선 숲길로 진행한다.
소나무숲으로 이어진 희미한 족적을 따라 진행하는데 좌측으로 기간봉쯤이 보이고,
거친 등로를 따라 작은 봉우리를 넘어서 내려서면,
파주시 교하읍 검산동과 탄현면 축현리를 잇는 검산로 고개로 내려서게 된다.
희미한 족적을 따라 고개 우측으로 내려서서 고갯마루를 지나 남쪽 들머리 방향으로 진행해도 되지만,
탱크 방호시설 좌측에 낙석방지망과의 틈으로 내려서서 좌측 아래로 진행한다.
<검산로(21번 군도)>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검산동과 탄현면 축현리를 연결하는 검산로(옛 21번 군도)가 지나가고 이곳도 대전차 방호시설이 있다. 고개 남쪽 아래에 있는 검산동은 조선 초에 신숙주가 아버지 묘터를 찾기 위해 마을 뒷산에 있는 월롱산 남맥(南脈) 일대를 샅샅이 뒤진 끝에 마침내 찾아냈다 하여, 묏자리를 검색한 곳이라는 뜻에서 검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검산로 도로에 내려서서 좌측 아래에 있는 들머리로 들어서서,
가족묘지가 있는 곳에서 잠시 목을 축이며 쉼을 한다.
돌아본 기간봉 방향.
10여분의 느긋한 쉼을 뒤로하고 다시 기맥길로 들어서면 좌측으로 방치된 파주 농산물 물류센터가 보이고,
오랫동안 방치된 듯 보이는 물류센터를 빙 돌아 묘지가 있는 지점에서 좌측 아래로 진행해야 하는데,
약간의 의문을 가지며 그냥 직진의 능선길로 진행하다가,
앞서가던 창병씨가 길을 잘못 든 것 같다고 하며 본인은 그냥 알바 길을 따라 건너편 기맥 능선으로 접속하겠다고 한다. 정통 기맥길을 밟아보려는 우리가 그럴 수는 없다며 오던 길을 돌아나와 5분여의 알바를 마감하고 다시 갈림길로 돌아나와,
물류센터를 끼고 내려서면,
물류센터 옆 안부를 지나 건너편 오름길로 이어지는 뚜렷한 한북기맥 등로가 이어져 있다.
물류센타 옆 안부에서 완만한 오름길을 따라 능선에 접속하여 우틀하여 능선길을 따르니,
앞쪽에서 다가오는 창병씨를 돌려세워 한북기맥 능선을 따르면,
창병씨가 지름길로 접속한 지점을 지나게 된다.
수레길 수준의 완만한 등로를 따르다가 임도 수준의 등로에 접속하여 좌틀하여 진행하면,
용도를 알 수 없는 불럭 건물을 지나게 되고,
편안히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 내려서서 파주시 맥금동과 탄현면 축현리를 연결하는 검산로를 지나게 지난다.
능선 좌측의 창고건물 축대를 따르다가 숲으로 들어서면,
제법 뚜렷한 등로가 이어지고,
좌측으로 고려출판물류 건물 뒤편을 지나 우틀하여 진행하면,
좌측으로 벌목이 된 능선을 따르게 된다.
좌측 파주시 맥금동 방향 조망.
기맥 능선이 벌목지대를 따라 좌측으로 휘어지며,
우측 공장지대 울타리를 끼고 나란히 진행하는데,
좌측으로는 지나온 기간봉이 조망되고,
우측으로는 가야 할 기맥 능선에 자리한 기독교 상조회 공원묘원이 멀리로 보인다.
벌목지대 능선을 따르다가 파란 지붕의 건물 모퉁이 부분에서,
울타리 연결 부분이 트인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서면,
기맥 능선을 차지한 BM오피스퍼니처 회사를 좌회하여,
앞쪽 능선으로 접속하게 된다.
돌아본 기맥 능선을 차지한 가구회사 전경.
능선 위로 올라서면 널찍한 임도가 이어지며 평산신씨 가족묘지 앞을 지나게 되고,
주변에 축산폐기물이 즐비한 임도를 지나면 도로가 좌측으로 휘어지는 부분에서 좌측 숲길로 들어서야 하고,
앞쪽으로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를 올랐다가 내려서야 하지만,
기맥 능선길이 작은 관목으로 진행이 어러울 듯 보여 사면을 따라 가로질러 진행하면,
탱크 방호시설과 법흥3리 버스 정류장이 있는 바구니고개에 도착하게 된다.
<바구니고개>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맥금동에서 탄현면 금산리로 연결하는 359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이다. 고갯마루에 탱크 방호설이 있고, 바로 남쪽 아래에 법흥3리 버스정류장이 있는데, 버스정류장 뒤편의 능선으로 바로 오르면 온통 가시나무와 작은 소나무가 진행을 어럽게 하므로, 버스정류장 앞 녹색 화살표 방향의 도로를 따라 진행하다가 우측 능선으로 오르는 게 좋아 보인다.
바구니고개 고갯마루 전경.
바구니고개에서 바로 능선 위로 오르면 이런 험난한 능선이 잠시 이어지고,
짧은 거리를 진행하는데 한참이나 걸려서 겨우 임도에 접속하여,
우측 임도를 따라 기독교 상조회 공원묘지로 진행하게 된다.
관계자의 정의가 알 수 없어서 그냥 관계자인 척 임도를 따라 진행하면,
기독교 상조회 공원묘원으로 진입하게 되고,
드넓은 공원묘원 가운데 능선길을 따라 전방의 131봉 방향으로 진행한다.
도로를 따라 공원묘원 상단부로 올라서면 비포장 임도로 바뀌고,
임도 가운데를 막고 있는 원형 철조망을 통과하여 진행하면,
좌측으로 지나온 공원묘원은 물론 기간봉에서 이어온 기맥능선도 모두 가늠된다.
임도를 따라 131봉 정상에 올라서면 산불감시초소와 깃대가 세워져 있고,
사방으로 조망이 시원하게 펼쳐지며 한북기맥은 우측 산불감시초소 옆으로 이어진다.
남서쪽으로 가야 할 오두산과 한남정맥의 마지막 봉우리인 문수산쯤도 희미하게 가늠되고,
서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의 합수점이 시원하게 조망되며,
북쪽으로는 임진강 건너편 장단면의 산들이 뚜렷이 조망된다.
131봉에서 바라본 임진강이 한강에 합류되는 지점 조망.
<임진강(臨津江)>
우리나라 중심부를 동서로 흐르고 있는 임진강은 강원도 안변을 원류로 영풍을 거쳐 이천(伊川), 안협(安峽), 마전(麻田), 삭영(朔寧), 연천(連川|)에 이르러 포천(抱川)과 합류 대탄(大灘)을 이룬다. 오른쪽 유역에는 아호비령산맥이 뻗었고, 왼쪽 유역에는 지류들이 흐른다. 주요 지류는 강원도 고미탄천(古味呑川: 114 km), 경기도 평안천(平安川: 81 km)·한탄강(漢灘江: 130 km) 등이고, 5 km 이상인 지류는 250여 개다. 기록에 따르면 삼국시대는 임진강을 칠중하(七重河)라 하였고, 경기도 연천군에 고구려 칠중현(七重縣)의 치소(治所)인 파주 칠중성(城)이 있었다. 예부터 신라·백제·고구려의 국경으로 분쟁이 잦은 지역이었다.
고구려 때 당시 표로하로 호칭되었으나 이성계가 조선조 개국 당시 공양왕이 송도에서 역대 왕의 신주를 모시고 몰래 빠져나와 고량포에서 돛배를 타고 상류로 도망을 가다 구미연(龜尾淵)에 이르러 배가 파산하여 신주와 배는 강물에 가라앉았고 왕은 구사일생 강 언덕으로 기어 나왔다. 후에 왕은 원주 지방으로 도망을 가다 결국 간성에서 피살되었다. 이로 인하여 이곳에서 신주를 빠뜨렸다 하여 신지강(神智江) 또는 구미연(龜尾淵), 구연(仇淵)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율곡이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임진강 나루에 있는 화석정에 틈이 날 때마다 들기름에 젖은 걸레로 정자 마루와 기둥을 닦도록 하였다. 그리고 임종 때, 어려움이 닥치면 열어보라고 하며 봉투를 남겼다. 세월이 흘러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 4월 그믐 밤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때 폭풍우가 너무 심해 한 치 앞을 볼 수 없었다. 이때 호종하던 이항복이 율곡이 남긴 봉서를 열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라고 씌어 있었다. 화석정에 불이 붙자 관솔이 타듯 불길이 올라 나루 근처가 대낮 같이 밝아 선조 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1593년 환도하면서 이 강에 당도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순국한 병사들의 넋을 달래고자 나루터 강변 모래사장에 제물을 차려놓고 위령제를 지내게 된다. 의주파천 당시 4월 그믐밤 폭풍우 속 노심초사 고생 끝에 이 나루를 건너게 된 쓰라린 아픔과 이 강을 지키고자 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용감한 충신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가운데, 선조가 통곡하며 "하늘의 도움을 받아 이 나루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구나 하였다"하여 신지강(神智江)이 임진강(臨津江)으로 개칭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살짝 당겨본 임진강과 한강의 합수점.
임진강 건너편의 장단면 방향 조망.
한남정맥 산행길에서 칠장산 부근을 지나면서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 死居龍仁)"이라는 예기를 자주 들었는데, 살아서는 진천땅이 좋고, 죽어서는 용인땅이 좋다 라는 뜻이다. 그런데 먼 옛날 임진강 건너편 장단면에서 군 복무를 하면서 들은 얘기는 "생거개성 사거장단(生居開城 死居長湍)"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었다. 살아서는 송도 개성에서 떵떵거리며 살고, 죽어서는 돌 하나 없는 황토흙 지대인 장단에 묻히면 좋다는 예기다. 지금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장단지역에는 옛 고려와 조선시대 고관과 왕족들의 무덤이 무척이나 많았던 기억이 나는데, 언제쯤에나 임진강 건너도 마음대로 갈 수 있는 날이 올는지..!
이제 한북기맥(오두지맥) 길은 저기로 보이는 오두산까지 우측으로 빙 둘러서 이어지게 된다.
131봉을 뒤로하고 북서 방향 능선으로 잠시 진행하다가 이내 좌틀하여 내려서고,
거친 사면길 같은 능선을 잠시 내려서사 가족묘지를 지나면,
작은 봉우리 직전 안부에서 교통호가 이어진 직진의 봉우리 방향 거친 기맥 능선길을 두고 좌틀하여,
동화경모공원묘원 가장자리를 따라 우회하기로 한다.
수많은 실향민들이 잠들어 있는 동화경모공원묘원 가장자리를 따라 진행하면,
<동화경모공원>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에 있으며, 단순한 묘원이 아닌 통일을 갈망하는 이북도민들의 생전에 이루지 못한 망향의 한을 위로하고, 자유 대한의 품에 안긴 후 이북도민들의 인고와 반공투쟁으로 대한민국 발전에 이바지한 그 발자취 등 자랑스러운 정신적 유산을 후손들에게 길이 남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경모숭조의 참다운 "추모의 기념의 장인 실향민들의 영원한 안식처이다.(동화경모공원 홈피)
기맥길은 봉우리를 넘어서 묘원 건너편 능선으로 이어지지만,
능선길이 거칠어서 녹색의 화살표 방향 묘원 가장자리를 따라 우회하여 진행한다.
안부를 지나 다시 묘원 가장자리를 따르면,
아무런 글귀가 새겨져 있지 않은 기념탑 앞을 지나게 되고,
기념탑 앞에서 내려다 보이는 동화경모공원묘원의 규모에 놀람을 금치 못한다.
동화경모 공원이 있는 법흥리는 조선시대 교하군 현내면 지역으로, 큰 절이 있어 법회를 자주 열고 불법을 흠앙하게 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황희의 예장 때 문종이 문(文)·덕(德)·지(智)를 넓히도록 교시한 것에 따라 우선 법을 준수하는데 앞장서자고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기념탑을 지나 앞쪽으로 보이는 전망대를 향해 가장자리 도로를 따르면,
능선을 거쳐서 이어온 기맥능선에 합류하여,
경모공원 전망대를 지나게 되고,
전망대 뒤편의 도로를 따라 잠시 더 진행하면,
도로가 우측으로 휘어져 내려가는 지점에서 좌측 각시고개로 내려서는 계단길이 나온다.
막혀있는 철제 펜스를 월담하여 도로에 내려서면,
넓은 도로(헤이리로)가 지나는 각시고개에 도착하여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편 도로로 진입한다.
<각시고개>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에서 금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왕복 4차선 도로(헤이리로)가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도로를 따라 오르다가 대광물류 직전에서 좌측 숲으로 들어서면 희미한 숲길이 이어지고,
이내 보현산으로 이어지는 뚜렷한 등로에 접속하여,
보현산은 우측 지근거리에 있지만 별다른 조망이 없다 하여 생략하고 좌틀하여 기맥길을 이어가는데,
<보현산(普賢山, 135m)>
파주시 탄현면 금산리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쇠말뚝 2개가 있고 선답자들의 시그널만 있을 뿐, 그 이외는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보현산은 1978년 무장공비 침투로 인해 1,998발의 지뢰가 묻혀있는 무시무시한 산이었다. 산 주변에는 집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 있는 산이 지뢰산이라니 그곳에 살던 주민들은 참 편치 못했을 것 같다. 그 지뢰를 2007년 5월부터 6개월 간에 걸쳐 군부대가 나서 지뢰를 거의 모두 제거하고, 그 해 11월부터 산책로를 확보해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하지만 아직도 지뢰가 남아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좀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라 한다.
우측 철조망에는 경고문구가 연이어 걸려있다.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일몰에 맞추어 문을 닫는다고 하여 부지런히 걸었더니 발바닥에 불이 나고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 호젓한 등로에 앉아서 간식을 먹으며 잠시의 휴식을 취하고,
노란 갈비가 수북한 솔숲 등로를 따라 진행하니,
좌측 공장 지붕 위로 지나온 동화경모공원 방향 기맥 능선이 조망되고,
우측으로는 임진강과 건너편의 장단면 지역이 지척으로 보인다.
닫혀있는 철제 펜스를 좌회하여 나서면,
좌측에 헤이리애팬션 단지가 자리하고 정면의 월송정이라는 갈비집이 있던 곳은 공터로 변해 있다.
이곳에서 기맥길은 건너편 월송정 식당 자리 공터를 가로질러 이어지지만 능선길이 공장과 식당 건물로 막혀있다고 하여, 좌틀하여 헤이리로 도로를 따라 좌회하여 성동사거리까지 진행하기로 한다.
헤이리로 도로에 접속하여,
도로를 따라 성동사거리까지 진행하는데,
길 건너편의 헤이리예술마을에는 코로나19 확산에도 불구하고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평화누리길 7코스 헤이리길 들머리를 지나 앞쪽의 성동사거리에서 길을 건너,
<성동리(城東里) 사거리>
법흥리에서 자유로 성동 IC로 통하는 360번 지방도와 헤이리로가 교차하는 곳이다. 성동리는 조선시대 교하군 신오리면 지역으로, 오두산성 아래에 있어 붙은 이름이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성동리와 법흥리 각 일분 지역을 병합하여 성동리라 하였다. 이 지역은 앞으로 임진강이 흐르고 삼도품과 김포.강화.개풍 땅을 바라볼 수 있는 요충지역이다. 잣골·작골이라고도 한다.
평화누리길 안내판.
성동사거리 도로를 건너서 우측 성동 IC 방향으로 진행하여 절개지 사면을 따라 기맥 능선으로 오르면,
잠시 호젓한 산길이 이어지더니,
한때는 밭으로 이용되었음직한 넓은 공터를 지나,
우측으로 각종 최첨단 모텔들의 진입로쯤으로 보이는 도로로 급하게 내려섰다가는,
길이 없는 건너편 능선으로 어렵게 오르게 된다.
길없는 급경사를 힘겹게 오르면서 우측으로 보이는 무인모텔에는 지금 시간에 우측 모텔 건물의 12개 객실 중에서 빈방이 3개 뿐이다. 다들 저렇게나 열심들인데 왜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세계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는지..ㅉㅉ
봉우리를 오르며 돌아본 한북기맥 능선 방향,
참호가 이리저리 연결되어 있는 봉우리를 지나,
우측으로 풍금한정식 앞 도로에 내려서서는 좌측 건너편의 임도로 들어선다.
오두산이 지척인 듯 보이는데도 연이어지는 봉우리들에 지쳐서,
이 임도가 오두산으로 바로 연결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급경사의 임도를 따라 오르는데,
우측 커다란 나무에 매여진 그네는 춘향이가 탓을 듯이 보이고,
가파르게 오르던 임도는 봉우리 아래에서 끝나고,
교통호를 따라 봉우리로 오르니,
참호가 빙 둘러져 있고 임진강 방향 조망이 시원하게 펼쳐지는 117봉 정상에 도착한다.
서쪽으로 한강과 임진강이 합쳐져서 할아버지강(祖江)이 되어 서해로 흘러가는 합수점이 내려다 보이고,
북쪽으로는 임진강도 시원하게 조망된다.
117봉에서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배경으로.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건너편으로 조망되는 117봉 사면 내림길은 수직에 가까운 급경사로 이어지고,
수레길에 내려섰다가는 다시 우측 사면으로 내려가면,
오늘 산행의 산길 날머리인 오두산 통일전망대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도로가 나오고,
도로를 따라 오두산 통일전망대로 향한다.
우측으로 보이는 자유로 문산 방향.
좌측 자유로 서울 방향.
통일전망대 진입로를 따라 오두산 정상을 향한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돌아본 자유로 문산 방향과 지나온 한북기맥 봉우리 조망.
아침에 지나온 월롱산 기슭의 LG디스플레이 파주공장 건물이 이곳에서도 뚜렷이 보인다.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내디뎌서 오두산 정상에 자리한 통일전망대에 도착하니,
<오두산(鰲頭山, 110m)>
경기도 파주시의 탄현면에 있는 산이다. 조선 전기에 '오도성산(烏島城山)'이라 불렸으며, '구조산(鳩鳥山)'이라는 별칭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현 서쪽 7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여지도서』에는 "다른 이름으로 구조산(鳩鳥山)이라고도 부른다. 임진강과 한강이 흘러나와 산 앞에서 합쳐지고, 또 율리포와 함께 셋이 서로 어울려 바다로 흘러들어 간다. 기세가 웅장하여 옛날에 형승을 논하는 사람이 중국의 금릉(金陵)에 비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에 솟아 있어 높지는 않지만, 임진강과 한강, 그리고 한강의 최하류 부분인 조강(祖江)을 조망할 수 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땅을 마주보고 있어 통일전망대가 설치되었다. 인근에 장릉 · 통일동산 등이 있다.
코로나19로 5인 이상 집합금지와 집콕 권고가 내려져 있음에도 매표소 앞에는 입장객들이 줄지어 서 있다.
<오두산 통일전망대(鰲頭山 統一展望臺)>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에 있는 전망대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오두산(烏頭山) 정상에 세워져 있다. 이곳은 북한지역과 직선거리 460m로, 휴전선 155마일 중 비무장지대 폭이 가장 짧은 곳이다.
서울의 젖줄인 한강과 북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임진강의 합류지점에 위치한 해발 118m의 고지이다. 광개토대왕비문에 나오는 관미성터(오두산성)가 있는 곳으로, 사적 제351호로 지정된 과거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1992년 개관한 이래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있으며 임진강 건너로 북한의 황해북도 개풍군 관산반도(약 3.2km) 주민들의 생활을 망원경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서, 통일교육의 살아있는 체험교육장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냉전의 유산인 남북 분단의 비극적 현실을 이해시키고 자유주의가 보장된 상생과 공영의 통일을 이루기 위한 염원과 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1991년에 기공하여 지하 1층, 지상 5층, 연건평 2,600평의 석조건물로 1992년에 개관하였다. 1·2층의 전시실 내에는 북한실과 통일실을 마련하여 북한 주민의 농사짓는 모습 등을 볼 수 있으며, 북한주민의 생활상을 알 수 있도록 현재 북한주민들이 사용하는 의류, 교과서, 생필품 등의 전시되어 있어 민족분단의 실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통일의지를 새롭게 가다듬을 수 있는 전시공간으로 통일교육의 살아있는 교실 역할을 하고 있다. 3·4층은 전면이 유리로 된 전망실로 되어 있다. 해발 140m의 높이의 이곳에서는 북쪽으로 개성의 송악산(松嶽山), 남쪽으로 서울의 여의도 63빌딩을 바라볼 수 있다.
한강과 임진강의 합수점이 내려다 보이는 오두산 정상에 도착하여 한북기맥(오두지맥) 종주를 마감한다.
<파주 오두산성(坡州 烏頭山城)>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炭縣面) 성동리(城東里)에 있는 백제 때의 산성이다. 한강과 임진강이 서로 만나는 지점인 파주 오두산의 정상(해발 118m)을 중심으로 축조된 길이 약 620m의 백제시대 퇴뫼식 산성이다. 사면이 가파른데 서쪽은 임진강, 남쪽은 한강에 면하고, 북쪽은 산록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산성에 대한 자세한 탐사 결과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지점인 서안쪽에 높이 1~1.5m, 길이 약 30m, 폭 6~7m에 이르는 당시의 성벽이 정연하게 남아 있음이 확인되었다. 축조방법은 기초석 위에 5~15cm의 지대석(支臺石)을 들여쌓기를 하고 안쪽은 모두 돌로만 채운 뒤채움석 형식으로, 큰 암반을 채석으로 이용하고 그 단면을 성벽으로 이용한 고식(古式)의 성곽 형태를 갖추고 있어 백제시대 성곽연구에 중요한 유적이 되고 있다.
이 산성의 위치 및 산형 등 주변 지형여건으로 보아,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에 나오는 각미성(閣彌城)과,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원년조(391년), 백제본기 아신왕(阿莘王) 2년조(393년) 등에 나오는 백제 북변의 관미성(關彌城)이라는 학자들의 주장이 있고,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오두산성을 백제의 관미성이라 기록하고 있어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곳이다.
이곳 오두산성은 삼국시대에 백제의 북방 전초기지였던 관미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오두산성은 탄현면 서울에서 문산 방향으로 자유로를 달리다 왼쪽으로 보이는 오두산의 정상 부분과 산사면에 띠를 두르듯이(테뫼식) 축성된 석성이다. 오두산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흘러드는 길목에 위치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는데, 주변으로 높은 산이 없어 서쪽으로는 북한 지역이, 남쪽으로는 김포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두산성은 문헌 및 고고학적으로 백제의 관미성일 가능성이 제기되어 주목받았는데, 백제의 북방전초기지였던 관미성은 병신전쟁(396)에서 고구려 광개토왕의 수군이 백제의 아신왕을 치고 수도 위례성을 함락시키기까지 고구려의 남하 경로를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백두산우회원 모두가 함께 졸업 인증을 해야 하는데, 그놈의 바이러스가 뭔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모든 강의 할아버지강이 되어 서해로 흘러가고,
한북기맥 산줄기는 저 합수점으로 그 맥을 담근다.
한북정맥은 한강봉 남쪽 분기점에서 북한산으로 뻗어 장명산으로 이어져 공릉천에서 그 줄기를 물에 담그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한북정맥이 한강과 임진강을 가르는 수계라면 당연히 이곳 오두산으로 이어져서 한강과 임진강의 합수지점에서 그 명을 다하는 게 맞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북정맥은 최초로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개념을 정립한 신경표에서 정한 대로 따르고 보완할 부분은 따로이 보완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강과 임진강의 합수점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북쪽 임진강 방향.
걸어온 한북기맥(오두지맥) 방향.
살짝 두드려본 통일기원북의 북소리가 가슴에 저며든다.
동쪽 통일동산중앙공원과 고려역사관 방향.
교하 방향.
교하와 심학산 방향.
수시로 오가는 셔틀버스에 올라 통일휴게소로 향하면,
1.8km를 달려내려 금방 통일휴게소에 도착하고,
이내 도착한 택시에 올라 오산리고개에 주차해 놓은 차를 회수하여 귀갓길에 올랐다.
금번 한북기맥의 최고봉인 월롱산이 228m에 불과하고,
등로도 공원묘지와 군부대, 공장지대를 전전하는 코스로 일반적인 등산로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북기맥 종주가 재밋고 흥미롭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인간이 가진 호기심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것어여서
우리를 끊임없이 도전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아무쪼록 우리 백두님들도 호기심 가득한 삶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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