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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금북기맥 4차(서천오거리~용담정) : 남산과 왕개산 비단 솔숲길을 걸어 장항에서 마감한 금북기맥

by 재희다 2021. 1. 27.

산 행 지 : 금북기맥 4차(서천오거리~용당정) 충남 서천군.

산 행 일 : 2021. 01. 23.(토)

산행코스 : 서천오거리~남산~댕골산~이성산~중태산~옥산육교~철도건널목~송내교차로~왕개산~성주산~용당정

              (17km, 5시간 30분 소요)

산행참가 : 5백두.

 

<산행지도>

 

 

 

금북기맥도 오늘로서 마지막 구간이다. 모든 백두들이 함께 할 수 있었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시절이 허락하지를 않으니 어찌할 수가 없는 노릇이고, 5명 이상 집합금지 상태라 3명이서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이리저리 일정이 취소된 분들이 합류하여 나랏님의 명(命)을 거역하게 되었다. 법대로 하는 총장을 멋대로 명(命)하려 한 추한 장관이 죗값을 받은 전례가 있으니, 후일 인류의 생존을 위해 어떤 선택이 좋았는지는 따로 판단받아야 할 일이며, 일반적으로 다양성이 생존 확률을 높인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데 위안을 삼는다.

 

금번 구간의 최고봉인 남산의 높이가 147m 밖에 되지 않고, 출발지인 서천오거리에서 장항까지의 차량 도로 거리가 8km 남짓에 불과하지만, 비산비야의 구릉지대를 이리저리 휘돌아서 진행하는 기맥길이라 17km를 걸어야 한다. 서천오거리에서 남산 들머리까지는 포장도로를 따라 진행하고, 남산 들머리에서 거친 등로를 올라 능선 산책로에 올라서면 이후 멋진 솔숲길이 정상까지 이어지고, 이후부터 기맥길은 신설도로로 인해 끊어진 곳도 많고 딱히 등로의 흔적도 별로 없어 오직 GPS에 의존해 기맥길을 찾아야 알바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 대부분이 나지막한 산야를 지나는 구간이라 크게 힘든 곳은 없지만, 이리저리 뒤엉킨 잡목을 헤쳐나가야 하고 때로는 가시덤불도 지나야 한다. 그래도 금번 산행에서 가장 좋았던 곳은 단연코 남산 능선을 따라 이어진 솔숲길을 걷는 것이었고, 마지막 용당정을 앞두고 기맥길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성주산은 전망대도 있고 나름대로 금강과 바다가 조망되어 지친 몸과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어제 내린 비로 등로가 질척이지 않을까 살짝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6시 40분쯤에 과천을 출발, 서울을 빠져나오는 차량으로 붐비는 수도권을 벗어나자 약간은 한산한 느낌이 드는 서해안고속도를 달려 산행 출발지인 서천 문예의전당 주차장에 도착하여 산행 준비를 한다.

 

 

산행 출발 지점인 서천오거리에서 가깝고,

무료 주차가 가능한 서천 문예의전당 주차장에서 움츠려든 몸을 풀고,

 

<서천군(舒川郡)>
금북기맥이 금강과 만나는 서천군은 충남 서해안 남쪽 끝에 자리하는 고장이다. 장항은 서천군에서도 가장 남쪽 지역으로 금강 하구에서 전북 군산과 마주한다. 서천군(舒川郡)은 몰라도 장항읍(長項邑) 만큼은 아는 시절이 있었는데, 이는 장항선 철도와 장항제련소의 명성이 한몫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장항제련소는 초딩 시절 사회과부도 책에 사진으로 오르던 시절이 있었기에 더욱 유명했으리라 짐작된다. 옛날 장항읍에는 서천읍에는 없는 것들이 있었다. 항구와 선박은 물론이고, 장항제련소, 비료공장, 제지공장, 유리공장 등이 활기차게 가동 되었고, 세무서, 경찰서, 등기소 등이 서천군의 소재지인 서천읍을 제치고 장항읍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관공서가 보령시나 서천읍으로 통폐합 또는 이전되어 장항은 한결 조용해진 항구가 되었다.

 

도로를 따라 산행 출발 지점인 서천오거리로 향한다.

 

 

서천군 한산면 출신 독립운동가인 월남 이상재 선생의 동상이 있는 서천오거리(군사오거리)에서 금북기맥 마지막 구간 산행을 시작한다.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의 동상.

 

<한국 근대의 선각자 월남 이상재>
월남 이상재 선생은 1850년 숭유 명문의 후예로 서천에서 태어나 일찍이 신사유람단원으로 일본의 개화 문물을 시찰하였으며 미국공사관에서 외교 업무를 담당하여 개화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서재필과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만민공동회를 주최하여 자주민권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YMCA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국권을 강탈당한 후 청년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믿음으로 청년교육 운동을 펼쳤으며 1924년 한국 스카우트연맹의 초대 총재로 추대되었다. 언론을 통한 민중계몽에 힘썼으며 좌우익 민족 세력의 통합을 꾀한 신간회의 초대회장에 추대되었으니 민족의 원로요 표상이시다. 선생은 비범한 변설로 민족의 울분과 기개를 표출하였으니 우국의 발로였으며 민중의 희망이었다. 1927년 선생이 서거하심에 한국의 거인이며 청년의 등불이라고 추앙하였다. 선행의 동상을 이곳 서천에 건립하니 선행의 나라사항 정신을 본받고자 함에 그 뜻이 있다. 2012년 10월 31일. -기념사업회-

 

서천오거리 로터리를 돌아 군산.장항 방향 도로를 따라 금북기맥 능선 찾기에 나서면,

 

도로변에 있는 "맑은 소리숲 쉼터" 공원을 통과하여 지나게 되고,

 

좌후방으로는 지난 구간에 올랐던 봉림산과 천방산이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다.

 

 

공원을 지나자 이내 4번 국도를 굴다리로 통과하게 되고,

 

611번 지방도를 따라 직진의 마서 방향으로 계속 진행하면,

 

남산의 동쪽 끝자락에 다가서게 되고,

 

LPG충전소 맞은편 산자락에서 남산으로 오르게 된다.

 

 

좌측 사면에 자리한 가족묘지로 쉽게 오를 수도 있지만, 기맥 능선이라 생각하며 거친 들머리로 들어서면,

 

길 흔적이 없는 능선을 잠시 오르게 되고,

 

이내 남산 주능선 산책로에 올라, 금북길은 우측 남산 정상 방향으로 이어진다.

 

 

남산 주능선 일반 등산로는 비단길 수준으로,

 

가만히 서서 보고만 있어도 힐링이 될 듯하다.

 

 

 

벤치가 놓인 작은 쉼터도 지나고,

 

양탄자처럼 바닥에 수북한 갈비를 밟으며 솔내음에 취하는 사이에,

 

 

커다란 당산나무와 쉼터가 있는 좌측 황새마을 방향 갈림길을 지나게 된다.

 

<황새마을 갈림길>
능선 좌측 충남 서천군 마서면 계동리 동죽마을이 황새마을로 불린다. 동죽마을은 금강변의 넓은 옥토와 청정 서해안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농촌 마을로, 큰 마을의 동쪽에 위치하고 대나무 숲이 많아 동죽(東竹)이라 불린다고 한다.

 

멋진 장소에서는 걸음을 멈출 만도 한데, 남산이 1.5km라 표시된 이정표를 따라 무심히 지나는 백두들.

 

 

갈림길에서 살짝 올라서니 가족묘지에 정자도 있고,

 

좌측 건너편 능선에 통신탑이 꽂혀있는 가야 할 중태산도 보이며 금북기맥 능선이 '역⊂' 자로 빙글 돌아나감을 알 수 있고,

 

우측으로는 서천읍내가 나뭇가지 사이로 조망된다.

 

돌아본 남동쪽 동죽리 황새마을 방향.

 

 

지역주민으로 보이는 두 쌍의 중년부부가 코로나 상황에도 힐링을 즐기는 모습이 부럽고,

 

우측으로는 서산의 명산들이 모두 다 조망되며,

 

북동쪽으로는 서산 벌판을 달리는 장항선 철로도 보인다.

 

 

앞쪽으로 제법 뾰족해 보이는 남산 정상이 모습을 드러내고,

 

좌측 계동리와 우측 남산리 방향 갈림길인 사거리리 안부를 지나 살짝 올라서면,

 

우측으로 서천읍 시가지가 다시 조망되고,

 

나무 벤치가 있는 쉼터를 지난다.

 

우측 희리산과 서천읍내 방향.

 

 

기맥능선 등로는 우측 남산리 방향 갈림길 안부를 지나,

 

그린듯이 멋진 능선길을 따르면,

 

주변 풍광과 어울리는 바위들도 멋지다.

 

 

멋진 솔숲길이 좀 더 길게 이어지기를 바랐는데, 어느새 성곽의 윤곽이 드러나 보이는 남산성으로 올라서니,

 

좌측 남쪽 방향으로 가야 할 중태산이 가늠되고,

 

당겨본 이성산(앞쪽)과 중태산(뒤쪽 통신탑이 있는 봉우리) 방향.

 

당겨본 금강 하구둑 방향으로 금강도 희미하게 가늠되며,

 

 

KBS방송국 중계탑이 자리한 남산 정상에 도착한다.

 

"2021년 건강하세요!"라는 플래카드가 걸린 남산 정상에는 흔한 정상석조차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먼저 도착한 분들이 인증도 않고 하산길에 오른다.

 

<서천 남산(146,9m)>
충남 서천군 서천읍 남산리와 마서면 봉남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이 산을 중심으로 동남쪽에서 서남쪽까지 높은 산은 없고 50~60m 남짓되는 구릉이 분지와 어우러져 조화로운 풍광을 자아내고 있으며, 이 산의 8부 능선쯤에는 산의 정상부를 둘러싼 남산성이 있다. 산성의 상부를 이루는 토성과 삼국시대의 기와조각과 토기조각이 출토되었다는 이 성은 조선시대 세종 때 지세가 좋지 못하여 읍성을 옮겼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사실로 미루어, 적어도 이곳이 세종 때까지는 산성이나 읍성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성의 기능을 한 이 성은,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조(660년)에 따르면 "백제가 망하고 음력 9월 3일에 당나라 소정방은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과 귀족을 배에 싣고 사비에서(지금의 부여) 17일에 금강 하구를 통과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떠나가는 의자왕과 귀족들을 마지막으로 보기 위하여 남산성에 그의 가족인 여인들이 올랐다고 한다. 국왕과 일가친척이 적의 배에 실려 끌려가야 하는 모습을 봐야 했던 백제 여인의 마음은 1600년의 세월을 넘어 깨어지고 부서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마음의 편린인 양 깨어지고 부서진 성벽, 그리고 흩어진 돌들, 국왕과 일가친척들을 눈 앞에서 떠나보내야 했던 백제 여인들의 한이 서린 남산에서 바라보는 금강하구와 서해바다는 무심하기만 하다. 국왕과 귀족들이 끌려간 후 해마다 음력 8월 17일이 되면 여인들이 남산성에 올라 떠나간 님을 그리워하며 재회의 날을 애타게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져, 떠난 님을 그리워하는 백제 여인들의 풍습이 계승되어 조선시대에는 여인들이 1년에 단 한번 외출하여 일가친척과 친구들을 반나절 동안 만나 볼 수 있는 "반보기"의 장소가 남산성이었다고 한다.
이곳 서천 남산의 다른 이름으로 영취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타마 붓타께서 깨달음을 얻은 후에 처음으로 설법을 한 곳이 인도의 영취산이다. 영취산은 불교와 관련된 지명으로 양산 통도사 뒷산인 영취산과 여수 흥국사 뒷산인 영취산을 비롯하여 우리나라에는 여덟 군데의 영취산이 있다고 한다. 영취산이라고도 불리는 이곳 서천 남산의 주위에는 운은사사지, 봉남리사지와 운갑사사지가 있고 백제의 폐망과 관련된 한 맺힌 산이지 싶다.(펌)

 

남산 정상 인증은 하는 수 없이 셀카로!

 

 

쓰라린 역사의 상흔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히 서 있는 중계탑을 카메라에 담고는 남선을 뒤로하니,

 

뚜렷한 남산성 성곽의 형태가 나타나며,

 

<남산성>
백제시대 석축산성인 남산성이 자리한 남산은 해발 고도가 147m에 불과한 산이지만 시야가 좋아 금강 하구는 물론 군산시까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조망권이 넓은 산이다. 따라서 서해안과 금강 입구를 감시할 수 있는 요충지로 평가되고 있다.
이 산 정상을 테뫼식으로 감고 있는 석축 산성이 지방기념물 96호인 남산성이다. 성 둘레는 620m에 달하며 정상부에는 건물이 있던 흔적이 있다. 폭 2.6m의 남문터와 2.5m의 서문터가 확인되었으며, 성안에는 6~9m의 통로가 성벽을 따라 돌아가고 있다. 현재 성벽은 남쪽과 북쪽에 남아있고, 붕괴된 지점에서는 삼국시대 토기조각과 기와조각이 발견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성안에는 우물이 1개 있었으며, 세종 때 지세가 좋지 못하여 읍성을 옮겼다고 한다. 따라서 이곳이 세종 때까지는 산성이나 읍성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04년 9월 남산성 2차 발굴조사를 한 문화재연구원 측은 "성벽과 문(門) 시설의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여러 시대에 걸쳐 축조된 성벽의 축성 수법과 시설의 변화과정을 한 곳에서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 될 수 있다"고 발굴 결과에 대해 평가했다.

 

성곽 잔해 위로 올라서니 서해바다가 뚜렷하게 조망되고,

 

가야 할 서쪽 방향 금북기맥 능선에는 137봉쯤이 보인다.

 

 

허물어진 백제의 중요 거점 남산성을 내려서며 성을 쌓은 이들의 아픔을 다시금 되새기고,

 

잠시 내려서니 봉남리와 남산리 방향 갈림길인 사거리에서 직진의 영운사 방향으로 들어서면,

 

<봉남리 갈림길>
서천군 마서면 봉남리와 서천읍 남산리를 잇는 사거리로 이곳에서 기맥길은 영운사 방향 편안한 길로 이어진다. 이곳 등로 좌측 아래에는 봉남리 3층 석탑이 있는데, 서천군지(1929)에 따르면 봉남리 석탑은 1914년 탑 아래쪽 마을에 살던 사람이 군산에 사는 일본인에게 팔려고 탑을 해체하였다가, 그 당시 서남면장과 서천군 경찰에 의하여 옛 절터인 현재의 자리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탑 속에 있던 보물(복장물)의 향방은 미상이라고 한다. 지난 1993년에 탑신과 옥개석이 옥북리 역멀에 묻혀 있다는 마을 사람들의 제보를 받고 서천군에서 중장비를 동원하여 발굴했으나 실패하였다고 한다.

 

무너진 남산성처럼 흔적이 희미해져 가는 묵묘를 지나게 되고,

 

다시 호젓한 솔숲 힐링 길이 이어지더니,

 

'ㅓ' 자 갈림길에서 금북길은 직진의 영운사 방향 능선길을 두고 좌틀하여 내림길로 이어진다.

 

 

남산을 내려서는 능선길도 완만하게 이어지며,

 

우측 마서면 월포리 방향으로 서해바다가 조망된다.

 

살짝 당겨본 아소래섬 방향.

 

당겨본 개야도 방향.

 

 

좌측 사면으로 이어지는 수레길에 접속하여 계속 직진의 능선길을 따라,

 

잘 단장된 묘지를 지나,

 

임업영농법인 건물 아래로 이어진 도로를 따르면,

 

서천에서 장항국가산업단지로 연결되는 4차선의 신설된 도로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금북기맥길은 앞쪽 아래로 보이는 굴다리를 우측으로 통과하여 댕골산에 오른 뒤 다시 도로를 건너와야 하지만, 길없는 사면을 올랐다가 고속도로 수준의 너른 도로를 무단횡단 해야 하고 또 가파른 절개지도 오르내려야 하므로, 도로 우측의 댕골산은 건너뛰고 굴다리에서 직진의 도로를 따라 좌측 절개지 사면으로 진행키로 한다. 최근의 인터넷 지도에는 도로 동쪽인 좌측 절개지 위의 봉우리를 댕골산으로 표기하고 있기도 하다.

 

도로 서편 절개지 위에 있다는 댕골산을 가기 위해 굴다리를 통해 도로를 건너는 대신에, 굴다리 앞에서 직직하여 도로 동편 절개지 위의 금북기맥 능선으로 향하다가 돌아본 굴다리 입구에는, 굴다리를 통과하여 댕골산을 향하던 백두들이 돌아오고 있다.

 

 

도로 가드레일이 끝나는 지점 묘지가 있는 곳에서 절개지 사면길로 들어서면,

 

절개지 상단으로 오르는 사면길은 아카시아와 조릿대 등이 뒤엉켜 진행이 무척이나 어렵다.

 

거친 사면길을 헤치고 절개지 상단으로 향하는 백두들.

 

 

절개지 상단부에서 좌측 숲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남서쪽 방향으로 금강 하구와 만나는 서해바다쯤이 보이고,

 

도로 건너편 절개지 꼭대기가 금북기맥에 속한 댕골산으로, 원 금북길은 신설도로가 차지한 능선을 따라 댕골산을 올랐다가 이곳으로 이어오게 되지만, 도로 무단횡단과 절개지 오르내림을 피하여 바로 이곳으로 왔다.

 

 

절개지 상단에서 숲으로 들면 이내 능선 위로 이어지는 수레길에 접속하게 되고,

 

 

다음 지도에 댕골산이라 표시된 봉우리 직전에 우측 길흔적을 따르면,

 

남산 이후로 보이지 않던 표지기들이 반갑고,

 

낙엽과 고사목들이 산재하여 어수선하고 희미한 내림길을 잠시 따르면,

 

잘 단장된 가족묘지가 나오며,

 

우측 마서면 남천리 방향으로 잠시 조망이 트인다.

 

 

기맥은 고사하고 능선인지조차 불분명하지만 희미한 족적을 따라 조릿대 터널로 들어서서,

 

제법 크게 자란 대숲을 지나면,

 

우전방으로 통신탑이 자리한 가야 할 중태산이 보이고,

 

기맥길에서 만난 적이 있는 분의 낯익은 표지기가 반갑고,

 

마서면 옥북리 남상마을 뒷산 낙엽이 푹신하고 통나무가 있어서 좋은 곳에서,

따스한 커피와 창병씨의 마지막 고구마를 나누며 첫 쉼을 한다.

 

 

우측 마서면 옥북리 남상마을에서 좌측 봉남리로 이어지는 옥북리 도로에 내려서서 건너편 임도로 들어선다.

 

좌측 마서면 봉남리 방향.

 

 

도로에서 임도를 따라 올라서면 임도는 밭 가장자리로 이어지다가,

 

'Y' 자 갈림길에서 우측 능선으로 이어진 임도로 들어서서 잠시 진행하면,

 

능선 위에 자리한 밭을 지나게 되는데,

밭에서 일을 하던 봉부가 밭을 둘러싼 울타리 통과 방법을 알려준다.

 

그물망 울타리 문을 열고 밭으로 들어서고,

 

다시 그물망 울타리 문을 열고 밭을 벗어난다. 고마워유~, 문단속도 잘 했씨유!^^

 

 

밭을 지나 대나무 숲을 통과하여 나오면,

 

더 이상 등로의 흔적이 보이지 않지만, 잡초지대 건너편 수레길로 진행하는데,

 

좌측 봉남리 방향으로 지나온 남산 정상에 자리한 KBS 중계탑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마서면 옥북리 마을과 들판이 내려다 보인다.

 

 

밭 사이로 이어진 금북길은 창녕성씨 가족묘로 이어져 다시 숲으로 들어서고,

 

완만하지만 거친 등로를 따라 밋밋한 봉우리를 지난다.

 

 

잠시 호젓한 능선길이 이어지다가,

 

야생동물 방지용 그물 울타리가 나오고,

 

옛 고개의 흔적인 역력한 곳으로 내려서는데,

직진의 건너편 능선으로 진행하면 길이 없고 우측으로 길흔적을 따르면 희미한 족적이 이어지며,

 

다시 그물망 울타리를 만나 잠시 진행하면,

 

 

611번 지방도 절개지 야생동물 보호용 철망 울타리가 막아서는데,

도로로 내려서는 철계단 입구의 철망이 선답자들의 발길에 뜯어져 있다.

 

 

611번 지방도(장마로) 통과는 가파른 철계단을 따라 절개지를 내려서서는 건너편 절개지로 다시 오르게 되는데,

 

좌측 마서면 계동리에서 남쪽 장항읍으로 연결되는 611번 지방도에 내려서고,

 

건너편 절개지 철계단이 있는 우측으로 이동하여,

 

가파른 절개지를 올라서 돌아본 611번 지방도 모습.

 

물론 이곳에서도 야생동물 보호용 철망 울타리의 뜯어진 부분을 통과하게 된다.

 

 

김해김씨 가족묘지를 지나 숲으로 들어서면,

 

길흔적이 없는 거친 이성산 오름길을 오르게 되고,

 

이내 잡목이 어수선한 이성산(66m) 정상에 올라 기맥길은 우측으로 휘어지며 이어진다.

 

이성산 정상 셀카 인증.

 

 

 

희미한 족적을 더듬어 이성산을 내려서면,

 

우측으로 잠시 전에 건너온 616번 지방도가 내려다보이고,

 

기맥길은 도로를 우측에 두고 좌측으로 휘어져,

 

대나무숲과 묘지 사이의 능선으로 이어져,

 

좌측 마서면 어리 마을과 우측 옥북리를 잇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지나게 된다.

 

시멘트 도로로 내려서는 백두들.

 

우측 옥북리 방향.

 

 

시멘트 도로에서 따로이 등로가 없는 능선 위 밭 사이로 올라서고,

 

능선 위에 자리한 밭을 통과하여 앞쪽으로 보이는 봉우리를 향한다.

 

밭을 지나 묘지에 올라서며 돌아본 금북능선 모습.

 

 

숲으로 들어서는 들머리 옆 묘지에서 창병씨의 마지막 고구마를 먹으며 쉼을 한다.

 

 

 

잠시의 휴식을 뒤로하고 다시금 숲길로 들어서니 희미한 족적이 이어진 숲을 지나게 되고,

 

밋밋한 봉우리를 지나면 또다시 가족묘지가 나타나며,

 

앞쪽으로 통신탑이 자리한 중태산 방향으로 내려서면,

 

홍덕리고개(역리고개)를 지나게 된다.

 

<홍덕리고개>

우측 마서면 옥북리 역리 마을과 우측 홍덕리 마을을 잇는 왕복 2차선 도로가 지나가는 곳이다. 기맥길은 이곳 도로를 가로질러 건너편 임도로 이어진다. 우측의 옥북리 역리 마을은 조선시대에 두곡역(豆谷驛)이 있었던 마을이다. 그래서 지금도 역촌(驛村) 또는 역리(驛里)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홍덕리고개에서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앞쪽으로 중태산 정상이 다가오고,

 

귀신이 나올듯한 외딴 폐농가를 지나게 되는데,

 

최근 흉가 탐방 유튜브 체널에서 폐가 탐방에 나섰다가 시신을 발견한 사례도 들어서 등골이 오싹하는 느낌!

 

가팔라지는 시멘트 포장 임도를 따라 오르면,

 

임도는 SKT 기지국으로 연결되어 있고,

기지국 직전 우측의 중태산 정상으로 오르는 들머리로 들어서면,

 

역시나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는 중태산(101.7m) 정상에 도착한다.

 

<중태산(中台山, 101.7m)>
서천군 장항읍과 마서면의 경계지역에 있는 산이다. 정상에는 SKT 마서기지국이 있고, 무심코 가면 지나치기 쉬운 삼각점 있으나, 산 정상에는 이렇다 할 정상석도 없이 억새를 비롯한 잡풀만 가득하다.

 

중태산 정상 인증.

 

 

중태산을 뒤로하고 완만하게 내려서면,

 

시멘트 포장 임도를 지나게 되고,

 

노오란 갈비가 수북이 쌓인 희미한 숲길을 잠시 따르면,

 

능선 위로 이어진 도로에 내려서게 되는데,

 

좌측 덕암마을 방향으로는 동태산도 조망되며,

 

건너편 봉우리 직전까지는 능선 위로 이어진 도로를 따르게 된다.

 

 

능선 위에 자리한 밭 사이로 이어진 농로를 따르는데,

 

우측으로는 장항생태산업단지로 연결되는 도로가 보이고,

 

좌측으로 만(卍) 자 깃발이 나부끼는 일광암이 눈길을 끌고,

 

장항산단로를 건너는 옥산육교를 지나게 된다.

 

좌측 마서면 덕암리 대치사거리와 장항역 방향.

 

우측 장항산업단지 방향.

 

 

장항육교를 지나면 장항교회 세례인들의 공동묘지인 "임마누엘동산"이 나오는데,

기맥길은 좌측 묘지로 들어서서 가운데로 보이는 하얀색 대형 십자가 뒤로 이어진다.

 

공동묘지로 들어서서 뒤쪽 숲으로 들어서면,

 

이내 잘 단장된 남원양씨 가족묘지에 도착하여 기맥길은 좌틀하여 묘지 뒤로 이어지지만,

 

잠시 발길을 멈추고 우리네 조상들의 삶을 예기하며 따뜻한 커피를 나눈다.

 

묘지 앞쪽 추모비에는 여느 우리네 선친들의 삶과 비슷하게 살아온 조상을 추모하는 글귀가 눈길을 끈다.

 

 

남원양씨 묘역에서의 편안한 쉼을 뒤로하고 작은 봉우리를 넘으면,

 

지도에 성황당고개라 표시된 안부를 지나는데 성황당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기맥길은 언덕을 넘어 마서면 송내리 구절마을의 '물댄동산교회'로 들어서서,

 

기도원 겸 교회 앞마당을 통과하여 내려서고,

 

마을이 아홉 산줄기를 끊어 놓았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다는 구절리(九切里)의 마을회관에서 도로에 접속하여,

 

좌측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장항선 철도 건널목이 나온다.

 

 

철도 건널목을 건너 잠시 도로를 따르다가 송내삼거리 교차로에서 좌틀하며 도로를 건너면,

 

21번 국도와 4번 국도가 만나는 송내교차로가 나오는데 우리는 4번 국도 아래로 통과하여 좌틀하여 진행한다.

 

선답자의 산행기를 보면 송내교차로에서 왕개산으로 진행하는 방법이 두 가지로 나뉜다.
첫번째는 교차로에서 4번 국도 아래로 통과하여 우틀하여 도로를 따라 올라 좌측 숲으로 가는 길이고,

두번째는 교차로 넘기 직전 우측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로망스모텔 직전의 4번 국도 굴다리를 통과하는 길이다.
우리는 가급적 기맥 능선을 따르려고 첫번째 방법으로 진행하였으나, 두번째 방법이 조금 더 수월해 보인다.

 

 

4번 국도 아래를 통과하여 우틀하여 도로를 따라 진행하면,

 

도로 가드레일이 끝나는 지점에서 좌측 숲으로 들어서면 묘지가 나오고,

 

 

잠시 밭 가장자리 숲길을 따르다가 마서면 송내리 마동초등학교 뒤편 가족묘지에서 우측으로 진행하면,

 

앞쪽으로 가야 할 왕개산이 보이고 우측 끝으로 로망스모텔이 보이더니,

 

이내 로망스모텔에서 지하통로로 이어지는 사거리안부를 지나 건너편 임도를 따라 오르게 된다.

 

 

임도를 따라 오르면 좌측으로 마동초등학교와 장항선 철도가 보이고,

 

이내 임도는 끝이 나고 다시 왕개산 숲길로 들어서게 된다.

 

 

왕개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린듯한 비단길로 이어지며,

 

갈림길에는 이정표도 세워져 있고,

 

산객들이 쉬어갈 수 있는 벤치도 설치되어 있다.

 

 

통나무 계단길에 가이드 로프까지 설치되어 있는 오름길이 나오고,

 

오늘 산행길에서 제일 가팔라 보이는 오름길을 잠깐 오르면,

 

왕개산 정상부에 올라서게 되는데,

기맥길은 우틀하여 이어지지만 좌틀하여 왕개산 정상을 밟으며 돌아서 진행키로 한다.

 

 

좌측으로 왕개산 정상부를 한바퀴 도는 둘레길을 따르면,

 

삼각점이 자리한 왕개산 정상부를 알리는 코팅지가 걸려있다.

 

<왕개산(97m)>
충남 서천군 장항읍 송내리와 성주리, 원수리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 삼각점이 있는 정상부에 조성된 둘레길을 따라 전망데크와 운동기구를 비롯한 쉼터가 설치되어 있지만 흔한 정상석은 보이지 않는다. 지도에는 왕개산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주변의 이정표에는 왕제산으로 표시하고 있다. 어느게 맞는지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왕개산 정상 인증.

 

동쪽 화양면 방향으로는 금강이 조망된다.

 

 

왕개산 정상을 확인하고 정상부를 한바퀴 도는 둘레길을 따라 계속 진행하면,

 

전망데크와 체육시설이 있는 쉼터에 도착하여,

 

남쪽 장항과 군산을 잇는 동백대교 방향.

 

바로 옆에 왕개산을 내려서는 금북기맥 갈림길이 있는 전망데크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산행 도중 쉴 때마다 먹고 또 먹었는데, 지고 온 배낭에서는 화수분인양 먹거리가 끊이지를 않는다.

 

 

전망데크 옆 갈림길로 들어서며 왕개산을 뒤로하니,

 

호젓한 소나무 숲길이 이어지며,

 

우측으로 도인정사 갈림길을 지나서,

 

언덕 수준의 봉우리에서 정규 등로는 우측으로 이어지지만 좌측의 희미한 금북길로 들어서면,

 

장항읍 원수리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가족묘지 상단 가장자리를 따라 우측으로 휘어지며 내려서니,

 

좌측이 원수리이고 우측이 성주리인 구룡말고개로 내려서게 된다.

 

 

구룡말고개에서 우측으로 10여 미터 이동하여, 좌틀 구룡수목원 관리용 도로로 들어서고,

 

구룡수목원 가장자리 능선을 따라 오르면,

 

식재된 갖가지 나무들을 보면서 오르게 되고,

 

이름 모를 나무들이 빼곡히 식재된 거친 오름길을 잠시 오르면,

 

 

정규 등로로 보이는 멋진 등로가 이어지는 봉우리에 올라서게 되는데,

이곳에서 금북길은 길 없는 좌측 능선으로 이어가야 하지만 4차선의 4번 국도를 무단횡단해야 하므로,

뚜렷한 우측 등로를 따라 내려서서 지하통로를 이용하여 4번 국도를 통과하기로 한다.

 

 

등로는 사면 내림길로 이어져,

 

4번 국도 절개지 수로 옆으로 내려서는데 앞쪽으로 성주산이 건너다 보이고,

 

이내 4번 국도 지하통로가 나온다.

 

이정표에는 금북길의 왕개산을 왕제산으로 표시해 놓았는데 정리가 필요해 보이고,

왕개산에서 정규 등로를 따라오면 이곳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20여 미터 지점에서 좌틀하여,

 

밭 사이로 이어진 좁은 수레길을 따르면,

 

뚜렷한 수레길이 앞쪽 절개지 숲으로 이어지고,

 

성주산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들머리로 들어서게 된다.

 

 

뚜렷한 등로를 따라 잠시 오르면,

 

등로는 4번 국도 절개지 위로 이어지며,

 

앞쪽으로 금강과 건너편의 군산시도 조망되고,

 

좌측으로는 우회한 금북기맥 능선의 4번 국도가 잘라낸 절개지가 내려다 보이는데,

넓은 4차선 도로를 무단횡단하지 않고 우회하여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등로는 금북기맥 우측으로 휘어지는 능선을 따라 성주산 방향으로 이어지며,

 

좌측으로는 금강과 건너편의 군산시가 시원스레 조망되고,

 

짧은 오름길을 오르면,

 

지도상 보르메산이라 표시된 운동기구와 쉼터가 있는 성주산 갈림길에 도착하여,

 

금북기맥은 좌틀하여 용당정으로 향하지만,

우측 200여 미터 거리에 있는 성주산 정상을 밟아 보기로 한다.

 

남쪽으로는 금강 건너편 군산시의 장계산과 월명산쯤도 조망된다.

 

 

우측 등로를 따라 성주산 방향으로 들어서니 이내 쉼터가 있는 안부를 지나고,

 

이내 전망데크와 운동시설이 있는 성주산 정상에 도착한다.

 

<성주산>
충남 서천군 장항읍 성주리에 있는 조그만 산으로, 정상에는 금강 하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고, 1등 삼각점과 운동기구 시설이 있으며 이정목과 표석도 있다. 전망대에 올라 서니 서해 바다로 흘러드는 금강 하구가 한눈에 들어오고 강 건너 군산시가도 건너다 보인다. 우측으로 보니 장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LS메탈(옛날 장항제련소)의 굴뚝이 산꾼을 반겨준다. 그리고 잠시 후에 가게될 금북기맥의 마지막 지점인 용당정이 지척으로 보인다. 성주산의 유래는 아마도 산 아래 동네가 성주골이라 그리 불리지 않았나 짐작한다. 성주골은 승쥐골 또는 성주동이라고도 부른다. 성주산 아래에 있으므로 그리 부르고, 일설로는 성인이 지팡이를 꼽고 살았다 해서 성줏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성주산 정상의 지적삼각점.

 

동쪽 금강하구둑 방향.

 

남쪽 장항과 군산을 잊는 동백대교 방향.

 

 

성주산 정상에서 금강을 배경으로.

 

 

성주산을 뒤로하고 갈림길이 있는 보르메산으로 돌아나와,

 

직진의 등로를 따라 금북기맥의 끝인 용당정으로 향한다.

 

 

우측으로 천산아파트 갈림길 이정표가 나오는데,

 

우측으로 기벌포라 불리던 장항 시가지가 조망된다.

 

<기벌포라 불리었던 장항>
장항은 긴 목에 읍이 생겼다 해서 장항(長項)이라 부른다고 하며, 나당전쟁 당시 최후의 결전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금강 하구에 해당하며, 사비성(泗沘城)을 지키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의자왕 때에 좌평 성충(成忠)이 "만일 외국 군대가 백제를 침범하는 경우 육로에서는 침현(沈峴:충남 대덕군 마도령)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水軍)은 기벌포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뒤에 좌평 흥수(興首)도 같은 말을 할 정도로 백제의 국방상 요지였다. 왕은 깨닫지 못하고 적이 쳐들어오도록 기다렸다가 나당연합군에게 망하였는데, 그 기벌포가 바로 저기 장항을 지적한 것이었다.

장항은 기벌포의 전투로도 유명한 곳이다. 676년(문무왕 16) 11월에 기벌포(伎伐浦)에서 신라의 해군이 당나라 해군을 크게 깨뜨린 전투로, 기벌포의 위치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백강(白江)은 곧 지금의 금강이고, 금강의 하구가 곧 기벌포라고 알려져 있다.

고구려·신라·백제가 서로 자국의 발전을 노려 싸우던 중, 553년에 신라와 백제의 공수동맹(攻守同盟)이 와해되어 더욱 상호 항쟁이 격화되었다. 이에 645년에 신라는 당나리와 군사동맹을 맺었다. 그리하여 신라와 당나라 군대는 660년에 기별포에서 연합해 백제의 사비성을 함락시켜 백제를 멸명시켰고, 다시 668년에는 신라와 당나라 군대가 평양 근처에서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 지역을 직접 지배하고 신라까지 복속시키려 하면서 신라의 자주성을 빼앗았다. 동시에 고구려의 평양 이남과 백제 땅을 신라에 주기로 약속한 영토분할 약정을 위배하였다. 이에 격분한 신라는 당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대당전쟁(對唐戰爭)을 감행하였다. 신라의 대당 전쟁은 670년부터 676년까지 7년간 지속되었다. 신라는 북쪽 경계로 남하하는 당나라 군대를 맞아 675년 천성(泉城)과 매소성(買肖城) 전투에서 크게 이겼다. 이에 당은 육로로 신라의 한강 방어선을 돌파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676년 11월 금강 하구 기벌포에 설인귀(薛仁貴)가 지휘하는 당 함대를 침입시켜 신라의 측면을 공격하였다.

기벌포는 백제의 수도인 부여 방어를 위해 중시되던 지역이다. 이곳은 강의 하구라기보다 바다의 만(灣)이라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지역으로, 기벌포를 장악하면 서해를 남북으로 양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해의 제해권과 관련해서도 아주 중요한 군사 요충지였다. 앞서 신라는 673년에 함선 1백 척과 해군을 서해에 배치시켜 방비하고 있었다. 676년 설인귀의 당나라 해군이 기벌포로 내려오자, 사찬((沙飡), 시득(施得)이 함선을 이끌고 기별포에서 설인귀 군과 싸웠으나 처음에는 패배하였다. 그러나 크고 작은 전투 22번에 걸쳐 결국 당나라의 수군 4천여 명의 목을 베고 승리하였다. 기벌포 전투에서 당나라의 해군을 격파함으로써 신라가 승리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얻게 되었다. 이 싸움은 대당전쟁을 승리로 끝맺은 마지막 회전이었다.

 

 

잠시 등로를 따르니 원수근린공원 날머리가 나온다.

 

장항읍 원수동(元水洞)은 원래 물가의 동쪽에 있으므로 수동(水東)이라 부르던 지역인데, 1947년 동명 변경에 따라 윈모(院毛)와 수여(水餘)의 이름을 따서 원수동(元水洞)이라 하였다.

 

원수근린공원 안내도.

 

돌아본 원수근린공원 날머리.

 

 

도로를 따라 내려서면,

 

장항 휴먼시아 아파트가 나오고,

 

금북기맥 능선 절개지 직전에서 횡단보로를 건너,

 

휴먼시아 APT를 좌측에 두고 도로를 따르다가,

 

휴먼시아 APT가 끝나는 도로에서 우틀하면 좌측으로 용당공원 입구 표지판이 나타난다.

 

 

이제 용당공원 입구로 들어서면 금북기맥의 종착점인 용당정이 자리하고 있다.

 

용당체육공원이라 쓰인 간판을 달고 있는 공원으로 들어서면 용당정으로 오르는 계단길이 나타나고,

 

이내 용당공원 정상부에 자리한 용당정(龍堂亭)에 도착하여 금북기맥 종주를 마감한다.

 

 

용당정에서 바라본 장항과 군산을 가르는 금강에 놓인 동백대교 조망.

 

전북 장수군 신무산 아래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은 크고작은 지류들을 모으고 모아서는 너른 들판을 적시며 유유히 흘러 장항과 군산을 사이로 마지막 물길을 이루어 서해 바다로 흘러가려 한다. 금강이 역사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은 백제의 웅진 천도로부터 기인될 것이다. 그로부터 장항은 웅진으로 가는 물의 첫 길목이었지만, 역사는 금강의 첫 포구인 장항(기벌포)을 기록하지 않았다. 남한에서 한강과 낙동강에 이어 세번째로 큰 강이며 굽이치며 흐르는 물결이 마치 비단결과 같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이름 금강(錦江). 지금 그 마지막 물줄기를 말없이 바라보며 인간의 삶에 대해 되돌아 생각해 볼 뿐이다.

 

금강 물줄기가 서해로 잦아드는 장항 전망산 방향.

 

<장항읍(長項邑)>
장항의 역사는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기면서 시작되었다 하겠다. 사비성을 지키는 관문이었던 기벌포(伎伐浦)가 지금의 장항지역이다. 참고로 진포(鎭浦)는 부여군 임천의 고다진(古多津)으로부터 서천군 장항의 포구인 장암진(長岩津, 現, 장항 도선장)에 이르는 금강 하구 지역을 일컫는 이름이며, 1380년 고려말 최무선과 수군이 군산 앞바다에서 화약무기를 사용해 왜구를 무찌른 진포대첩의 위치가 군산 앞바다라 하는데, 진포의 지역은 금강하구를 가리키는 폭넓은 지역이라 여겨진다. 군사적 요충지에 불과하던 장항지역은 대부분의 지역이 갈대밭이었으나, 1929년 간척지가 개발되고, 1930년 장항항이 개항되었으며 1931년 장항선이 개통되고, 1936년 장항제련소, 1937년 시가지계획공사의 착수 등으로 개발이 활기차게 이루어져 장항항이 1964년 국제항으로 승격되면서 항구도시의 모습을 갖추었으나, 1989년 지정된 국가산업단지의 지연으로 장기간 침체에 빠진 지역이기도 하다. 장항읍은 한 때 서천군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이었으나 이제는 서천읍보다도 적은 인구를 갖고 있다. 서천 특히 장항읍의 주요 부진의 원인으로는 1990년 완공된 금강하구둑의 시너지효과를 살리지 못하고 오히려 금강 건너 군산시로의 경제적,사회적으로 물동량, 유동인구 등의 유출이 가속화되었고, 육로에 빼앗긴 물동량에 장항읍의 중심부에 위치한 장항항 도선장은 2009년 뱃길이 폐쇄되기에 이른다. 게다가 장항역의 이전과 장항선의 구간 연장은 장항읍의 쇠락을 더욱 가속화하게 된다. 군산시의 주력 산업들인 대우자동차 군산공장 폐쇄와 한국조선해양(舊, 현대중공업) 12번 도크의 폐쇄로 군산시의 경제가 엉망인 가운데, 장항지역의 산업 또한 강건너 불구경을 넘어 어려운 환경이 더욱 곤란하게 된다. 군산시와 장항읍 중심부를 연결하는 교량 하나를 두고 서천군과 군산시는 오랜 시간 실갱이(꼬장?)를 벌인 끝에 동백대교라는 이름표를 걸게 된 만큼, 보다 큰 그림의 발전책과 노력이 필요하다.

 

금강 하구와 장항을 배경으로.

 

살짝 당겨본 장항 시가지와 전망산 방향.

 

<장항읍과 장암산성>
장항은 일제 시대에 형성된 항구도시로, 조선시대 서천군의 남부면과 마길면 지역으로 그 당시 갈대밭을 메워서 만든 시가지와 오랜 역사를 가진 주변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장항 주변에는 백제시대 서천의 중심 산성인 남산성(영취산성)의 외곽성으로 송내리산성, 중태산성, 서태산성, 한성리산성이 있다. 이들 산성의 보호를 받는 백제의 최첨단 군사기지 기벌포를 방어하기 위한 산성이 바로 장암산성으로 백제시대부터 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역사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장항읍 소재지에서 공단쪽으로 3.5km 떨어진 곳에 LS메탈 장항공장이 있는데 서천포 장암산성은 그곳 정문에서 우측으로 보이는 전망산과 후망산 사이에 위치해 있다. 1995년 충청남도 지정문화재 제 97호로 지정된 장암산성은 조선시대 읍성 쌓는 기법인 잔돌끼음쌓기로 되어 있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돌을 사용해 안정감을 준다. 해발 43m의 능선 남단 서쪽 부분이 바다를 향하게 하고 주변에서 돌을 채석해 쌓은 성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좌평 성충이 의자왕에게 극간하다가 옥에 갇혀 굶어 죽을 때 최후의 일언으로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쳐들어 오거든 육로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옵고, 수군은 기벌포에 적군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경비를 철저히 해 수군이 기벌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만 보아도 기벌포는 백제 말 전략적 요충지였고, 이를 꿰뚫고 있던 성층의 충언을 깨닫지 못한 의자왕의 실수가 나당연합군에 패망하는 계기가 됐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벌포의 명칭은 고려시대에 긴 바위가 절벽을 이룬 포구라 해서 장암포라 불렸고, 조선시대에는 서천포영이라는 수군 주둔지에서 유래한 서천포(舒川浦)라 불렸다. 서천포 장암진은 백제시대 이래 고려, 조선말까지 존재해 오던 진으로서 계속해 수축(修築), 개축(改築)해 왔고 문헌상으로 중종 9년(1514년)에 쌓았다고 하는 것은 현존하는 석성을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잘 가거라 금강아!

 

강 건너편으로 몇 달 후에 밟게 될 금남기맥의 마지감 산인 군산의 장계산이 보인다.

 

금북기맥의 끝지점 용당정에서 금강 하구를 배경으로.

 

 

2018년 4월 금북기맥 백월산에서 출발한 금북기맥 종주는 이따금 대천의 회가 생각날 때 두어번 걷다가, 이번 코로나로 산행이 중단되어 거친 기맥길을 정리하자는 취지에서 연속으로 두번을 더 걸어 총 4회의 산행으로 종주를 마감했다. 산행 계획을 하면서 무척 거칠 것으로 예상을 하였으나 겨울철에 걷기에는 부담스럽지 않고 가끔씩 비단길 같은 멋진 솔숲길이 산꾼을 힐링해 주어서 썩 괜찮은 느낌으로 금북길의 추억을 마무리 한다.

 

 

용당정을 내려서서 귀갓길에 오른다.

 

 

용당공원을 내려서서,

 

택시로 서산 문예의 전당 주차자에서 차량을 회수하여,

 

코로나19로 서천의 횟집들이 문을 닫아 서울로 오던 중,

회장님의 연락을 받고 선릉역으로 가서 방역지침을 준수하며 모처럼의 만남을 마무리한다.

 

2018년 4월에 시작한 금북기맥 종주를 3년여 만에 마침표를 찍었다.

시작이 반이라 했는데, 나머지 반을 걷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좀 어줍잖은 예기이기는 하지만,

노는 것도 목표가 있으면 훨씬 즐겁고 흥미롭다.

더욱이나 같은 목표를 가진 벗들이 곁에 있으면 한결 더!